소설리스트

387화 (387/604)

꼰대 중의 최강 꼰대가 스노우 필드의 젊은 꼰대들의 기강을 잡겠다고 강림하였어도, 선배 드루이드조차 공략법을 포기한 상대인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날도 추운데 여기까지 고생해서 온 남의 소중한 드루이드를 따뜻하게 맞아 주진 못할망정, 요즘 젊은 나무들은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 그릇 크다고 드라이어드가 됐으면 세상도 넓게 봐야지. 싹 다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서 다시 배워 와야 해.”

그러는 지는….

실새삼이 심술을 부리자 황새풀들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쯧.”

“그냥 상대를 하지 마세. 괜히 상대했다가 격이 떨어지겠네.”

실새삼의 기에 눌려 정신적 타격을 받은 게 여실히 보이는데, 황새풀 드라이어드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연신 ‘꺼져랑’을 외치며 대화를 거절했던 노랑만병초처럼,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날 훑기만 하며 소통을 거부했다.

“난 드루이드 제이라고 해. 잠깐이면 돼. 너희와 할 말이 있어.”

“다음에 다시 찾아오게나. 오늘은 때가 아닐세.”

그 ‘때’가 오긴 해?

“며칠 뒤에 산 아래 민가에서 축제가 열릴 거야. 그 준비에 너희의 도움이 필요해.”

“축제라니. 요즘 것들은 자기 수양을 멀리하고 허튼 짓만 일삼는군.”

“시간 낭비야.”

등을 곧게 세우고 하얀 도포를 휘날리며 모여 있는 모습이 꼭 작고 하얀 새가 무리 지어 있는 듯했다.

날이 추워지면 겨울을 나기 위해 무리지어 이동하던 철새들이 논밭에 들러 체력을 보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새들도 천적이 뜨면 부리나케 날개를 펼 텐데, 실새삼이 묘목 꼴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얕보며 버티는 게 분명했다.

똑같이 작은 드라이어드들이었지만 실새삼은 아이 티를 벗지 못했고, 저쪽은 체구만 작을 뿐 성숙한 느낌을 풀풀 풍기니까.

“아직 새끼 독수리라 위협이 안 되는 건가?”

난 내 품에서 추위에 작은 몸을 덜덜 떠는 실새삼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분명 실새삼이 몇 세대를 살아온 오래된 고목임은 분명하나, 눈보라가 벽을 친 스노우 필드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것도 있을 테다.

자기들이야말로 이 눈산을 홈그라운드 삼아 거칠게 피어난 산증인들이니, 타지에서 온 작달막한 드라이어드가 꼬장꼬장한 말투로 소리쳐 봤자겠지.

물론 우리가 은둔자의 정원에서 마주했던 그 장성한 실새삼의 모습이었다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그때의 실새삼은 온몸으로 ‘나 오래 살아온 드라이어드요’라고 오라를 풍겨 댔으니까.

“고리타분하긴. 너희 평생 스노우 필드에서 살 거야?”

그래도 실새삼이 먼저 기선 제압을 했기 때문인지, 황새풀들은 다짜고짜 내게 성깔을 부리던 걸 멈췄다.

아니꼽긴 해도 적어도 경청은 하는 태도로 날 바라봤다.

“날 봐. 이곳이 험한 스노우 필드라 하더라도 나와 같은 드루이드가 찾아오긴 해. 어쩌면 이 중에 그 드루이드와 연이 닿은 드라이어드는 함께 산을 내려가겠지.”

내가 말하면서도 솔직히 이게 통할 거란 자신은 없었다.

이들이 스노우 필드에서 떠날 마음이 없다면,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꽃들이라면 내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도박을 던져 볼 수 있었던 건… 선배 드루이드가 결국 이 산의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모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모든 꽃들이 한결같이 그녀를 무시하고 스노우 필드를 떠나길 거부했다면, 애초에 드라이어드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을 고려하고 또 고려해 봤을 것이다.

사람들이 축제까지 열어 그들을 달래고 빌었어도, 끝까지 스노우 필드에선 자진하여 가디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까.

오직 자신들만 생각하고 외부와 고립시키는 드라이어드들이었다면, 야생의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들과 모험을 떠나는 드루이드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겠지.

아직까진 낮은 거목이 묘사했던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과 직접 보고 겪은 드라이어드들 사이의 괴리감이 큰 정확한 이유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고 감정도 없는 돌멩이 같은 꽃들은 아니란 걸 알겠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굴면 없던 정도 떨어질 거야.”

혹독한 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척같이 자신을 다독여 이기적이게 되었다곤 하나… 그 역시 인간의 관점에서 본 꽃들에 대한 해석이 아닐까?

정말 스노우 필드에서 끝까지 가디언이 나오지 않은 건, 꽃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었을까?

앉은부채처럼 작은 동물들을 아끼고 보살피는 인자한 드라이어드도 있는데?

어쩌면 이 이기적이란 표현도 내가 낮은 거목에게 이야기를 먼저 들었기 때문에 갖게 된 편견이 아닌가 싶다.

세상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드라이어드들의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하물며 그들의 가치관이 되기도 하는 모체 신화나 꽃말도 수천수만 가지인데, 모든 드라이어드들의 성격이 다 데이지나 메스키트처럼 다정하면 그것도 이상하지.

이기적인 걸로 따지면 엘더도 만만찮은데, 얜 스노우 필드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도 아니잖아?

그래서 도박을 걸어 보는 거다.

“너희가 말하는 요즘 젊은 드루이드들은 그런 말투 완전 질색하거든. 완전.”

“내 말투가 그렇게 끔찍해?”

실새삼이 스플래시 대미지를 맞고 충격 받은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이 드라이어드들 중에서도 아닌 척해도 마음속엔 드루이드와 함께 여행을 떠나길 갈망하는 드라이어드가 있을 수도 있겠지.

평생 추운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따뜻한 곳을 열망하는 드라이어드도 있을 거고, 영혼의 연결을 맺어 좀 더 오래 살고 싶다거나 더 넓은 세상이 궁금한 드라이어드도 있겠지.

그들이 날 보고 모질게 대하거나 퉁명스럽게 대하는 건… 이곳에 갑자기 찾아온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느라 일부러 그러는 걸 수도 있다.

“만약 그걸 감안하고 영혼의 연결을 맺어도 말이야. 산 밖으로 나가면 완전 꼴불견 취급 받을 거야. 그런 태도는 결국 자신의 생각이 정답이고 상대는 가르쳐야 할 아랫사람으로 대할 때 나오는 거니까.”

“내가 꼴불견이야?”

“요즘 밖에 있는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 사이에서 그런 태도는 완전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야. 촌스러워.”

“내가 촌스러워?”

혹시 내가 그동안 실새삼에게 한 번도 티를 낸 적이 없었나? 왜 저리 충격이 크다는 반응이지….

“아무리 이곳에서만 지내서 말투와 태도가 고착화되어 있다고 해도 말이지. 밖으로 나갈 거면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유행 따라가야지.”

내가 아는 꼰대들은 아닌 척해도 유행이란 단어에 민감했다. 대놓고 꼰대 짓을 벌이면서도 남이 자신에게 꼰대라고 평가하는 걸 참지 못했으며 절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절대 뒤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며 얼마든지 너그러운 태도로 신세대의 문물을 포용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자기는 다른 꼰대들과 다르다면서.

하지만 아무리 시대를 평정했던 유행어라도 그분들이 사용하는 단계까지 갔으면 사실상 유행어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 미끼를 황새풀들이 무느냐 마느냐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드라이어드는 우리보다 심하지 않소?”

“얜 자기만 그걸 모르고 있는 거고.”

“그… 스노우 필드 밖의 드라이어드들은 다르단 말이오?”

하는 짓은 꼰대인데 어떻게 귀여워 보일 수가 있는 거지? 내 눈에 드라이어드들 한정 콩깍지라도 씐 게 아닐까?

“맞아. 다르지. 아무리 낯선 것이라도 시도해 보고 수용도 하고. 불의 침범 이후로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가만히 서 있다간 금방 도태되는 게 요즘 세상이야.”

완전히 지어낸 말도 아니었다.

불은 갈수록 지능적으로 변하고 드라이어드가 상대해야 할 적도 다양해지고 있었다.

사람은 물론 같은 드라이어드도, 그들이 작은 세계수라 부르는 드루이드도 적이 되어가는 세상.

멀리 내다보면 황새풀과 같은 성격은 변화에 제일 먼저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스노우 필드 밖에선 새로 온 사람들을 환영하고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이웃들과 친목을 도모하는 행사가 유행이거든.”

이건 지어낸 말.

“물론 너희가 별로라면 참가 안 해도 되는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아, 그 자리에 언제까지나 계속 있을 생각이면 굳이 참여 안 해도 돼!”

“흠흠, 자기 수양엔 새것을 배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 난 참가하겠소.”

“그렇다고 하면 나도 참가해 볼까나….”

“그런데 대체 무슨 축제인가?”

음… 이건 사실대로 말해도 되겠지?

“아… 포인세티아를 불러내려는 축제야.”

“포인세티아?”

“응, 내가 포인세티아를 데려가려 하는데 꼭꼭 숨어 버렸거든.”

그 말에 황새풀 드라이어드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선뜻 축제에 참가하겠다던 이들도 주저하며 서로를 향해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 필드의 가디언이라 자칭하던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 말이오?”

“응, 자칭이라기보단 정말로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맞지 않아?”

얼마나 전 세대의 포인세티아들이 직무를 유기했으면 이 지경이 된 거야?

만났던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 중 누구 하나 포인세티아를 좋게 보는 드라이어드가 없었다.

혹시 노랑만병초에게 했던 것처럼 축제의 정체를 숨겼어야 했던 걸까?

미적지근한 반응들을 보자 여태 구슬려 놓은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한참을 자신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던 황새풀들이 드디어 답을 내놓았다.

“우리 모두 그 축제에 참가하겠네. 산의 다른 곳에 있을 황새풀들도 우리가 설득하도록 하지.”

“어라? 정말? 진짜로?”

포인세티아와 관련된 축제라 모두들 말을 바꿔 거절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답이라 놀랐다.

거기다 다른 곳에 있을 황새풀들도 자신들이 나서서 설득해 주겠다니?

“자네의 말에 우리도 느낀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변화를 수용해야 발전하겠지.”

포인세티아에 대한 심정의 변화라도 생긴 걸까?

어찌 됐든 황새풀 드라이어드들도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이로써 내 목적은 완수했다.

“내가 촌스럽다니….”

아직도 충격에 헤어나지 못한 실새삼을 내버려 두고 공략법을 펼쳐 다음 대상을 물색했다.

“말도 안 돼. 한때 묘목들의 우상이었던 내가 촌스럽다니….”

“담자리참꽃나무?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아직 큰 나무 드라이어드는 본 적이 없네? 왜 다들 작은 드라이어드들만 있는 걸까?”

“내가… 내가….”

“실새삼, 추우면 아티팩트로 돌아갈래? 여기보다 더 추운 데로 갈 것 같은데.”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위쪽을 가리키며 실새삼에게 물었지만 그는 허망한 말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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