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6화 (386/604)

노랑만병초가 있다는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복수초를 공략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사실 돌담 쌓기를 최대한 미루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왜 앉은부채가 날 복수초에게 먼저 데려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복수초와 사이가 좋지 않아 정반대편에 살고 있다더니, 장난 아니게 멀었다.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해가 벌써 중천을 향하고 있을 정도이니….

세계수 가지의 힘 때문인지 몸의 자체적인 회복력이 높아졌지만, 아직도 어제의 여파로 인해 몸이 찌뿌둥했다.

그런 상태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산을 오르다 보니 아주 죽을 맛이고.

더구나 온통 주변에 눈, 눈 덮인 바위, 눈 덮인 땅, 오로지 새하얀 눈, 눈, 눈뿐이라 정신도 더욱 빨리 지쳤다.

나중에는 차라리 다 포기하고 돌담이나 쌓을 걸 하고 후회하는 마음도 들 정도였다.

“차…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온통 무채색인 공간에서 드디어 옅은 레몬 빛깔의 작은 꽃 무리를 발견했을 땐 그저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를 쌀쌀맞게 대해도 너무 반가운 나머지 얼마든지 사랑으로 포용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당?”

“꺼져랑. 여긴 우리 구역이당.”

“뭐냥, 그 눈빛은? 한판 붙자는 거냥? 얼마든지 덤벼랑!”

하지만 그 마음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안녕? 너희가 노랑만병초가 맞니?”

“꺼져랑.”

“난 제이야. 만나서 반가워.”

“꺼져랑.”

이 자식들이….

어째서 선배 드루이드가 주먹으로 그들을 다스리려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작달막한 연노랑 드라이어드들은 복수초와는 다른 방법으로 날 무시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그들은 삐약거리는 병아리처럼 ‘꺼져랑.’이란 말만 할 뿐이었다.

하도 ‘랑랑’거리니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너희 꺼지라는 말밖에 할 줄 몰라?”

“꺼져랑.”

벚꽃을 닮은 아담하고 귀여운 꽃과 다르게 하는 짓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노랑만병초는 복수초와 달리 메모리 스톤에도 정보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한 번도 1번째 테라리움에서 개화한 적 없는 아주 희귀한 꽃이란 뜻인데.

“옛날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고 있었어요.”

계속 이렇게 날 무시한다면 난 공략법대로 맞서면 된다. 내가 이미 예습을 해 왔다 이 말이야.

이야기를 하다 도중 끊으면 궁금해서 미쳐 버린다고 했지?

어떤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 당장 떠오르는 게 우습게도 ‘토끼와 거북이’뿐이라, 내 말을 듣든 말든 이야기를 시작했다.

“토끼는 달리기가 매우 빨랐고 거북이는 매우 느렸어요. 토끼는 시도 때도 없이 거북이를 느림보라고 놀려 댔어요.”

그러자 놀랍게도 시종일관 삐약삐약 꺼지라는 말만 반복하던 노랑만병초들이 입을 딱 다물고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오호라, 효과가 있네?

“그래서 결국!”

그리고 시험 삼아 한 번 끊어 봤다.

“그래서 결국 다음은 뭐당?”

“왜 이야기를 하다 끊는 거냥?”

“빨리 다음을 말해랑!”

“거북이가 토끼를 죽인 거당? 죽여 버린 거냥! 어서 이야기를 해랑!”

침묵을 좀 더 길게 이어 가자 꽃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한 거북이가 토끼에게 달리기 경주를 제안했어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자마자 소란이 진정됐고, 어느새 내 주위로 꽃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마침내 모든 동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경주가 시작됐고….”

이런 단순한 공략법이 정말로 통한다는 게 신기했다.

대체 선배 드루이드는 어떻게 이 방법을 깨달은 거지?

혹시 사람을 빡치게 하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가?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거고, 두 번째는….

“결국 쉬지 않고 달렸던 거북이가 경주에서 승리했어요.”

“역시 믿고 있었당!”

“토끼가 싹퉁바가지였던 거당!”

“꼭 어디 사는 누구 같은 녀석들이당! 음침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당!”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였지만 의외로 이 꽃들에겐 반응이 좋았다. 워낙 반응이 좋으니 뿌듯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말해 봐랑. 왜 우릴 찾아왔냥?”

심지어 무시하던 처음과 달리 친히 내게 방문 의사까지 물어봐 줬다.

“너희가 토끼와 같다, 이거지.”

“왜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거냥? 죽고 싶냥?”

“좋게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당. 당장 꺼져랑!”

난 더 약 올리기 위해 팔짱을 낀 채 한껏 내려다봐 줬다.

“복수초는 거북이고.”

내 입으로 직접 복수초를 언급했기 때문일까? 일순 분위기가 싸해졌다.

“너 방금 뭐라 그랬냥? 네가 복수초를 어떻게 알고 있냥?”

“왜 우리가 토끼고 복수초가 거북이냥?”

“입을 잘못 놀리면 단단히 패 주겠당!”

“눈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 주겠당!”

의도했던 대로 노랑만병초들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울분을 토해 내고 있었다.

“너희가 이렇게 늑장 부리는 사이 복수초들은 진작 준비에 들어섰다, 이 말이야.”

“제대로 이야기해랑! 대체 무슨 준비를 말하는 거냥!”

“어머, 아직 소문도 못 들었어? 난 일부러 늑장 부리는 줄 알았는데 아예 소문 자체가 늦었구나. 세•상•에• 노랑만병초 드라이어드들은 엄청 대단한 드라이어드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봐?”

“답답하게 굴지 말고 자세히 이야기해랑! 우리 숨넘어가는 꼴이 보고 싶은 거냥!”

오죽 답답했는지 눈밭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꽃들도 보였다.

“저 밑에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서 곧 축제가 열리는데. 스노우 필드의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참가해서 우열을 가릴 거거든. 이름하여 누가 가장 아름답게 축제를 장식하는가!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복수초들도 진작 참가해서 준비하고 있는데 너흰 여기서 이러고 있잖아.”

“축제라공? 야, 너 그런 거 들어본 적 있냥?”

“모르겠당.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들어 본 거 같기도 하당.”

“지금 그게 문제냥! 복수초 놈들이 진작 준비하고 있다고 하지 않느냥!”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던 노랑만병초들이 이내 일제히 날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디로 가면 되는 거냥!”

“당장 우리도 그 축제란 것에 참가하겠당!”

“빨리 알려 달랑!”

이런 아득한 눈산에서 자기들끼리만 지내서 그런지 여간 순수한 게 아니었다.

속여 먹는 게 미안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꽃들도 내게 돌담을 쌓으라 지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쪽이야.”

일부러 빙 돌아가는 길을 가리키자 노랑만병초들이 쏜살같이 튀어가 버렸다.

어찌나 빠른지 그들은 어느새 작고 노란 점이 되어 있었다.

“자, 그럼….”

남은 건 복수초 드라이어드들이었다.

미리 작업을 쳐 놔야 혼선이 생기지 않을 터였다.

나는 편히 몸에서 힘을 빼고 메스키트에게 두 팔을 벌렸다.

“염치없지만 부탁할게…. 최대한 빠르게.”

여기까지 올 땐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 보려 했지만, 빠른 시간 내에 복수초가 있는 곳에 도착하려면 메스키트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내 부탁에 메스키트는 군말 없이 번쩍 날 들어 올렸다.

“제이, 당신이 내게 의지해 주는 건 언제나 반기는 일이에요.”

메스키트는 아무리 냉기에 페널티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최강의 드라이어드였다.

그녀는 날 안은 채 깎아내린 절벽을 뛰어 내려가 삽시간에 복수초들의 곁으로 데려다줬다.

여전히 작달막한 세 송이의 노란 꽃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날 반겼다.

“늦었네요.”

“하도 안 오길래 도망간 줄 알았네요.”

“도와주겠다고 하더니 게으름을 있는 대로 다 피우네요.”

내뱉는 말투도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통통 튀고 말랑거리는 노랑만병초의 말투와 비교되어 더욱 딱딱하게 느껴졌다.

“아, 미안! 오다가 노랑만병초 드라이어드들을 만났거든.”

마치 금지어를 말한 것처럼 일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눈빛에 대미지가 있다면 난 이미 빈사 상태였다.

“어디서 감히 그 이름을….”

두 꽃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아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거의 증오에 가까운 라이벌 관계였다.

“별건 아니고. 잠깐 축제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이런 일엔 자신들처럼 마음이 너그러운 꽃들이 빠질 수 없다며 흔쾌히 달려가더라고.”

“말도 안 돼! 그런 추악한 꽃들이 마음이 너그럽다고요?”

“남을 돕는 일엔 자신들이 앞장서야겠다던데? 아, 그러고 보니 그 꽃들이 너희 이야기도 했어. 복수초는 당연히 도와주지 않을 테니 자신들이 더 열심히 해 줘야겠다고 하더라고.”

내 발언은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커다란 복수초를 쿠션 삼아 앉아 있기만 하던 드라이어드들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서는 비장한 병사의 얼굴을 하고 옆구리에 무기처럼 커다란 복수초 꽃을 끼웠다.

“불쾌하군요. 그런 덜 떨어지는 꽃에게 뒤처질 수야 없죠.”

“진정 대단한 꽃이 누군지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요.”

“마음이 너그럽다고요? 우리야말로 너그럽게 당신의 헛된 계획에 동참해 주죠.”

“그럼, 그럼. 나도 너희가 내 생각보다 마음이 아주 너그럽다고 생각해!”

“인간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했나요? 가자, 애들아.”

복수초 드라이어드들은 분노를 가득 담아 쿵쿵거리며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아마 얼추 두 꽃이 비슷하게 도착할 듯한데.

두 꽃이 마주치더라도 다짜고짜 사실 확인부터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저 정도 사이라면 말도 섞기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난 복수초 드라이어드들이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다음 타깃을 정하기 위해 공략법을 꺼냈다.

“이 드라이어드는 좀 높은 곳에서 사네…. 황새풀?”

황새풀 -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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