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5화 (385/604)

연꽃을 닮은 노란 꽃 모자를 쓴 복수초 드라이어드들은 포인세티아와는 다른 느낌으로 동화 속 요정 같았다.

요정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 것처럼, 포인세티아가 집안일을 돕는 선한 요정이라면 복수초는 장난이란 명목으로 온갖 악행을 벌이는 장난꾸러기 요정이었다.

샛노랗고 작은 꽃이기에 문득 민들레가 떠올랐다.

초록의 풀밭에 무리를 지어 노랗게 피어난 작은 민들레들은 지상에 별들이 모여 만든 노란 은하수 같았다.

반면에 비슷한 모양새이면서도, 새하얀 눈밭에 듬성듬성 노랗게 얼굴을 내민 작은 복수초들은 하얀 바다를 유영하는 떠돌이 별자리 같았다.

“난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를 데리러 온 드루이드야.”

도통 내 말을 들을 생각 없는 세 송이의 복수초에게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꺼냈다.

“포인세티아가 꼭꼭 숨어 버려서 그녀를 불러내기 위해 며칠 뒤 아랫마을에서 축제를 열려고 해. 그래서 말인데, 혹시 도와줄 수 있을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죠?”

“…….”

차라리 매몰차더라도 답을 해 주는 게 나았다. 아예 말없이 내 말을 무시해 버리는 꽃도 있었다.

“음….”

상관이라… 따지고 보면 그들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었다. 단순히 내가 포인세티아를 꾀어내기 위한 축제였으니까.

앉은부채와 이끼들이 선뜻 돕겠다는 의사를 표해 주길래 그 이상의 이유를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범용적으로 보자면 이 일은 스노우 필드의 모든 드라이어드들과 관련이 있기도 했다.

오랜 시간 가디언의 책무를 내던져 둔 포인세티아를 일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친절한 드라이어드도 좋지만, 그것보다 필드의 규율을, 규율의 협약자인 드라이어드들을 더 보살펴야 했다.

“난 세계수의 대리자로 세상에 흩어진 10그루의 가디언을 모두 모으는 일을 하고 있어. 알고 있겠지만 포인세티아도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니 그녀를 데려가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런 게 우리 필드의 가디언이었다고요?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마침내 세 송이 중 한 송이의 복수초 드라이어드가 등을 돌려 나와 마주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디언인 포인세티아의 위엄은 이곳에서 너무나 하찮은 수준이었다.

다른 필드 출신이라 배척하거나 아니면 가디언이란 지위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포인세티아가 여기 꽃들에게 큰 실수를 했거나?

“내가 도움을 구하는 입장이니까 너희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나도 도울게.”

“우리에게 인간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나요?”

“잠깐.”

등을 보이고 있던 또 다른 꽃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맨 왼쪽의 한 송이를 제외한 두 송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발전이라 생각했다.

“뭐든지 도와줄 건가요?”

그 말에 미약한 한기와 스멀스멀 고개를 들이미는 장난기를 느꼈다.

축제에 합류해 준다면 뭐든지 해 줄 수 있을 것 같던 마음도 그 탓에 조금 주춤했다.

“음… 일단 먼저 들어 봐도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라면 도와줄 수 있지만….”

“흥, 도와주겠다는 말은 거짓이었군요.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해 보기 위해서 한 말이었나요?”

“으으음… 그래도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라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약속할게.”

“흐음… 우리를 도와주겠다고요?”

비로소 마지막까지 등을 보이고 있던 꽃도 몸을 돌리며 셋 모두 날 바라보게 되었다.

처음에 날 무시하던 꽃들은 입가에 미약한 웃음을 단 채 흥미롭단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요. 우릴 도와준다면 우리도 당신을 도와줄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죠.”

그 말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이 아니었기에 언제든지 말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게 달리 선택권은 없었다. 아쉬운 쪽은 내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뭘 도와주면 될까?”

대체 이 쌀쌀맞은 꽃들이 내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까?

넓은 찻잔을 닮은 커다란 꽃 위에 우아하게 앉아 있던 복수초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난 뭐가 됐든 만만치 않은 과제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이곳은 너무 황량해서 추운 바람이 잘 들어요. 그러니 당신이 우릴 대신해 바람을 막을 담을 쌓아 주겠어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난 복수초의 부탁에 주위를 둘러봤다.

확실히 이끼들의 군락지에 비하면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매서운 바람이 여과 없이 꽃들을 향해 들이닥치고 있었다.

“돌로 담을 쌓으면 되려나….”

계란 껍질처럼 둥글게 벽으로 감싸여 있던 이끼들의 군락지 모습을 떠올려 봤다.

산이라 주변에 넘치는 것이 돌과 바위니 비슷하게 흉내 내면 될 듯했다.

“제가 돕겠습니다.”

앉은부채가 자신도 거들겠다며 나설 때였다.

힘이 센 드라이어드들이 돕는다면 금방 끝낼 수 있겠다고 마음을 놓으려는데.

“잠깐만요. 도와주겠다고 한 건 당신이 아니었나요?”

“드라이어드가 나선다면 그건 드라이어드가 한 일이지, 당신이 한 일이 아니지 않나요?”

나 혼자 돌을 쌓아 담을 만들라고?

이런 조건은 전혀 예상도 못 했기에 당황스러웠다.

“영혼을 연결한 드라이어드는 드루이드와 한 몸이나 다름없지요.”

뒤에서 가만히 이 사태를 관망하던 메스키트가 마침내 못마땅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복수초가 날 냉대하는 태도에 어지간히 기분이 상한 것이 그녀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잘 나타나 있었다.

“흥! 먼저 돕겠다고 나선 건 그쪽이에요. 하기 싫으면 관둬요. 우린 당신의 우스운 계획에 동참해 줄 생각이 없으니 다른 드라이어드나 찾아보든가요.”

“뭐 다른 꽃들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겠지만.”

“어떤 꽃들은 얼굴도 내보이지 않겠지요.”

그 말 때문에 그냥 포기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 시간을 할애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스노우 필드에 오랜만에 찾아온 귀한 손님이 아니십니까? 더구나 세계수의 이름으로 위업을 행하시는 작은 세계수님을 이대로 모른 척하실 셈입니까?”

보다 못한 앉은부채가 점잖게 복수초들을 다독였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런 건 우리가 알 바 아니에요.”

“애초에 우리가 스노우 필드로 와 달라고 간청이라도 했나요?”

“이 추운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인간이에요. 하물며 진짜 세계수도 아닌 고작 작은 세계수죠.”

“됐어요. 우린 인간의 도움 따위 필요 없어요. 우린 언제나처럼 우리끼리 잘 지낼 수 있으니 다른 꽃이나 알아보도록 해요.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에요.”

그러곤 다시 셋 모두 등을 돌려 버렸다.

영혼까지 파고드는 멸시와 박대에 가슴이 시렸다.

이런 태도라면 기나긴 세월 동안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도 이해가 갔다.

“고작이라니….”

“뭐… 결국은 내가 저 드라이어드들의 주인은 아니니 지나가는 드루이드 따위가 맞지.”

메스키트의 눈이 워낙 흉흉해서 결국 내가 막아섰다.

작은 세계수라며 어화둥둥 해 주는 드라이어드가 있는 반면 그저 그렇게 여기는 드라이어드들도 만나 봤으니 생소하진 않았다.

“바람 때문에 많이 추웠구나. 많이 느릴 테지만 혼자 담을 쌓아 볼게. 다들 도와줄 필요 없어.”

호기롭게 나섰지만 막막한 건 그대로였다.

대충 주변을 둘러보며 견적을 잡고 내 수준에서 들 수 있는 돌을 골랐다.

큼직한 바위로 쌓아 올리면 삽시간에 담이 완성되겠지만, 작은 묘목 드라이어들조차 한 손으로 휙휙 들어 올리는 바위도 내가 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추위에 꽁꽁 언 바위는 무겁기도 하고 표면이 거칠어 들기 힘들었다.

그동안 체력을 꽤 쌓았다고 자부해도 근력은 저렙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혹시 이리스 파티나 시들링이라면 이런 바위를 무리 없이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인간인데….

무거운 검을 손쉽게 휘두르거나 전투에서 보여 줬던 압도적인 파워들을 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게 서글펐다.

그래도 마냥 슬퍼할 틈이 어딨나?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봐야지.

마음을 비우고 가장 먼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돌을 모으고 있으니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를 무시하던 복수초들이 어느새 힐끔힐끔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그날 하루 내내 돌을 옮기다 골병이 들 것 같아 메스키트에게 업혀 마을로 돌아왔다.

전날 밤 신세를 졌던 클로에와 버드는 다시 돌아온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반겨 주었다.

내게 집을 떠난 딸의 방과 침대를 쓰도록 해 주었는데, 온몸이 뻐근해 제대로 씻지 못하고 침대에 드러눕는 게 죄송할 따름이었다.

“어쩌다 그런 꼴이 되어서….”

“혹시 산비탈이라도 구른 겐가? 꼴이 말이 아니군.”

차마 복수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노동을 뛰다 왔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드루이드라는 따님 말인데요. 혹시 드라이어드들과 어떻게 영혼의 연결을 맺었는지 알 수 없을까요?”

눈수저를 물고 태어나 모험의 시작을 희귀한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떠났다는 그녀.

오늘 일을 겪고 나니 새삼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 싹수 없는… 아니 쌀쌀맞은 꽃들을 어떻게 꼬셔 낸 거지?

드라이어드와의 영혼의 연결은 한쪽이 원한다고 바로 맺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건데… 혹시 나처럼 돌담이라도 쌓은 거 아냐?

하루 내내 고생했지만 복수초들이 만족할 만큼 결과를 내기까지는 한참 남았다.

축제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허구한 날 돌담만 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다른 파훼법이 필요했다.

호언장담하며 돕겠다고 말해 놓고 하루아침에 다른 꽃을 찾아 꽁무니를 빼 버린다면 복수초는 절대로 날 돕지 않겠지.

“글쎄요… 우리 딸은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눈산을 뛰어놀며 지낸 데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기 일수였으니….”

그 말에 매일같이 산과 들을 쏘다녔다는 필라의 여동생이 떠올랐다. 드루이드들의 특징인가?

어쨌든 부모 자식 간에 대화가 활발히 일어나는 타입은 아니었나 보다.

“아, 딸이 집을 나갈 때 짐을 다 챙기진 않았어서 그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누워 있는 날 지나쳐 책상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을 기워 커버를 꾸민 노트 한 권을 찾아 내게 가져다주었다.

사용된 천 역시 이 집에 가득 널린 태피스트리와 같은 것이었다.

“딸이 항상 끼고 살던 노트에요.”

“어… 일기장이라면 제가 남의 일기를 읽는 취미는 없어서….”

“밥 먹을 때도 항상 펼쳐 두고 뭔가를 끄적거렸어요. 우리가 한 번씩 들여다봐도 성을 낸 적도 없고요. 일기라기보단 좀 더 다른 느낌에 가까웠답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이기고 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하여튼 막돼먹은 녀석들. 난 왜 하필 스노우 필드에서 태어나서. 따뜻한 곳에 사는 드라이어드들은 훨씬 상냥하겠지?

오늘은 노랑만병초와 맞짱을 떴다. 이 자식들은 말로 해선 안 된다.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

하나같이 체구가 작아서 땅에 붙어 있으니 지구전에 강하다. 약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할 테다.

마침내 약점을 찾았다.

노랑만병초 - 복수초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산의 정반대편에서 지냄. 이야기를 하다 도중 끊으면 궁금해서 미쳐 버림.

솔이끼 - 내가 울면 봐줌, 우산이끼도 똑같음. 거짓 울음도 분간하지 못함.

복수초 - 노랑만병초를 칭찬하면 삐짐. 이때 살살 달래면서 노랑만병초와 비교하며 칭찬해 주면 의외로 쉽게 넘어옴. 하지만 사이가 좋지 않으니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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