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그런 걸 왜 해?”
예상했던 대로 이끼 드라이어드들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축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몇 없는 마을의 노인분들을 고생시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참여자 하나 없는 텅 빈 축제는 너무 썰렁하지 않은가?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드라이어드들에게 협조를 요청하러 갔다.
사람 대신 드라이어드들로 가득한 축제, 이것도 꽤 신기하고 재밌을 것 같다.
“포인세티아를 꾀어내기 위한 방법이야. 날 도와주지 않을래?”
“흥, 그렇게 부탁한다고 우리가 도와줄 줄 알아?”
“맞아! 떠나 버리라고 했더니 왜 바로 돌아온 거야?”
정말 싫으면 날 무시하고 가 버리면 되는데, 이끼들을 모두 내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뭘 도와주면 되는데? 물론! 오해는 하지 마. 그냥 어떤 건지 들어나 보려는 거니까.”
“시끄럽고 귀찮은 포인세티아가 여길 떠난다면 환영이지. 그래서 들어 보는 거야!”
이끼들은 온갖 핑계를 대고 있지만 결론은 축제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먼저 숨뭄데이가 어떤 축제인지 이야기해 줄게.”
사실 나도 이 세계의 전통적인 숨뭄데이 축제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기껏해야 세 가지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라는 것 정도?
하지만 낮은 거목이 포인세티아를 위해 꾸며 놓은 방을 떠올려 보면 크리스마스 파티랑 비슷하게 진행해도 될 듯했다. 각색을 조금 곁들여서 크리스마스를 숨뭄데이로 둔갑시켜 놓으니, 이끼들이 안 듣는 척,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귀가 쫑긋거리는 게 보였다.
“이끼는 언제 나와?”
“맞아. 이끼는 어디에 장식하는 건데?”
크리스마스 대표 장식으로 구상나무 트리와 포인세티아 리스, 서양호랑가시나무의 잎과 붉은 열매를 쓴다고 설명하자, 이끼들이 갑자기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음, 그것도 그렇지.
엄연히 겨울의 스노우 필드에서 열릴 축제인데 정작 눈앞의 드라이어드들을 제외하는 건 맞지 않았다.
난 이곳에 카펫처럼 깔려 있는 이끼들을 바라봤다. 이왕 각색하는 거 좀 더 바꿔도 상관없지 않아?
“인간들의 집엔 모직으로 만든 카펫을 깔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을 수 있거든. 하지만 축제가 열리는 넓은 장소를 전부 카펫으로 뒤덮을 순 없잖아? 이때 이끼가 나타나는 거지. 축제만큼은 특별해야 하는 거야. 1년 내내 눈이 쌓인 하얀 땅만 보다가 축제 기간 때만큼은 드넓게 펼쳐진 녹갈빛의 땅 위를 딛는 거지.”
“그럼 그럼. 스노우 필드에 우리만큼 머릿수가 많은 식물이 없지. 그 어떤 애들을 데려다 놔도 우리만큼 땅을 뒤덮을 순 없을걸? 무… 물론 도와준다곤 안 했어!”
“이끼가 잔뜩 깔려 있으니까 신발을 벗고 맨발로 돌아다녀도 되려나….”
“우린 폭신폭신하니까 문제없어! 네 발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걸? 그렇다고 축제에 참가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그래서 어디서 축제를 할 건데? 오해하지 마.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장소는… 마을에 텅 빈 광장이 있는데 거기가 좋겠다. 하는 김에 광장도 좀 치워야겠어.”
사람들이 떠난 집은 오랜 세월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흉가나 다름없었고, 그게 더욱더 마을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음산한 배경 음악과 함께 곳곳에 숨어 있던 좀비가 튀어나올 것 같은 비주얼의 마을이었다.
축제 때 힘이 센 드라이어드들의 도움을 받아 광장 부근을 정리해 두는 것도 좋을 듯했다.
“축제는 언제 하는 거야?”
끈질기게 자신들은 축제에 관심 없다 주장하고 있지만 이끼 드라이어드들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질문했다.
“축제는 일주일 뒤야. 앞으로 해가 여섯 번 더 뜨면 시작이지.”
그러자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군거리며 의논하기 시작했다.
“혹시 앉은부채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수 있어? 많이 참가하면 할수록 좋은데.”
“앉은부채는 축제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데?”
“음….”
앉은부채는 어떻게 생겼지? 드라이어드는 봤지만 정작 모체가 되는 식물을 보진 못해서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는다.
“뭐… 스스로 열을 낼 줄 아는 꽃이니까….”
“따뜻하게 해 주는 역할이구나. 그럴 줄 알았지.”
“좀 애매하긴 한데. 직접 만나서 의논해 보고 싶어.”
앉은부채가 서식하는 곳까지 찾아가려 하니 이끼들이 또다시 성화였다.
이 추운 날에 어딜 겁도 없이 돌아다니냐며.
그러더니 자신들이 데려오겠다며 몇몇이 재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도와준다면 나야 고마웠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식물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재미도 있겠지만, 일단 산을 올라야 하는 건 확실하니까.
“저는 멀리서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이미 이끼 드라이어드들 중 하나가 널 찾으러 뛰어갔는데….”
이끼들의 군락지 한편에 세워진 평평한 돌 위, 앉은부채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신경 써서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곳에 마침 높이 쌓은 돌기둥으로 그늘까지 져서 앉은부채가 가려져 있었다.
앉은부채를 둥글게 감싸는 망토 때문에 꼭 조개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드라이어드의 무릎 안과 주위엔 하얀 동물들이 몸을 둥글게 말아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동물들이 화들짝 놀라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래서 손짓으로 차라리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의사 표현을 했다. 잘 자고 있던 동물들을 깨운 게 미안해서 어쩔 수 없었다.
“축제를 여신다고요? 다시 한번 인간들의 군락지에 활기가 가득 차겠군요.”
자기들끼리 계획을 짜느라 바쁜 이끼들을 내버려 두고 앉은부채에게 다가가니 인자하게 웃으며 날 반겨 줬다.
“제가 갓 태어난 묘목일 적, 축제가 열리는 걸 멀리서나마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따뜻함과 행복, 기쁨이 가득한 축제였죠. 그땐 인간 묘목들도 꽤 많이 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의 아름다운 광경은 오래도록 계속될 줄 알았는데, 시간은 참 덧없군요.”
못해도 10년 전은 더 됐을 거란 이야기네.
“혹시 이 산에 앉은부채 드라이어드는 너 하나야?”
“몇 그루 더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끼들과 다르게 굳이 뭉쳐 지낼 필요가 없으니 산의 곳곳에 떨어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편이 도움이 필요한 생명들을 구조하기도 더욱 좋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숨뭄데이 축제를 여는 걸 도와줄 수 있어?”
“도움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도와드려야겠지요.”
과거의 축제를 봤다면 내가 이끼들에게 설명했던 축제의 모습과 다르다는 걸 알 텐데도 앉은부채는 아무런 반문을 하지 않았다.
“스노우 필드의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만나 볼 수 있을까?”
“어떤 드라이어드를 만나고 싶으십니까?”
“만날 수 있다면 누구든….”
정작 이 추운 곳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하니 선뜻 지명하기도 힘들었다.
“이곳에 사는 모든 이들이 작은 세계수님께 협조적이진 않을 겁니다.”
솔직히 스노우 필드의 꽃들이 이기적이란 말을 미리 듣고 왔기에 오히려 이끼와 앉은부채의 태도가 낯설었다.
“그래도 만나 보고 싶어.”
“그렇다면 일단 이끼들의 눈을 피해 이동해야겠군요.”
“응, 내가 간다고 하면 또 이끼들이 난리를 피울 것 같아.”
앉은부채는 앉아 있던 곳 바로 뒤편에 마련된 길로 날 안내했다. 통로는 앉은부채의 작은 키엔 적당했지만 내겐 낮아서 한참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자주 이곳을 통해 드나들었는지 행동이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문득 어쩌면 이끼들은 이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로를 다 빠져나올 때까지 내 부재를 알아차린 이끼는 아직 없는 듯했다. 말하지 않고 갔다고 서운해하면 어떡하지?
“어떤 드라이어드를 만나러 갈 거야?”
“근방에 복수초라 불리는 귀한 꽃이 계십니다. 성미가 까다로우시니 모질게 굴더라도 크게 상처받지 마십시오.”
“복수초?”
어디선가 들어 본 꽃 이름이었다.
메모리 스톤을 꺼내 검색해 보았다.
복수초 (Pheasant's-eye)
칭호: 눈을 녹이는 황금
꽃말: 영원한 행복
자생지: 스노우 필드 (★★★★★)
필드 발생 확률: middle-high (★☆☆☆☆)
가치: 약재, 관상 (★★★☆☆)
특성: 회복형
최종 확정 등급: 레어(Rare)
스스로 뜨거운 열을 발산할 수 있기에 넓은 지역의 눈을 녹이며 꽃을 피워 낸다.
눈을 녹이며 봄을 맞이하는 꽃이나 여름이 되면 고사한다.
4월에 전투 보너스를 받는다.
꽃잎이 둥글게 위로 아담히 피어오르는 모습은 술잔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