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2화 (382/604)

“스노우 필드는 너무 추워서 드라이어드가 지키는 식물만 겨우 살고 있는 줄 알았어. 생각보다 동물이 많이 살고 있나 보네.”

“이곳만큼은 불이 쉽사리 침범하기 어려운 데다 포식자들도 개체 수가 적으니, 이리 힘없는 짐승들에겐 추위만 버텨 낼 수 있다면 최적의 서식지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앉은부채의 망토 속에 올망졸망 붙어 머리를 파묻고 있던 동물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찡긋거리는 분홍빛 코, 맑고 작은 눈망울, 이 모든 걸 폭삭 파묻고 있는 솜털같이 하얗고 북실북실한 털.

“너무 귀엽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혹독한 추위가 내려앉은 스노우 필드를 선택해야만 했던 필사적인 생존법은 안타까웠지만… 그래서인지 이 작은 생명체가 더욱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불의 침입이 없었다면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풀과 나무가 가득 피어난 들판을 맘껏 뛰어놀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귀여워 보여도 야생 동물이니까 만져 보는 건 안 되겠지?

작은 솜뭉치들에게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는 날 보며 앉은부채가 물었다.

“이 시기의 스노우 필드는 유독 추위가 강한데, 온지에 계셔야 할 작은 세계수께선 이 동토에 어인 일이십니까?”

음… 말투가 꼭… 나도 두 손을 모아야만 할 것 같다.

인자하고 온화한 말투는 추위를 몰아내는 봄바람처럼 퍼져 나갔다.

톡톡 쏘는 산만한 이끼 드라이어드들의 말투 때문일까. 그와 비교되니 앉은부채 드라이어드의 말투가 더욱 인상 깊은 느낌이었다.

“포인세티아를 데리러 왔어. 직무 유기하고 놀고 있단 제보를 받아서 말이야. 이제 그만 놀고 가서 일해야지.”

그때였다.

“도망간다.”

“저기 뛰어간다.”

“아주 잽싸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거 봐.”

“쯧쯧. 귀찮게 구는 건 여기서나 저기서나 똑같네.”

좀 전까지 드라이어드들과 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포인세티아가 도주를 택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끼들이 아쉬움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목소리로 저마다 한마디씩 얹었다.

“아씨… 쫓아가서 잡아야 하나? 그렇지 않아도 이 넓은 곳에서 포인세티아 본체를 찾을 일도 막막한데.”

살살 어르고 달래는 방법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옆에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유일하게 단서가 되어 줄 수 있는 분신마저 도망가 버리면 이 산속에서 본체를 찾는 일은 정말로 답도 없었다.

“본체라…. 이곳저곳 신출귀몰한 드라이어드지만 여태껏 그녀의 본체를 본 자는 흔치 않을 겁니다.”

“이 중에서도 포인세티아의 본체 위치를 아는 드라이어드는 없다는 거지?”

“흥! 그런 건 관심도 없어.”

“물론 네가 사정사정한다면 조금은 관심을 가져 줄 마음도 있지만. 그래야 네가 빨리 떠날 거 아냐!”

“말만 해! 다음에 나타나면 팔다리를 꽉 붙잡아서 못 도망가게 만들 테니까.”

앉은부채는 고개를 저었고 이끼들은 과하리만큼 포인세티아에 대해 무관심했다.

“나무를 찾기 위해 숲을 뒤지는 건 현명한 일이긴 하나….”

앉은부채가 느릿한 목소리로 내게 조언했다.

“애초에 포인세티아는 이 숲 태생의 나무가 아니니 방향을 잘못 찾은 듯합니다. 어떤 나무에게 향방을 묻든 정확히 답을 해 줄 나무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산 아래 인간들의 군락지에서 도움을 구해 보시지요.”

“맞아. 애초에 걔는 인간들을 너무 좋아해. 특이한 녀석이야.”

이곳 드라이어드들의 태도를 보고 대충 눈치챘지만, 그들은 포인세티아를 썩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포인세티아가 아무리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녀의 태생을 근거로 선을 긋고 있었다.

“마을? 민가 몇 채가 있다는 정보는 알고 있는데. 그게 정말 도움이 될까?”

열심히 산을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라는 소리 아냐?

“혹시 따뜻한 곳에서 살아야 할 포인세티아가 스노우 필드에 오게 된 연유에 대해선 알고 계십니까?”

“응,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된 과정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

“우리 필드에도 가디언이 있었어?”

“몰라. 누구래?”

“가디언이 왜 필요한 거야?”

이끼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메스키트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확실히 드라이어드들에게 물어보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네….”

문득 메스키트를 보자마자 신처럼 모셨던 카돈 드라이어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필드의 가디언이라 해도 모두에게 추앙 받는 대상은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인간들의 군락지로 가 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지만 이곳은 포인세티아가 마음을 빼앗겼던 축제의 시초가 되는 지역. 포인세티아의 본체에 대한 이야기가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체가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곳이 시초일 줄은 몰랐어.”

현재의 포인세티아는 실새삼이 전 주인과 활동하던 때 가디언의 후대라는 점은 알고 있었고, 먼 옛날 뒤 번대의 넓은 지역이 죄다 스노우 필드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축제는 뒤 번대 어딘가에서 처음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언 고마워. 일단 곧 날이 어두워질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마을로 내려가 보는 게 좋겠네.”

“드디어 떠나는 거야?”

돌아가겠다는 말에 이끼들이 다시금 우르르 몰려들었다.

“응, 일단은 산을 내려가 보려고 해.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헤어지게 되어서 아쉽네.”

“우… 우리도 아쉬워할 것 같아? 추운 곳을 떠난다고 하니까 얼마나 속 시원한데!”

“맞아, 빨리 가 버려! 우리가 붙잡기라도 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달랐다.

그렇게 떠나라고 난리를 치기에 반색할 줄 알았더니, 역시 말과 마음이 딴판인 드라이어드들이었다.

“이거 들고 가! 물론 오해는 하지 마. 우리에겐 필요 없어서 버리는 거니까!”

“이… 이건 오다 주운 거야. 그냥 둘 데가 없으니까 네가 들고 가도록 해.”

어차피 포인세티아를 찾으러 다시 산을 올라야 하는데도, 이끼들은 내가 영영 떠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선물을 한 보따리 안기기 시작했다.

이끼를 엮어 만든 담요나 당장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물들을 잔뜩 전해 주니 어안이 벙벙했다.

이 모습을 앉은부채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 혹여라도 길을 잃어버린다면 소리를 크게 질러. 우린 단지 더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방지하려는 거야.”

“맞아. 우린 청각이 좋아서 멀리서 열매 떨어지는 소리도 잘 들어.”

금방 다시 돌아오면 싫어하려나? 저렇게까지 친절하게 구니 괜스레 떠나기 싫은 마음도 들고….

“눈치가 있다면 알겠지? 저쪽만 길이 닦여 있다는 걸! 누구라도 지름길이라는 걸 눈치채겠지?”

그러네. 이끼 드라이어드가 가리킨 곳을 보니 비록 왔던 길과 다르지만 돌을 쌓아 만든 석상이 양옆에 드문드문 세워져 통행로를 표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잘 쉬다 가. 또 들를게.”

“다신 오지 마!”

이끼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꽤 오랫동안 날 따라와 배웅해 줬다.

갑자기 내가 마음이 바뀌어서 되돌아올까 봐 경계한다면서…. 경계를 지나치게 오래 하는 타입인 거지.

석상을 따라 내려가자 주변이 더욱 어둑해질 때쯤, 민가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멀리서부터 굴뚝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이 보였으나, 막상 도착한 마을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가득했다. 연기만 아니었다면 진작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린 폐촌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막한 곳에 인기척이라곤 오직 내가 내는 것이 전부였다.

흰 눈이 지붕이나 울타리에 가득 내려앉고 표면이 물먹은 벽돌과 세월감이 물씬 느껴지는 목재들로 인해 마을의 풍경은 무채색이 짙게 내리깔려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

고민이 되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창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을 찾아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안에서 아직 활동 중인지 인기척이 들렸다.

끼긱, 끼끽.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띄엄띄엄 들리더니 노크를 한 지 한참 뒤에야 반응이 돌아왔다.

“누구십니까?”

“안녕하세요? 전 제이라고 해요. 볼일이 있어서 이 산에 방문하게 됐는데 잠시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이 앞 검문소에서 정식으로 확인받고 왔어요.”

내 말에 잠시 정적이 흐르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살짝 열린 틈새로 경계가 가득한 눈빛이 날 마주했다.

“호오….”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산타클로스처럼 덥수룩한 수염에 투명한 액체가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는데, 옅게 풍기는 술 냄새로 그 정체를 짐작 가능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날 한참을 살피던 노인은 뒤에 선 메스키트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더니 경계가 가득했던 눈이 삽시간에 너그럽게 풀렸다.

“여보, 간만에 손님이 찾아왔구려! 따뜻한 걸 준비해 주오.”

“어…. 시간을 많이 뺏진 않을 거예요.”

“이 추운 날 곧바로 내보낼 만큼 매몰차진 않소.”

마침내 활짝 문이 열렸고, 노인의 마음을 대변하듯 장작불의 따뜻한 훈기가 버선발로 튀어나와 날 맞이했다.

불빛이라곤 벽난로에 의지하는 것이 전부인지 집 안이 어두웠다.

바닥엔 먼지가 가득한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창문이나 벽엔 색색의 두꺼운 태피스트리가 잔뜩 걸려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머, 젊은 아가씨가 이 산속엔 어인 일로?”

2층 계단에서 호리호리한 노인이 천천히 내려오며 날 반겼다.

둘 다 태피스트리에 쓰인 천과 같은 색의 천으로 여기저기를 짜 맞춰 기워 낸 옷을 잔뜩 껴입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제이라고 합니다. 드루이드예요. 이곳엔 어떤 드라이어드를 찾으러 왔어요.”

“난 클로에, 내 남편은 버드라고 불러요. 추위에 고생이 많았겠네요. 이리로 와요. 이 자리가 가장 따뜻해요.”

그녀는 벽난로 앞의 소파로 날 이끌었다.

“이미 식사를 끝낸 후라 준비가 좀 늦어질 것 같네요. 버드, 허니, 좀 거들어 줄래요?”

“아, 전 괜찮아요!”

내 만류에도 둘은 휙 주방으로 들어가 등불을 밝혔다.

낯선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날 반갑게 맞아 주는 데다 친절한 태도에 부담스러웠지만, 마음은 난롯불을 쬐는 마음처럼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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