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0화 (380/604)

스노우 필드를 단순히 새하얀 눈이 깔린 들판이라고 생각했던 건 큰 오산이었다.

떠나기 전, 보좌관들의 염려에 따라 방한 의복을 구매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포르타가 만들어 준 장비도 추위에 잘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줬지만, 단순히 싸늘한 밤공기를 이겨 낼 수 있는 수준에 그쳤다.

양털로 만들어진 두툼한 코트를 살 당시만 해도, 정말 이런 게 필요한가 의문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내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코트를 부여잡은 채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나는 지금 테라리움 어드벤처 속으로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살갗이 엘 듯한 추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글을 썼는데도 여전히 눈알이 시린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엘더가 화들짝 놀라 아티팩트로 피신할 수준이었는데, 아무리 강인한 메스키트일지라도 결이 다른 추위만큼은 견디기 힘든지 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사막의 무더운 열기엔 강할지언정 정반대되는 냉기엔 저항력이 약했던 것이다.

새삼 메스키트의 약점을 알게 된 게 놀라웠지만, 따지고 보면 자생 필드가 스노우 필드인 드라이어드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드라이어드들에게는 추위가 약점이나 다를 바 없을 테니 그녀만의 약점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이 추위 속에서 팔팔한 것은 오직 날 따라온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의 분신뿐이었다.

포인세티아는 컨디션 최저인 메스키트의 주위를 약 올리듯 뛰어다녔다.

“생각 외로 스노우 필드가 상당한 복병이 될 수도….”

내뱉는 혼잣말에 뿌연 입김이 섞여 퍼져 나갔다.

세계는 불의 침입 여파로 항상 더운 편에 가까웠다.

심지어 불에 의해 망하다시피 한 뒤 번대로 갈수록 숨 막히는 열기가 초여름 날씨와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1번째 테라리움은 적당히 폭이 큰 일교차가 존재하며 좀 더 서늘한 날씨에 속한 편이었는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확연히 달라지는 온도에 기함을 토했다.

스노우 필드는 놀랍게도 마치 그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친 것처럼 응축된 추위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역에 입장했을 때는 손수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난 하얗게 옷을 입은 설산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눈이 녹은 적이 없는 듯한 툰드라, 더욱이 지표면과 멀리 떨어져 하늘에 가까운 고산.

초록을 찾기 힘든 가파른 산을 올려다보는 내 심정은 신께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언제 올라가나…. 여기에도 정말 생명들이 존재한다고?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산의 초입,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별장을 낀 작은 검문소에서 입장 허가를 받았다.

추위와 권태에 찌든 검문인은 날 향해 의심과 경계가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지만, 낮은 거목이 친히 내게 준 통행증을 보더니 안색이 달라졌다.

새빨개진 코와 미약하게 풍기는 술 냄새가 인상적이었다.

“여긴 1번째 테라리움에서 보호 관리 중인 스노우 필드 지역입니다. 방문 후 필드에서 자생하는 그 어떤 식물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채집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이를 어길 시 1번째 테라리움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만들 겁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엄중하게 책임을 말했다.

“네.”

추위 때문에 이가 딱딱 부딪혀 길게 말하긴 힘들었다.

“방한 의복과 발열 제품 그리고 조난 시 구조를 기다릴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충분한 물과 비상식량, 구급약은 소지하고 계십니까? 혹은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나 추위에 내성이 강한 드라이어드와 함께하고 계십니까?”

난 그의 물음에 일부러 주머니를 뒤지며 잘 있는 물건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슬쩍 양털 코트 안을 열어 장비에 덕지덕지 붙은 소형 핫팩을 보여 주었다.

방한 의복을 구매하며 잔뜩 구매한, 연금술로 만든 핫팩이었다.

스노우 필드를 방문한다거나 테라리움에 혹한이 내리는 경우는 드무니 재고가 쌓여 있던 모양인데, 내가 쓸어가자 상점 주인의 표정이 더없이 환하게 밝아졌던 것이 떠올랐다.

“드라이어드는 없지만 준비는 철저하게 하고 왔어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지금 시기는 마지막 태양의 시기로 스노우 필드의 추위가 더욱 강해지는 때입니다. 이 경우 조난을 당한다면 구조대도 난항을 겪기 때문에 구조까지 시일이 상당히 걸릴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구조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어 가족이나 친지분들의 품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가까스로 구조된다 하더라도 동상으로 인해 큰 장애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시기에 스노우 필드로 들어가신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지만….”

검문인은 내 허가증을 수시로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도 지역에 입장하시는 게 맞습니까?”

살벌한 경고에 불쑥 겁이 났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스노우 필드도 항시 살벌하게 추운 게 아니라 날이 풀리는 때도 존재하나 본데, 그때까지 기다렸다 오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각오하고 있어요. 입장할게요.”

나의 마지막 말에 비로소 검문인은 쇠창살로 된 문을 열어 주며 지도를 건네주었다.

“이 지역은 길잡이도 완전 정복이 불가하여 상세 지도가 없습니다. 다만 길이 표시된 구역은 그나마 통행이 가능한 지역이므로 필히 지도상의 경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의 초입에는 스노우 필드의 생태 파악 및 관리를 위하여 소규모지만 민가로 이루어진 마을이 존재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곳을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검문인의 말에 재빨리 마을의 위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지도에 표시된 민가는 겨우 단 여섯 채만 존재할 뿐이었다.

“부디 안전하게 돌아오시길 기원합니다.”

검문인의 진심 어린 인사가 가득 담긴 배웅을 받으며 드디어 스노우 필드에 입장했다.

이 높고 험준한 산속에서 과연 꼭꼭 숨어 있는 포인세티아를 찾을 수 있을까?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메스키트가 거의 지지대 역할을 해 주다시피 하며 날 도왔다.

이 추위를 피해 그녀도 아티팩트로 피신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메스키트마저 없었다면 산행 난이도가 훌쩍 뛰었을 것이다.

포인세티아는 무릎까지 눈이 쌓이고 미끄러운 길을 요정처럼 잘도 뛰어다녔지만, 딱히 날 도와주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다.

“너무 힘들면 포기하는 게 어때?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어. 아니면 잠깐이라도 들렀다 갈래?”

오히려 포기를 종용하며 응원하는 축에 속했다.

인간을 무척 사랑하는 드라이어드라 해도 꼭꼭 숨어 있는 자신을 데리러 온 나를 은연중에 거부하는 태도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보호 구역이긴 해도 사람이 살고 있고 완전히 방치된 채 자연에 떠맡긴 장소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나마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놓인 돌계단과 정리된 길 덕에 느리긴 해도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찾지?

숨바꼭질을 각오하고 오긴 했으나 막상 따져 보니 단서 하나 없이 이곳에 뛰어든 것이다.

애초에 내가 스노우 필드를 너무 얕봤다.

동화 속 눈이 내리는 산타 마을 따위를 상상하며, 아담한 집에 색색이 달린 전구와 트리 장식 따위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눈송이가 소복이 솜처럼 내려앉은 눈밭을 밟으며 눈사람도 만들고 밤이 되면 캠프파이어가 피어오르는 낭만적인 겨울 동화 말이다.

보통의 캐주얼 판타지 게임 속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해 열리는 이벤트 필드가 대부분 동심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보니… 이건 선입견이 불러온 폐해였다.

그런 곳에서 하하호호 숨바꼭질을 하는 천진난만한 상상을 했으니 얼마나 답이 없는 인간인가? 제희야, 또 속니?

눈보라에 추위 디버프를 겹겹이 쌓아 HP는 수시로 떨어지며, 시도 때도 없이 내 등 뒤를 노리는 굶주린 설산 늑대와 아무리 공격해도 쓰러지지 않는 아이스 골렘 따위가 출몰하는, 유혈이 낭자하는 하드코어 게임을 떠올렸어야만 했다.

부스럭.

갑작스러운 기척에 화들짝 놀라 메스키트에게 바짝 붙었다.

바람 소리라기엔 너무 대놓고 근처에 누가 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설마 늑대 몬스터 같은 걸 상상했다고 정말 그런 게 나오는 건 아니겠지?

눈이 쌓인 바위들이 덤불처럼 우거진 곳에서 작은 인영이 꿈틀댔다.

햇빛이 부족해 적당히 얕은 깔린 어둠 속, 시퍼런 안광이 날 쏘아보고 있었다.

추위 때문인지 평소보다 행동이 상당히 굼뜬 메스키트가 뒤늦게 그곳을 향해 경계 태세를 취했다.

두 개의 안광은 분열하듯 점차 수를 늘리더니 사방에서 속속 나타나, 어느새 우리 주위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었다.

호두까기 인형 동화 속, 쥐 떼에 둘러싸인 클라라가 된 기분이었다.

시작부터 만만찮네. 벌써 전투라니.

그런데 어떡하지? 내 드라이어드들 중 안타깝게도 추위에 내성을 가진 이가 없었다. 그나마 메스키트만이 겨우 버텨 주고 있는 수준이었다. 즉, 전투가 벌어지면 만만찮게 어려운 상황이 될 거란 뜻인데….

“어머,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온 거니? 내가 같이 놀자고 부를 땐 신경도 안 써 주면서.”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포인세티아의 목소리엔 반가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썩 꺼져.”

불친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침내 밝은 곳으로 작은 발이 톡 튀어나왔고 적이라 생각했던 자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드라이어드?”

요정처럼 작은 드라이어드들이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혹시 묘목?”

“그건 실례야. 묘목이라니! 우린 어엿한 성목이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묘목이라고 의심될 만큼 아주 작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어린 느낌보단 그저 난쟁이처럼 체구가 작을 뿐이었다. 드워프?

“쟤들은 이곳의 터줏대감, 이끼들이야.”

포인세티아의 소개에 단번에 그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지면에 바짝 붙어 자라는 작은 이끼들이라면 내가 여태 본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체구가 작을 만했다.

“이런 추위 속에 어떤 식물이 자랄 수 있나 했더니… 이끼가 있었구나.”

“저 무리는 솔이끼고, 저 무리는 우산이끼야. 그리고 쟤는….”

“썩 꺼져. 어딜 겁도 없이 이런 곳에 드루이드가 돌아다니는 거야?”

“맞아. 얼어 죽고 싶어? 눈 속에서 덜덜 떨다 죽고 싶냐고!”

“얼른 따뜻한 곳으로 사라져 버려!”

“그래!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곁으로 얼른 가 버려!”

덜 자란 묘목 드라이어드들을 제외하고, 다 자랐음에도 나보다 훨씬 작은 드라이어드는 처음 봐서 신기했다.

드라이어드들은 겨우 내 허리 높이에 올락 말락 할 정도의 키였다.

“그렇게 사랑스럽게 바라본다고 봐줄 것 같아? 혼쭐나고 싶어?”

“당장 아래로 내려가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지 못할까!”

“어….”

분명 나를 향해 험악한 얼굴로 모진 말을 내뱉는 것 같은데… 그 내용이 묘했다.

“그래! 혼쭐을 내 주자!”

“이런 겁도 없는 드루이드, 당장 혼을 내 줘야 해!”

그러더니 작은 드라이어드들이 우르르 날 향해 달려들었다.

자석에 엉겨 붙는 쇳조각처럼 삽시간에 내 허리와 다리에 드라이어드들이 몰려들었다.

“흥, 우리처럼 빈약한 체온으로 껴안는다고 바로 따뜻해질 것 같아? 턱도 없는 소리!”

“이제 깨달았겠지? 우리가 이렇게 경고하는 건 마지막이야! 어서 얼어 죽기 전에 꺼져!”

“이것 봐!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잖아!”

난 드라이어드들이 달라붙은 다리와 허리에 느껴지는 몽글한 온기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드라이어들이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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