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9화 (379/604)

내가 방문했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규모를 생각해 보자면, 그들이 그 프로젝트를 쉽사리 포기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이목이 집중됐으니 당분간은 몸을 사릴 수도 있겠지만 그 프로젝트에 투자된 시간과 자본을 따져 보면 백지장으로 만들기엔 아깝다고 판단할 법했다.

그렇다면 언젠간 또다시 제2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나타날 테고 재앙은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허수아비들과 그들의 테라리움이 노려지겠지.

어쩌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너무 버겁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말인데요….”

보좌관들에게 내가 깨달은 내막을 설명해 주는데 말이 횡설수설해지는 걸 좀처럼 고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알게 된 진실이 내게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와서 말을 하면서도 수시로 진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에이레네가 진정하라며 다독였고, 디케가 한 템포 늦게 내 말을 따라오며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사실… 청문회에서 인페르노에 대한 존재를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믿기 힘들었어요. 불을 숭배하는 집단이라니. 하지만 제가 믿는 것과 별개로 세상 곳곳에선 그들이 악행을 벌이고 있었어요. 더구나 28번째 테라리움이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을 줄은….”

“세계수의 축복이 지켜 주는 테라리움마저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섬뜩해요.”

“테라리움도 마냥 안전한 곳은 아니었군요.”

“그 축복의 힘은 어떤 불에는 절대적이지만 어떤 불에는 무의미한 거니까.”

파필리온의 말처럼 몬스터에 대해선 세이프 존이 될 수 있으나 사람에 대해선 그러지 못했다.

마치 난이도를 변경한 게임처럼,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을 경계해야 한다.

“새삼… 그들의 정보력에 두려움이 일어요.”

디케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행정 관리원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가드닝 스킬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대외비가 아닌가요?”

“음… 하긴 행정 관리원의 정체도 작정하고 숨긴다면 알기 힘든 마당에 그가 사용하는 가드닝 스킬이야말로 알기 힘든 정보긴 해요.”

나처럼 눈에 띄게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스킬이라면 모를까.

세계수 가지를 조종할 수 있는 스킬은 사용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들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페르노는 관련된 가드닝 스킬을 쓰는 행정 관리원들만 골라냈어요.”

테라리움이라는 견고한 성벽에 숨어 사는 행정 관리원. 테라리움의 정보 보안 중 가장 높은 게 행정 관리원에 대한 정보였다.

“그러고 보니… 인페르노는 그 정보를 입수해 냈네요.”

작정하고 스케어크로우를 타깃 삼은 인페르노는 어닝을 시작으로 작업을 쳤다.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여러 테라리움 중 어떻게 이들을 특정할 수 있었던 걸까?

물론 그들이 테라리움 곳곳에 숨어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설마 세상의 모든 테라리움에 심어 뒀다고?

나는 다시금 인페르노의 조직도를 살펴봤다.

상당히 많은 이들과 점조직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할 법도 하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넓게 퍼져 있는 인페르노를 무너뜨릴 수 있긴 할까?

“가지치기를 해야 해.”

내 걱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파필리온이 말했다.

그는 펜 끝으로 최하단에 수없이 포화된 작은 점들이 아닌 그 위의 조직을 가리켰다.

그러곤 조직들을 잇는 연결부를 죽 그었다.

“물론 그대가 수장을 단번에 꺾을 수 있다면 베스트지만… 그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겠지?”

이미 만나 봤으니 안다. 정면 승부를 건다면 내 패배가 뻔했다.

“그러니 그 아래 손발을 끊어 수장을 고립시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조무래기 하나하나 상대하며 시간을 낭비할 순 없잖아? 이런 잔가지들은 굵직한 가지를 끊어 내면 같이 죽어.”

난 조직도에서 크레아시온이 위치한 곳을 바라봤다.

그 밑에도 제법 많이 딸려 있었으나 크레아시온이란 가지가 끊기며 상당수가 사라지긴 했다.

물론 이 경우는 내가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을 통째로 털었기에 크레아시온을 필두로 세트로 묶여서 잡혀간 것에 속했지만.

파필리온의 말은 크레아시온 밑에서 일하던 연금술사나 연구원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크레아시온을 특정해 처리해 버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큰 가지에 속하는 스텔라를 또 내가 노릴 순 없는 노릇이니, 그녀 밑의 가지를 쳐 내며 그녀 역시 고립시키는 수순을 거쳐야겠지.

노리는 가지가 너무 견고할 경우 그 아래의 잔가지를 친다.

조직도를 손에 넣은 이후, 인페르노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친다는 두루뭉술한 계획보단 주요 인물을 처리한다는 게 훨씬 체계적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내가 얼마나 대책 없이 활동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결국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망하게 한다는 계획이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이었나.

“크레아시온의 구금으로 인해 동요하기 시작했을 테니 ‘보태는 불꽃’을 먼저 노리는 것도 괜찮겠지. 그나마 이쪽이 좀 더 정보가 많기도 하고.”

불꽃이라 표기된 가장 웃대가리들의 명칭 이외에도 모든 주요 인물들이 이름이 아닌 암호명으로 적혀 있었다.

당장 조직 내에 존재한단 사실만 알 뿐 모든 것들이 베일에 싸여 있는 자들.

그러나 그중 몇 명은 파필리온이 자신의 지식을 토대로 추정되는 자들의 이름과 위치를 표기해 뒀다. 그래 봤자 손에 꼽지만.

어떤 테라리움에 파견되어 있는지, 어느 연금탑에서 정체를 숨긴 채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지 등등.

하지만 그가 16번째 테라리움의 전 행정 관리원을 맡기 전의 정보들이다 보니 업데이트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어쨌든 ‘보태는 불꽃’이 가장 많이 정보가 오픈된 편에 속했다.

“아니면 행동 대장들이 모인 ‘개척하는 불꽃’도 괜찮지. 다른 셋보다는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파괴엔 항상 잔해와 흔적이 남으니 그나마 추적하기 쉬울 거야. 봄버의 경우를 보더라도 의외로 쉽게 모습을 드러냈잖아? 그것도 아니라면 여기저기 다 손대고 다니며 혼란을 일으키는 것도 좋겠지.”

“그러기 위해선 결국 정보가 선행되야 하는 거고. 어쩔 수 없이 ‘보태는 불꽃’ 쪽을 먼저 들쑤셔야겠네.”

하나를 친 후 다른 가지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크레아시온을 치는 과정에서 파필리온을 얻어 다음 단서들을 획득했으니 결국 모든 인페르노들을 쳐 내려면 이 과정들을 겪어야 할 것이다.

최종 목표는 애쉬지만 더 하위 목표를 정하자면 그를 보필하는 4명의 장로들이었다. 또 그것보다 더 하위 목표를 정하자면 4명의 장로들을 보필하는 자들이고.

스텔라를 제외한 다른 세 명의 장로 역시 정체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나마 파필리온이 스텔라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전대 수장이었던 탓도 있지만 특수한 가족 관계 때문이다.

“크레아시온을 털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초에 면회도 어렵고 자기 혼자 죄를 끌어안고 끝까지 인페르노에 대한 비밀을 지키려던 자였으니 힘들겠지.

그나마 시작할 수 있는 건 파필리온이 밝혀낸 확실치 않은 몇몇 인물들부터라고 생각했다.

“행선지를 어디로 정하실 건가요?”

보좌관들이 떠나기 전 내게 물었다.

단순히 67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출발이 지체됐으므로 이젠 떠날 때였다.

테리쿨라란 이름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수확이 컸으므로 더 이상 파고드는 건 낭비였다.

“오랜만에 16번째 테라리움에 들르는 건 어때? 연합 사업을 직접 검토해 볼 때도 됐잖아?”

파필리온은 내가 함께 가기를 너무나도 바라는 눈치였지만 애초에 내 앞으로의 계획에 16번째 테라리움의 사업은 완전 뒷전이었다.

그는 돌아갈 때의 안전을 위해 1번째 테라리움에 잔뜩 호위를 요청했다. 물론 내 이름을 들먹여서.

애초에 목숨이 노려지는 그에겐 16번째 테라리움을 떠나 여기까지 오는 게 엄청난 도박이었다.

평생을 16번째 테라리움에 숨어 살아도 모자랄 판에 1번째 테라리움까지 온 게 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돌아갈 때도 그 운이 따르란 법은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만 했다.

다행인지 1번째 테라리움은 신변 보호 요청을 수락해 주었다.

아마도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건에 대한 내 공로와 위험을 인정한 거겠지.

하지만 그들이 공식으로 1번째 테라리움의 위명을 내세워 모셔 갈 인물은 내가 아닌 내 보좌관이었다.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면 꼭 그 보석 세공사분들을 만나 볼게요.”

에우노미아는 당연하게도 디케와 에이레네를 따라 28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들은 루프의 가족들을 만나 사파이어 귀걸이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면 내게도 공유해 주기로 했다.

인페르노 가지치기에 대한 계획은 새로운 서브 퀘스트로 등록되는 데 그쳤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으로 인해 인페르노를 너무 들쑤셔 놨으니 잠시 휴지기를 갖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다. 더구나 1번째 테라리움이 앞장서서 토벌에 나섰으니 형세가 어떻게 변화할지 지켜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보좌관들은 각자의 테라리움으로 돌아가 스파이가 파고들지 못하게 경계에 경계를 더하기로 했다.

남은 건, 당장 내가 어떤 퀘스트를 먼저 수행하느냐였다.

낮은 거목이 내게 준 통행 허가증을 들고 스노우 필드를 찾아가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와 숨바꼭질을 할 수도 있고, 아스키아에 잡혀간 시들링을 구하러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시들링을 모셔 갔다는 이리스의 발언이 마음에 걸렸다.

“저희가 시간을 벌게요.”

“다녀오십쇼, 마스터.”

이 일은 길드원들이 도움을 줬다. 그들은 28번째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 입장으로 아스키아 길드에 대면을 요청하는 정식 공문을 보냈다.

길드 규모로 따지자면 우리가 한참 뒤떨어졌으나 테라리움을 걸고넘어지면 위시하기 힘들 것이다.

이쪽은 전속 길드, 그쪽은 전속 길드가 아니란 입장 차이도 있었고.

테라리움끼리 문제가 생긴다면 결국 손해 보는 건 그쪽에 스톤헨지를 둔 길드였다.

물론 5번째 테라리움에 비하면 28번째 테라리움의 번호가 많이 떨어지기에 여차하면 16번째의 번호까지 빌릴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요청이 승낙됐다.

그래서 결국 난 10그루의 필드 가디언을 모두 모으는 메인 퀘스트 진행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위치로 따지자면 1번째 테라리움 근처의 스노우 필드로 가는 것이 더 가깝기도 했다.

길드원들에게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을 맡긴 채 스노우 필드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포인세티아와의 숨바꼭질은 또 얼마나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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