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8화 (378/604)

네가… 강아지니? 공을 던진 후 물어 오라고 하면 물어 올 거야?

아니, 이 이상한 놈은 진짜 물어 올 것 같아서 치가 떨렸다.

이 삐딱선을 탄 애정 갈구는 대체 어디서 유래된 거야?

“어휴… 그래, 잘했다, 잘했어.”

“음…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은 말고.”

“진짜 칠 거 같은데 이 정도만 하면 안 돼?”

영 못마땅한데도 막상 머리를 쓰다듬자 손에 닿는 머릿결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계속 손이 갔다.

손에 잡히는 기왓장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잘라 낸 나와 다르게 어지간히 관리에 열심이구나 싶었다.

더 부담스럽게 치댈 줄 알았던 그는 원하는 바를 이뤘기 때문인지 고분고분했다.

똑똑.

“제이 님, 부탁하신 정보 말인데요.”

텁!

누군가 방에 들어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덕분에 온전히 내게 머리를 맡기고 있던 파필리온이 아픈 소리를 내며 소파 끝으로 풀썩 쓰러졌다.

“음…. 이따 다시 찾아올까요?”

방에 들어온 이는 에이레네와 디케였다. 그리고 한발 늦게 에우노미아까지 돌아왔다.

“아니에요. 별거 아니었어요.”

“만약 저자가 무슨 짓을 했다면, 더 강하게 나가셔도 될 것 같아요.”

“같은 보좌관 신분에 너무 인식이 박한 것 같습니다.”

파필리온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며 점잔을 떨었다.

하지만 셋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곧장 내게 다가왔다.

“67번째 테라리움의 마지막 행정 관리원에 대한 정보를 겨우 알아 왔어요. 이름뿐이긴 한데… 괜찮을까요?”

“사실 가장 궁금했던 게 이름이긴 했어요. 이름이 뭔가요?”

“테리쿨라, 그런 이름이었어요.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테리쿨라? 분명 낯설어야 하는 이름인데… 묘하게 익숙했다. 어디서 들었지?

“난 이름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운명론을 믿진 않지만….”

파필리온이 소파를 반 바퀴 돌아 슬쩍 내 뒤에 서며 생각에 집중하는 걸 방해했다.

“자식이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에 돌과 관련된 이름을 짓는다거나 맑고 깨끗한 사람이 되라며 물과 관련된 이름으로 짓는 것처럼 말이야. 뭐, 하지만 물과 관련된 이름은 오래전부터 넵튜누스 쪽이 선점하고 있다시피 하고.”

테리쿨라… 테리쿨라…. 조금만 더 집중하면 기억이 날 것도 같아.

워낙 특이한 이름이다 보니 쉬이 잊긴 힘들 텐데.

“맞아요. 그래서 유독 식물과 관련된 이름이 많기도 하죠. 드라이어드를 굽어살피는 세계수가 자신의 자식도 함께 살펴 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짓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혹은 드라이어드의 알려진 모체 신화에서 따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죠?”

디케가 파필리온의 말에 동조하며 자신이 아는 지식을 선보였다.

덕분에 나 역시 로웰라, 미미르와 함께 과거 이름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오르고 말았다.

파필리온의 어그로 능력은 수준급이라 저놈이 게임에서 탱커를 잡았다면 훨훨 날아다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어머니는 왜 내게 나비란 이름을 지어 주셨나 모르겠어. 나비는 너무 약하지 않아? 단순히 어감이 예뻐서 그렇게 지은 게 분명해. 그 인간 성정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달리 태어났다면 불의 이름을 가졌을 수도 있었겠지….’

마지막 말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았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너무 가까웠다.

“왜? 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널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비 새끼라고 부르는 걸 보면 완전 딱 맞는 이름이 아닐까?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자리를 옮기자 목소리도 따라온다.

“그래? 블랙 릴리가 마음에 든다면 나도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든다는 소리는 한 적 없는데.”

단칼에 잘라 말하자 그가 못 들은 척 딴소리를 늘어놓는다.

“어쨌든 운명론을 믿진 않지만 그래도 자식 이름은 좀 고심해서 지어야 하지 않아? 허수아비라니. 뭐 농부 집안이라면 새를 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 좋은 이름이라 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허수아비가 의미하는 바는 그다지 좋지 않잖아.”

“확실히… 허수아비는 그렇게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을 때가 많죠.”

다시금 디케가 파필리온의 말에 동조했다.

“저도 종종 험담을 할 때 허수아비란 말을 쓰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대개 남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은어였죠. 제구실 못 하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사람 말이에요.”

“애초에 사람의 모습을 본뜬 가짜니까….”

에우노미아가 어깨로 슬쩍 파필리온을 밀어내더니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며 이야기했다.

“내가 잘못 봤군. 그대는 패랭이꽃보단 라일락이 어울려.”

“헛소리는 그만하고. 그래서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거야? 허수아비는 왜?”

“그대가 고민하고 있는 듯해 도움을 주려고 했던 거야.”

“도움?”

“그래, 테리쿨라. 허수아비를 뜻하는 이름이잖아. 하지만 그런 이름을 갖고도 행정 관리원이 된 걸 보면 역시 이름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건 허황된 말이겠지?”

일순 머리에 번개라도 내려친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파필리온의 말이 정말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던 정보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서로의 연관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흩어졌던 퍼즐 조각이 짜 맞춰지며 완성된 그림을 만들 듯, 희미하게 제 모습을 내보이지 않으며 날 괴롭혔던 ‘테리쿨라’의 정체도 마침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이름… 확실히 본 적 있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67번째 테라리움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 예상은 결국 맞았다.

헬 드라이어드를 찾으러 갔던 곳에서 기이한 광경을 목도했었다.

깨진 거대한 유리관과 바닥을 흠뻑 적신 푸른빛을 띠는 알 수 없는 액체 그리고 그 위에 널브러져 있던 삐쩍 마른 새하얀 사람들.

그들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단 하나, 유리관의 하단에 붙어 있던 작은 팻말을 통해 이름을 짐작할 순 있었다.

하나는 ‘퍼펫’ 그리고 주인이 존재하지 않던 텅 빈 유리관에는 ‘S.C’라는 약자만 적혀 있었고….

또 다른 하나엔 ‘테리쿨라’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필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자가 그곳에 있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파필리온의 말에 따르면 사람의 이름을 허수아비로 짓는 경우가 흔하진 않은 듯하니… 동명이인이 많진 않을 텐데.

스텔라의 방에 남겨져 있던 67번째 테라리움에 관한 사건 보고서. 그리고 그 테라리움의 마지막 행정 관리원의 이름.

우연이라고 보기엔…. 그 유리관의 주인이자 끔찍한 몰골의 시체가 된 자가 67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었던 ‘테리쿨라’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허수아비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스케어크로우’.

이젠 충격적이게도 기정사실화 되어 가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과 그녀와의 연관성에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텅 빈 유리관의 주인이 혹시 ‘스케어크로우’가 아니었을까?

팻말에 남겨져 있던 약자 역시 스케어크로우와 일치하고… 인페르노가 그녀를 원하고 있었으니….

“스케어크로우….”

만약 어닝이 변덕을 부리지 않았다면, 미래는 얼마나 끔찍하게 변해 있었을까?

스텔라의 방엔 67번째 테라리움과 28번째 테라리움의 보고서가 나란히 놓여 있을 테고, 자신의 테라리움을 위해 마지막 생명력을 쥐어짜 내며 그래프트를 펼쳤던 여인은 유리관에 갇혀 지내는 신세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 발견해 꺼내 주지 않는 이상 평생을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번영에 희생당했겠지.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젠 모든 전말을 알 것만 같았다.

67번째 테라리움이 노려진 이유는 테라리움 자체가 원인이라기보단 그곳을 통치하는 행정 관리원 테리쿨라를 노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28번째 테라리움 역시 스케어크로우를 노렸기에 백목마름병해충을 퍼뜨린 거겠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자연적인 방법으론 수많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를 영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떠한 특수한 힘이 필요했을 거고…. 그 힘엔 테리쿨라와 스케어크로우 같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만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허수아비란 뜻을 가진 이름도 있지만, 행정 관리원 즉 가드닝 스킬을 가진 사람들이란 것이다.

세상 모든 행정 관리원의 가드닝 스킬이 다 똑같진 않다.

과거 어닝의 말로 유추해 보자면 행정 관리원임에도 불구하고 가드닝 스킬을 깨우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고.

물론 파필리온이 내게 했던 것처럼 동일한 가드닝 스킬을 전승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특이 케이스는 흔할 거라 보지 않는다.

테라리움의 주인이 교체되기 위해선 경매를 거쳐야 하니 그 전 단계에 파산이라든가 자격 박탈 등이 따를 테니 곱게 떠나진 않을 거다. 세습되는 경우라면 가드닝 스킬 전승을 거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파필리온과 같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나 해석에 따라 근본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으므로 어쩌면 가드닝 스킬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할 거다.

똑같이 28번째 테라리움을 소유했지만 나와 스케어크로우의 가드닝 스킬은 완전히 달랐다.

어쩌면 가드닝 스킬에 테라리움의 번호는 그다지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행정 관리원이 된다는 게 단순히 스킬을 일깨우기 위한 매개로 작용하는 거겠지.

“스케어크로우는 테라리움 내의 세계수의 가지에 드라이어드의 영혼을 묶을 수 있었어. 드루이드가 없는 드라이어드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교감 능력이 뛰어난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

스케어크로우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특별한 능력.

어쩌면 스케어크로우처럼 67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테리쿨라도 가지고 있었을 특별한 능력.

그리고 나머지 두 유리관에 갇혀 있던 퍼펫을 포함한 두 명도 가지고 있었을 특별한 능력.

인페르노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위해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고, 그들이 소유한 테라리움을 파괴하는 방법으로 납치해 왔던 것이다.

아마 둘이 더 있었으니 28번째와 67번째를 제외한 다른 두 테라리움도 인페르노에 의해 망했을 것이 분명하다.

내게 마지막으로 드라이어드들이 자폭할 거란 힌트를 준 이의 이름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파필리온은 이름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는 건 허황된 말이라곤 했지만, 하필 둘이나 허수아비란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퍼펫’이란 이름도 인형이란 뜻을 가졌으니 넓게 보자면 허수아비란 뜻을 가졌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스케어크로우는 달랐지만 둘의 최후는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었다. 이건 정말 이름이 야기한 운명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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