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7화 (377/604)

조직도는 어차피 알아볼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67번째 사건은 단순히 에우노미아가 입으로 옮겨 전해도 그 자리의 대부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주요 정보였다.

덕분에 숨어 있던 봄버의 정체가 들켜서 곧바로 체포되기도 했으니까.

단순히 봄버를 남의 손으로 처리할 카드로 쓰기 위해 남겨 두었다고 하기엔, 그 정보를 누군가 습득한 채 살아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기 때문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봄버는 제쳐 두고.”

수많은 정보 중 67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사건 보고서가 남아 있었던 이유.

만약 보고서가 보관되고 있던 장소인 파라다이스 테라리움과 연관되어 있다면?

“67번째 테라리움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관련이 있다?”

67번째 테라리움은 단순히 인페르노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을 뿐이니 두 장소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였다.

문득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처음 언급되었던 크레아시온과 어닝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닝이 변심한 탓에 그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했다.

그녀의 변심 덕에 결정적으로 인페르노가 아닌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을 손에 넣게 되었으나…. 혹시 일이 잘못됐다면 67번째 테라리움처럼 28번째 테라리움의 사건 보고서가 함께 남아 있지 않았을까?

또한 인페르노의 수장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계획에 스케어크로우를 원했다.

그 이유는 결국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방문했어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혹시…?

“청문회에서 이야기 나왔던 67번째 테라리움 말인데요.”

내가 운을 떼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 명의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것이 보였다.

“물론 오래전에 괴멸해서 정보를 찾기 힘들겠지만… 혹시 그곳이 망하기 전의 마지막 행정 관리원에 대한 정보를 찾아 줄 수 있을까요?”

“그러잖아도 청문회 때 반응이 심상치 않기도 했고, 테라리움이 큰 피해를 입은 게… 과거 저희 고향이 떠오르기도 해서 따로 정보를 조사하고 싶었는데….”

그렇다는 건 역시 어렵다는 뜻인가?

“테라리움들은 워낙 대외비를 중시해서 말이에요. 더구나 행정 관리원에 대한 정보라면 테라리움이 작정하고 숨길 경우 더욱 찾기 힘들어요.”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이 모두 나처럼 정체를 드러내 놓고 활동하진 않는다.

물론 나도 마을 내부를 자주 돌아다니던 2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에 비하면 신비주의를 유지하는 편이지만.

1번째 테라리움처럼 자신을 꼭꼭 숨긴 채로 지내는 행정 관리원도 존재했다.

“과거 저희 신분이라면 어려웠겠지만….”

그들의 시선은 내가 잠드는 바람에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잡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잡지, 어지간히 신분이 증명된 사람이 아니면 구할 수 없다는 ‘캐치 다이아’ 맞죠?”

“아, 이거…. 파필리온이 읽어 보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 주긴 했는데 그 정도였나요?”

“대부분 추론과 관련인들의 인터뷰에 의지하고 있다곤 하나 결국은 테라리움 내부 사정을 다루는 잡지다 보니 아무나 볼 수 없거든요. 혹시 그에게 부탁할 수 있나요? 과거 발행된 잡지들을 살펴보면 67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제이 님께서 지난 호를 구해 주시면 둘은 잡지에 집중하세요. 전 외부에 드러난 정보들을 탐색해 볼게요. 도서관에도 꽤 많은 정보가 있겠죠.”

“에우노미아, 당신도 돕게요?”

“저도 돕고 싶어요. 많은 걸 받았으니까요.”

그녀는 보좌관 신분이 아니니 이렇게 열정적으로 굴 필요가 없는데.

두 자매와 함께 일하고 싶다더니 그 말을 지킬 셈인 듯했다.

덕분에 1번째 테라리움을 떠나는 일은 조금 뒤로 미뤄졌다.

파필리온은 능력껏 1번째 테라리움에서 ‘캐치 다이아’의 과거 발행 잡지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다 디케와 에이레네에게 안겨 주었고, 에우노미아는 내 대리 자격으로 1번째 테라리움의 종합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역시나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대리란 신분보다 1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대리란 신분이 그녀가 좀 더 광범위한 도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만약 훗날 내가 한 자릿수 테라리움을 먹게 된다면 대체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 걸까?

“보상은 없어?”

잠을 자긴 한 건지, 나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일어나 산책까지 끝마쳤다는 파필리온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그는 밤새 완성해 만들어 낸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더니 날 향해 무언가를 갈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무슨 보상?”

“별로였어?”

“글쎄, 이걸 조직도로 봐야 할지 네 낙서장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던데?”

“28번째 쪽 보좌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내가 잘해 냈다는 뜻 아니야? 그건 그렇고, 거긴 이제 보좌관을 셋이나 둘 셈이야? 16번째는 번호도 더 앞이라 훨씬 바쁜데 불공평하다는 생각 안 들어? 이쪽도 몇 명 더 붙여 줘.”

파필리온의 일자리는 그의 직위 변경 외에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내부의 인페르노 끄나풀은 알아서 쳐 냈겠지만 빈 자리도 알아서 채웠겠지.

한마디로 그는 이미 16번째 테라리움에 과거 하던 대로 부려 먹을 사람들이 충분히 널려 있다는 뜻이었다.

“힘들면 사퇴할래? 새로 뽑게. 이번엔 너처럼 방정맞은 놈 말고 좀 점잖은 사람으로다가 뽑아야겠어. 너 하는 꼴을 보니 16번째 테라리움의 위신이 떨어질까 걱정되는데.”

“이래 봬도 6번째 테라리움에 트집 한번 잡힌 적 없이 잘 관리해 온 나인데….”

파필리온이 입을 삐죽 내밀며 토라진 티를 냈다. 다 큰 녀석이 나이에 안 맞는 행동을 해도 잘생긴 얼굴 때문인지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 난 내 심각한 얼빠 기질에 이마를 짚었다.

이 정도면 병이다, 병. 엘더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 녀석까지 너그럽게 봐주면 어쩌자는 거야?

“생각해 보니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내가 가져갈 다이아가 줄어드니 손해네.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

행여나 내가 정말 관두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지 금방 말이 바뀌었다.

그가 샐쭉 웃으며 자연스레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제 대화 좀 오래 나눴다고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우스웠다.

헛웃음을 내뱉는 날 보고 그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 정도 정보면 몇 년은 우려먹을 수 있었는데. 포기하고 다 털어놨다고.”

이놈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놈이었다. 제 목숨을 구걸하며 재빠르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했지.

“너는 드라이어드에겐 자비로우나 인간으로선 쓸모 있는 자들만 곁에 두는 것 같으니 내 쓸모를 인식시켜야 한다고 했다.”

무려 시들링에게 저딴 조언을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비록 인페르노에서 잘렸다곤 하나 과거 몸담았던 전적이 있으니, 인페르노를 상대하는 나로서는 이 녀석이 토해 낼 정보가 기꺼웠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그 안에서 직접 생활한 놈이 보고 들은 것에 비할까?

그건 그렇고. 이 조직도에 적힌 첨언들이 천천히 풀어내며 우려먹을 정보들이었단 말이지?

내 시선에 지레 찔린 듯, 그가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왜? 한 번에 다 털어놨다가 쓸모를 다한 사냥개처럼 버려지면 어떡해? 나 월렛도 없어서 부하 직원 거 빌려 쓰고 있어. 이대로 쫓겨나면….”

그 부하 직원은 무슨 죄인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가증스럽게도 불쌍한 작은 동물 흉내를 내며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찍어 내고 있었다.

“그래서 뭘 더 숨기고 있는데? 알고 보니 이 조직도도 대강 검토한 거 아냐?”

“이 조직도엔 블랙 릴리, 그대를 향한 마음만큼 아는 모든 것을 채워 넣었지.”

난 종이를 팔랑이며 대꾸했다.

“빈약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한자리 먹을 걸 그랬어. 응?”

어느새 훌쩍 거리를 좁힌 그가 어깨를 맞대었다.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는 쉴 새 없이 입을 털어 내가 정신을 못 차리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난 채찍보다 당근을 받을 때 더 일을 잘해. 칭찬 좀 해 줘. 더 살갑게 굴어 주면 그대 발밑을 기어 다닐 만큼 충실해질지도 몰라.”

“언제는 나비처럼 날아다닌다며? 이름값 좀 해.”

“도통 내려앉을 틈을 안 주는데 날다 지쳐. 그러니 밑바닥부터 공략해야지.”

“너 하는 꼴을 보면 도무지 좋은 말이 안 나오는데…. 후, 그래… 잘했다.”

차라리 다이아를 요구해라. 거리낌 없이 쏟아 줄 수 있게.

“그것 말고. 더 다정하게. 난 적어도 시들링을 네 곁에 붙여 두면 좀 물렁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변함이 없네. 잘 가르쳐서 보내 놨는데 그걸론 부족한 거야?”

“여기서 시들링이 왜 나와?”

“내가 왜 그를 고스란히 그대 곁에 붙여 놨다고 생각해? 그쪽으로 그대의 관심을 다 뺏기면 난 손해인데도?”

뻔뻔하게 내뱉는 어이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시들링은 유독 그대에게 맹목적으로 굴잖아. 집요한 구석도 있지. 눈치도 없고 말이야.”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일부러 그의 말에 동조 의사를 표현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일에 바쁜 그대라도 계속 부딪히면 틈이 생기겠거니 하고 선발을 보냈는데. 어지간히 능력이 없나 보군. 그래도 오랫동안 같이 다녔을 텐데 정말 일말의 여지도 생기지 않았어? 응? 그가 달라 보인다거나 그의 행동을 의식하게 됐다거나. 그런 게 전혀 없어? 역시 취향 문제인가.”

“내가 어쩌다 너와 이런 주제로 대화하는 관계가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적당히 해라.”

손을 휘휘 저어도 파필리온은 끈질기게 붙어 왔다.

“나도 이런 신세만 아니면 그대를 쫓아다닐 텐데.”

“보기 좋은 꽃은 엘더 하나로도 족해.”

“드라이어드가 문제인가? 그대는 유독 드라이어드들을 애틋하게 대하는 것 같단 말이지. 마치 그들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주종 관계 그 이상은 아니야. 종종 드라이어드와 사랑에 빠지는 해괴한 드루이드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종 자체가 다른데, 대체 사랑이란 감정이 어떻게 생긴다는 건지.”

“사랑의 종류도 여럿이지.”

“뭐, 그대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하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니 명심해. 아무리 그대가 갈망해도 드라이어드는 절대 같은 그것과 같은 감정으로 보답할 수 없어. 인간과 생각 체계가 달라.”

파필리온은 진심으로 충고하는 말투로 드라이어드와 연애는 불가능하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쪽이 아무리 사랑한다 소리쳐도 절대 드라이어드는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고.

시들링에 이어 드라이어드까지 들먹이는 태도에, 난 그저 그의 말이 얄팍한 질투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그들에게 향할 관심을 오롯이 제게 달라는 거 아닌가.

“됐다, 됐어. 네가 원하는 다정한 칭찬 해 주고 끝내자. 네가 이상한 주제로 떠들어 대지 않고 조직도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면 진작 해 줬겠지. 그래서 뭘 원하는데?”

그러자 파필리온이 대뜸 조심스럽게 내 왼손을 잡았다. 그러곤 잘 정리된 제 머리로 내 손을 끌어다 올렸다.

“쓰다듬어 줘. 그리고 내 눈을 마주하며 다정하게 말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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