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각, 달각.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해가 벌써 중천인지 방 안이 훤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쳐 뒀던 커튼이 어느새 활짝 열려 있었고 한낮의 햇빛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왔다.
“일어나셨어요?”
낯익은 목소리가 반가움을 표했다.
침대와 멀리 떨어진 응접실 소파 위로 작은 머리통 셋이 옹기종기 솟아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겨우 상체를 일으키자 에우노미아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놨다.
달그락거리던 소리의 정체가 아마도 이것이었나 보다.
두 보좌관을 내버려 두고 일반인이 시중을 들다니.
“너무 곤히 자고 계셔서….”
민망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뒷말은 생략되어 있었으나 대충 짐작은 갔다.
내가 너무 오래 잤구나.
파필리온과 밤늦게까지 아웅다웅하고 방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잡지를 들춰 보다 뒤늦게 잠들었으니 기상 시간도 덩달아 늦어진 것이다.
1번째 테라리움에서의 볼일은 끝났으니 하루빨리 출발해야 하는데, 차마 곤히 자는 날 깨우지 못해 내가 깰 때까지 방 안에서 기다렸나 보다.
민망한 마음이 들어 황급히 얼굴을 문질렀다.
벌써 일과를 시작한 건지 응접실 테이블엔 서류가 가득했다.
일터를 벗어났으니 좀 더 여유를 부려도 될 텐데.
그것보다 에우노미아까지 저 틈에 껴서 익숙하게 업무 중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셋 사이의 어색함이 간밤에 많이 희석된 것인지 사이좋게 모여 있는 모습이 제법 자매 티가 많이 났다.
굳이 사파이어 귀걸이를 통해 정보를 모으고 기억을 되돌리는 과정이 없어도, 에우노미아는 어엿한 맏이처럼 보였다.
“허락 없이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하지만 일어나는 즉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쉬엄쉬엄하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 역시 에우노미아가 건네는 종이를 넙죽 받았다.
아직 덜 또렷한 시야 속에서도 여기저기 첨언이 복잡하게 붙은 조직도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 일찍 파필리온이란 분이 주고 가셨어요.”
“아… 결국 밤새워서 완성했나 보네.”
일은 시키면 참 잘해. 모른 척 잡아떼 놓고도 이 정도로 해낼 줄 알았다면, 솔직히 그에게 조직도를 만들어 내서 뱉으라고 진작 명령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이라 하면… 세 분은 대체 언제부터 제 방에 와 계셨던 거예요?”
내 질문에 셋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문득 그대로 파필리온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간 걱정했던 대로 큰 오해가 생겼을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 방에 찾아왔다가 주인이 없단 걸 알아차린다면…. 파필리온이 무척이나 반기는 그런 상황이 됐겠지.
“알고 계신 게 아주 많으시더라고요.”
에우노미아가 조직도에 대해 감탄하며 애써 화제를 전환했다.
이미 셋은 자고 있는 날 대신해 먼저 조직도의 검토를 끝낸 후였다.
나와 에우노미아는 암호화된 조직도에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머리만 굴렸으니, 빼곡히 첨언이 채워진 조직도를 보고 감탄할 만도 했다.
“그런 쪽에 능력이 좀 있는 편이죠.”
파필리온이 인페르노 출신이기에 해박하다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어디 보자….”
‘가장 위대한 불꽃’은 예상대로 애쉬를 지칭하는 말이 맞았다.
불이 세상을 지배할 날을 기원하는 교단이다 보니 가장 불의 힘이 센 자가 수장을 맡는 방식이라, 현존하는 베스탈리스 중 가장 강한 애쉬를 ‘가장 위대한 불꽃’이라 칭하는 것은 이해가 됐다.
“위대한 불꽃이라….”
그렇다면 애쉬를 뛰어넘는 베스탈리스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테니 그 이상의 한계를 넘는 강한 적의 등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사실에 안심해야 되는 걸까? 물론 그 힘이 전혀 상대하기 쉬운 난이도는 아니지만.
‘꺼지지 않는 불꽃’은 수장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대체하는 부장 자리가 맞긴 하나 애쉬 1인 독재 체제다 보니 짐작했던 대로 공석이 맞았다.
달리 말하자면 애쉬가 무너지면 다음이 없으니, 역설적이지만 애쉬 자체가 가장 강한 약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애쉬를 보좌하는 4개의 불꽃, ‘상속되는 불꽃’, ‘개척하는 불꽃’, ‘내밀한 불꽃’, ‘보태는 불꽃’은 특정 인물을 지칭하면서 그와 동시에 그 인물이 이끄는 파벌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었다.
‘상속되는 불꽃’은 유달리 주인을 닮아 경박한 글씨체로 ‘그대가 이미 만난 존재, 스텔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뻔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이름 ‘스텔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 애쉬의 모친이었다.
“스텔라….”
아름다운 이름이었지만 이 이름의 주인을 알고 있으니 내뱉는 글자 하나하나에 미약한 두려움이 일었다.
흡사 이름의 주인이 듣고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도 들어 어깨를 떨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상이 강렬했던 사람이었다.
만약 애쉬가 아닌 이 자를 적으로 삼았어야 한다면 지금과 같이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까?
분명 애쉬도 강하지만… 스텔라는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애쉬의 불은 아무렇게나 막무가내로 발산하는 화재의 느낌이라 보고 피할 수라도 있지만, 스텔라의 불은 그 피해 규모를 쉬이 짐작할 수 없는 잠재된 폭발과도 같아서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가만히 선 채로 폭발에 휩싸일 것 같은 느낌, 나도 모르게 불구덩이 한가운데에 선 느낌, 스텔라에게 받은 인상이 그러했다.
이미 완성된 태양이라 칭송받던 자.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열기가 사그라들었다곤 하나 정말일까? 내 생각은 쇠약한 척 연기를 하고 있다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