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5화 (375/604)

단도직입적인 그의 태도에 난 몹시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대를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묘한 데서 순진하게 구네. 연애가 처음은 아닐 거 아냐?”

“순진하다니.”

“아니면 그대는 그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오히려 그대는 그대가 가진 장점들이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내가 날 과소평가한다고?”

아니, 오히려 난 나 자신을 아주 잘 파악한다고 생각했다.

“그대는 누가 봐도 매력적이야. 특히나 나와 같은 피식자들에게 그대는 신처럼 보일 정도지.”

피식자라니? 참 웃기는 표현이다. 인페르노에서 쫓겨나 도망자 신세가 된 걸 그렇게 표현하는 거야?

“하루하루 잡아먹힐 일만 걱정하며 생존에 급급한 상황에 모든 걱정으로부터 날 보호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뻔하지 않아? 어떻게든 잘 보여서 가장 안전한 옆자리를 꿰차고 싶어지지. 약자는 원래 강자에게 끌리는 법이야.”

“묘사가 참….”

파필리온은 다시금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날 직시했다.

입이 멈추면 눈으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분명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머릿속이 사나웠다.

“그댄 정말 대단한 존재야. 능력 좋고 희귀한 드라이어드들을 잔뜩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드루이드들 사이에서 우상이 될 거야.”

이건 그 역시도 드루이드이기에 하는 소리인 건가?

“그것뿐이야? 이 세상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두 개의 테라리움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인데, 하물며 그 테라리움의 번호도 남들은 평생을 걸쳐 경매를 들락거려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앞 번호지.”

10번대와 20번대에 하나씩, 막 행정 관리원이 됐을 때만 해도 이 번호들이 갖는 의미가 그렇게 큰 줄은 몰랐었다.

“그대의 행보로 우호 관계를 구축한 수많은 테라리움들은 또 어때? 그대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그 많은 이들이 기꺼이 손을 내밀겠지. 이것만으로도 그대만큼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쥔 자를 찾기 쉽진 않을 거야.”

말이 아주 청산유수였다. 찬양에 가까운 내용을 노래하듯 줄줄 떠벌리니 듣는 당사자인 나는 낯부끄러울 정도였다.

“…….”

“또한 그대는 내가 감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부자이기도 해. 나 역시 16번째 테라리움에서 한때 남부럽지 않을 부를 누려 봤지만 그대를 만나며 모든 게 장난이란 걸 깨달았어. 어쩌면 재산으로 따진다면 그대는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과 비견할 정도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어.”

확실히… 무한 다이아만 있다면 부자라는 칭호가 우스워질 정도지….

“부와 명예, 모든 걸 쥐고 있는데 결정적으로 그대는 잔혹하고 악독한 성정도 아니지. 모든 걸 가진 이들 중에 사람이길 포기한 자들이 많은데, 그대는 많은 이들이 따를 만큼 다정해. 이러니 그대라는 존재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 알겠어?”

“글쎄? 네가 본 모습이 전부 연기하는 거면 어쩌려고?”

내 반론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하, 그렇다면 내가 복수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 의심할 필요도 없지. 그대가 정말 잔인했다면 그날, 내 정체를 알았을 때, 내가 항복을 선언했을 때, 가차 없이 날 죽였을 거야. 사실은 그게 맞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덤덤하게 말하던 이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잔인하다 생각하셔도… 이건 필요한 조치였어요…. 혹시 실망하셨나요?”

행여 뒤탈이 생길까 그들은 독에 당해 저항력을 잃은 적들의 급소를 단번에 꿰뚫어 목숨을 거뒀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것이라 말했지.

하지만 난 그 모습을 보며 차마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제이 님은 아직 많은 곳을 모험하지 않으셨죠? 치안이 좋지 않은 테라리움에선 이런 일이 빈번해요. 저흰 이제 이 정돈 익숙해서 괜찮아요.

그걸 익숙하다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

어쩌면 파필리온의 말처럼 그의 복수심을 의심하느니 확실하게 그 자리에서 죽이는 선택을 해야 했는지도 몰랐다. 이 세계에서는 그게 맞는 거겠지.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력과 능력이 쓸만하다 여겨 한때 적진에 몸담았던 이를 곁에 뒀다.

물론 그쪽에서도 배신자로 찍혀 사면초가인 놈이니 약점을 거머쥐고 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영악한 거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그래서 결국 내 배경을 원한다? 그러니 그렇게 날 유혹하는 거고?”

“유혹을 알아봐 줘서 고마워. 나비의 입장에선 결국 꽃이 지배자야. 살기 위해 꽃이 가진 꿀이 절박하지. 그리고 배경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 배경을 가진 그대를 원하는 거야. 그대와 배경은 별개가 아냐.”

어찌 보면 파필리온은 엘더와 같이 알기 쉬운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다이아에 환장하는 엘더처럼 이자 역시 부와 명예, 권력을 원했다.

하지만 더 이상 직접 차지할 능력도 기회도 없으니 그걸 가진 내게 빌붙으려는 거다.

그것도 부하라는 자리를 넘어 연인이란 동등한 위치를 노리며.

차라리 내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외모가 좋다는 식으로 접근했다면 깔끔하게 무시했을 텐데.

“자존심도 없어?”

“이게 내게 익숙한 방식이야.”

“왜? 이런 게 좋지 않아? 얼굴은 잘생겨도 멍청하게 구는 게 입맛대로 다룰 수 있다고 좋아들 하던데. 똑똑하게 굴면 얼굴값 한다고 생각할 거잖아.”

16번째 테라리움의 여관 라운지에서 그를 마주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발언을 했었지.

처음엔 웬 미친놈이 떠들어 대나 싶었는데….

경박하게 나와 내가 가진 배경을 원하노라 말하면서도 그 속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파필리온은 애쉬와 이복형제라고 했지.

그렇다는 건 엄마가 다르다는 건데, 내가 만났던 애쉬의 엄마는 강한 베스탈리스였다.

그렇다면 파필리온 쪽은?

베스탈리스들이 주축이 된 인페르노 조직 안에서 베스탈리스가 아닌 파필리온의 취급은 어땠을까?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야속한 발길질에 단번에 나가떨어져 반항 한 번 하지 못했던 그.

그래도 명색이 형제인데 어째서 조직 내 위상이 극과 극으로 다른 거지?

“난 까다롭게 굴지 않아. 오히려 멍청하게 굴지. 하지만 눈치 있게 굴 거야. 그대가 귀찮은 짓은 추호도 벌이지 않을 거고. 야심은 죽이고 꽃에 꼬인 나비처럼 하루 종일 아름답게 날갯짓만 할 수 있어. 내가 일으키는 날개바람이 그대에게 영향이나 끼치겠어?”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댔다.

끔찍한 자식, 내가 동정심을 자극하는 데 약하다는 걸 잘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착실히 자신의 과거를 파악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덤비지 않았겠지.

“아직 연애할 상황이 아냐.”

할 일이 태산이라 너무 바빴다.

“역시나 그것마저도 다정해. 거절할 거라면 완곡하게 여지도 주지 말고. 차라리 위계를 이용해 내게 명령해야지. 꿈도 꾸지 말라고. 그리고 난 연인이 되어 달라는 게 아냐. 그 자리는 아직 내게 과해.”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자리라 말하는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내 애인 자리가 별거 있니?

“그저 다른 이들보다 조금만 더 특별한 관계를 원해.”

그게 대체 뭔데? 썸이라도 타자는 거야?

하… 드라이어드나 사람이나 하나 같이 돌봐 줘야 할 사람들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착각일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었다.

계속 붙잡혀 있다간 그의 감정놀음에 동화될 것만 같았다.

“어차피 졸린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여기 이 조직도나 살펴봐.”

애당초 여길 방문했던 목적에서 한참 벗어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입 다물고 있을 테니 계속 여기 있어 주면 안 돼?”

“내가 귀찮은 짓은 추호도 하지 않겠다며.”

“그럼 여기서 자고 가. 내 침대를 써. 난 그대가 명령한 대로 아침까지 이 조직도를 완성해 놓을 테니.”

“남들에게 무슨 오해를 받으라고. 됐어.”

“내겐 이득인데.”

그런 ‘특별한 관계’를 원했던 거군.

“이대로 당장 여길 떠나 아침까지 16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하라고 명령하기 전에 닥쳐.”

진심을 담은 내 말투에 파필리온이 실실 웃으며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생각해 보니 누가 옆에 있으면 잠잘 때 불편할 것 같네. 좋은 밤 보내. 아, 가기 전에 이걸.”

파필리온은 날 배웅해 주다 말고 테이블에 놓인 잡지를 내게 건넸다.

“본래 이런 건 행정 관리원이 챙겨봐야 하는데, 그대는 항상 바쁘니까. 모처럼 1번째 테라리움에 온 김에 어렵사리 구한 거야. 물론 구할 땐 그대 이름 좀 빌렸어. 우리 테라리움에 매주 배송되는 연금학회지보단 유용할 거야.”

“뭐 대단한 거라도 돼?”

“보면 알 거야.”

캐치 다이아, 투자할 곳을 찾고 있나요? 더는 망설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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