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4화 (374/604)

그녀가 빠르게 휘갈겨 그린 내부 조직도는 상당히 세밀했지만, 제대로 정보를 해석해야만 진정한 값어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인페르노에게 맞서는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오밀조밀 그려진 조직도엔 가장 높은 자를 나타내는 듯한 최상단을 기점으로, 바로 아래 하나의 자리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주요직을 뜻하는 듯한 네 개의 자리가 갈라졌다. 또한 그 밑으로도 수없이 많은 점조직들이 뿌리처럼 딸려 있었다.

새삼… 난 정말 거대한 단체를 상대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동안 얻은 정보를 종합해 보면 최상단은 아마 수장인 애쉬의 자리로 보였다.

‘애쉬’라고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은 아니었고 타오르는 불을 형상화한 듯한 문양과 함께 ‘가장 위대한 불꽃’이라 적혀 있을 뿐이었으나, 다른 것들과 달리 지칭하는 것이 유독 비범하니 짐작 가능했다.

이렇게 보니 비밀스러운 한 조직의 수장을 만나게 된 과정이 지나치게 빠른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통은 밑에서부터 천천히 격파해 가며 뒤늦게 보스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정석 아닌가?

마치 차근차근 레벨에 맞는 상대와 겨룬 후 마침내 막판 보스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사락.

난 종이의 면이 부족할 정도로 빽빽한 조직도를 위에서 아래로 매만졌다.

“너무 급하게 적어서 그런지 많이 엉성하죠…. 알아보실 수는 있겠어요?”

에우노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보는 종이를 불안한 얼굴로 살펴봤다.

음음, 하며 추임새를 넣는 걸 보니 빠짐없이 적었는지 검토해 보는 것 같았다.

“충분해요.”

이 사람이 진정 날림으로 작성한 글이 어떤지 모르나 본데.

내 노트를 보면 기절할지도 몰라.

어깨로 슬쩍 에우노미아를 밀어낸 후 다시 집중했다.

사실 여태 그들을 단편적으로 맞이해서 그런지, 상대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위기감이 남달랐다.

오합지졸 양아치 패거리를 상대할 때와 전국에 쫙 깔린 거대 조직을 상대할 때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여태 그들과 마주했던 경험들을 모아 놓고 보면 인페르노는 상당히 몸집이 크고 체계적인 단체였다.

이젠 장난삼아 사이비 단체라 부르던 것을 관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윤곽을 처음 확인할 수 있었던 카나비스 드라이어드 사건.

그때만 해도 단순히 조직 폭력배 정도의 스케일을 예상했으나, 알고 보니 그들은 겨우 일부에 불과했다.

카나비스 사건 때 마주했던 조직의 리더급이었던 칼롱이 스스로를 말단이라고 칭하지 않았는가?

아마 그가 이끌던 조직은 조직도의 맨 아래, 작게 문양으로만 점점이 표시된 점조직들 중 하나겠지?

대충 수를 헤아려도 50을 훌쩍 넘는 개수에 진저리가 났다.

이러한 이들이 세상 곳곳에 활동하며 카나비스 납치와 같은 나쁜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건데.

“이쪽은 어쩌면 인페르노 내에서 계급이 가장 낮고 온갖 궂은일은 다 도맡아 하는 쪽이겠지.”

“방엔 관련 문서가 좀 더 많은 듯했지만 다 확인할 순 없었어요.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에우노미아가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그곳에 남겨진, 에우노미아가 채 다 확인하지 못했던 문서들엔 어떠한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까?

조직도만 해도 외부로 유출된다면 꽤나 타격이 클 법한데, 자신이 애쉬의 모친이라 칭했던 여인은 얼마나 내 죽음을 확신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 방의 열쇠를 내게 넘겼던 걸까?

괘씸하다….

다시 조직도의 최상단부터 아래로 살폈다.

‘가장 위대한 불꽃’인 애쉬를 지나쳐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 쓰인 자리.

단체의 수장 다음가는 자리이니 부장의 자리인 걸까?

여태 애쉬만 경계했는데 이쪽도 눈여겨봐야 하나? 애쉬도 참 강했는데 이 자리에 있는 자는 또 얼마나 강할까?

그리고 바로 아래 당당히 위치한 네 개의 자리.

난 곧바로 이 중 하나가 어쩌면 애쉬의 엄마의 자리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후에 나타난 이들이 그녀를 ‘장로님’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녀와의 대화에서 얻은 단서들로 유추해 보면, 과거 무척이나 강한 베스탈리스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네 자리 중에 그녀의 자리는 대체 어딜까?

‘상속되는 불꽃’, ‘개척하는 불꽃’, ‘내밀한 불꽃’, ‘보태는 불꽃’.

하나같이 난해한 이름들뿐이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한 목적으로 암호화를 택했다면 단순히 숫자를 붙였어도 될 텐데. 1장로, 2장로, 이런 식으로 말이야.

이런 애매한 칭호를 붙인 걸 보면 불꽃의 앞에 붙는 형용사가 상당히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하, 어차피 이렇게 혼자 머리 굴려 봤자 답은 안 나올 테니.”

팔랑, 조직도가 그려진 종이가 대충 반으로 접혔다.

“에우노미아, 밤을 새우면서까지 문서 작성에 열심일 필욘 없어요. 자매분들과 함께 28번째 테라리움에 묵으면서 천천히 완성하셔도 돼요. 오늘 많은 일이 있었고 힘들었잖아요? 밤도 늦었는데 이만 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우노미아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나갈 때 종이를 한 뭉텅이 들고 나가는 걸 보니 기어이 몸을 혹사할 작정인 듯했다.

난 대충 접힌 조직도를 들고, 이에 대해 가장 잘 알 만한 이에게 찾아갔다.

밤새워서 일해야 될 인력은 정작 따로 있었다.

똑똑.

“나야.”

파필리온이 묵고 있을 숙소의 문을 두드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답이 들려왔다.

“오, 블랙 릴리. 이 밤엔 어쩐 일이야? 이렇게 늦은 밤에 홀로 이성이 있는 방에 찾아왔으니 기대 좀 해도 될까?”

“개수작 부리지 마. 일하라고 찾아온 거야.”

방에 들어서자 진하고 무게감 있는 향이 후각을 자극하며 단번에 다른 이의 공간에 들어섰음을 표했다.

파필리온이 즐겨 사용하는 향수였다.

자기가 무슨 드라이어드인 줄 알아. 향기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어.

딱 잠들기 직전에 찾아온 것인지 그는 평소의 정장 차림새와 다르게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모델처럼 큰 키와 딱 벌어진 넓은 어깨를 덮는 오버핏 베이지색 얇은 니트. 그 와중에도 멋 부리는 건 놓칠 수 없는지 쇄골이 드러나는 라운드 넥이라 도저히 평범한 잠옷으론 느껴지진 않았다.

소파에 앉아 가볍게 앞으로 몸을 숙이니 느슨한 옷이 훌쩍 열리는 꼴이 아주 요망해서 차마 그와 마주할 수가 없었다.

능글거리는 표정을 보아하니 저 자식 일부러 저러는 거다.

“흠흠, 인페르노 내부 문서를 습득했어. 조직도로 보이는데 아마 너라면 알아볼 수 있겠지?”

“만약 조직을 부모라고 친다면 난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어서 그렇게 많은 도움은 안 될 텐데?”

“그래도 생판 남인 내가 보는 것보다 많은 걸 볼 수 있겠지.”

슬쩍 시선을 흘리며 파필리온의 앞에 조직도를 펼쳤다.

하지만 그는 내가 내민 종이에 관심은 일절 주지 않은 채 쭉 빠진 긴 다리를 꼬며 자세를 바꿨다.

무릎 위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고 날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이 카메라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델이나 다름없었다.

“뭐야? 뭔데?”

“아니, 취향 참 알기 쉽다 싶어서.”

웃음기 섞인 그 말에 뜨끔했다. 솔직히 파필리온의 겉가죽은 완벽히 내 취향이었으니까.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랄 만큼 파필리온은 내 취향의 결정체였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늘 꿈꿔 왔던 이상형이 마침내 생명을 얻고 살아 움직이는 걸 지켜본 피그말리온이 된 기분이었지.

더구나 한껏 풀린 듯 풍겨 오는 나른한 분위기는 그에게 지독하리만큼 잘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혹할 뻔했다.

그의 일련의 몸짓은, 마치 자신이 어떻게 해야 남들 눈에 잘 보일지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는 자에게서부터 나오는 몸짓이었다.

“그런 너는 꼭 내게 꽁지깃을 한껏 펼친 수컷 공작새 꼴이고.”

“눈에 들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할까. 대체 내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주둥이.”

내 말에 그의 팔이 삐끗 무릎에서 미끄러졌다.

“그리고 미리 말했지? 난 일 시키러 온 거니까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난 여기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야.”

온갖 재롱이란 재롱은 다 떨고 있으면서. 아니,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

문득 사람이 문젠가 싶어 시들링이 파필리온과 똑같이 저러고 있다고 상상해 봤다. 제법….

“무슨 상상을 하길래 얼굴이 새빨개진 거야?”

“너 쥐어패는 상상.”

“틈을 안 주네.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지? 정말 입을 좀 다물면 나아지려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돌연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날 바라보는 눈빛엔 뜨거운 열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 시선이 무얼 뜻하는지는 잘 알았다.

옅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 그 밑에 날렵하게 떨어지는 턱선, 툭 튀어나온 목울대와 이어지는 다부진 목선….

입을 다무니 항상 경박한 주둥이가 깨 먹었던 분위기가 진정되며, 묘하게 그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난 그를 따라 다리를 꼰 채 소파 등받이에 한껏 등을 파묻었다.

그럴수록 그가 날 향해 몸을 숙였지만, 어디까지 해 볼 테면 해 보란 식으로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그러자 피식 김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정말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거야? 다 큰 성인 남녀 단둘이 한 방에 있는데 설명이 더 필요해?”

“그래, 몰라서 그래. 네가 나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넌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질 만한 계기가 없거든.”

내가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난리라도 쳤으면 모를까.

“직위도 뺏고 월렛도 뺏고. 네 모든 걸 뺏은 마당에 왜 그렇게 구는지. 차라리 네가 그렇게 굴다 내가 방심한 틈에 찻잔에 독이라도 탈 작정이었다면 이해가 가.”

내가 16번째 테라리움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파필리온은 평소처럼 행정 관리원 일을 해내며 잘 살았을 것이다.

내가 연금탑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가 몸담고 있던 조직에서 버려졌고, 살기 위해서 직위는 물론 모든 걸 내게 넘겨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테라리움에 상주하지 않는 날 대신해 보좌관이란 이름으로 열심히 부려 먹히고 있지.

솔직히 나라면 앙심을 품을 만도 한데. 날 이렇게 만든 건 다 너 때문이야! 이런 느낌으로 말야.

저 보기 좋은 반반한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허….”

내 말에 파필리온은 크게 실소를 내뱉었다.

“그대 찻잔에 독을 타면 뒷감당은? 그대의 길드원들이 날 가만히 둘까? 하물며 그대의 충성도 높은 테라리움 사람들은?”

그는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그대에게 복수한다고 잃은 게 다 되돌아오기라도 하나?”

“마음은 후련해지겠지.”

“아니, 애초에 왜 내가 그대에게 복수심을 가질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복수심은 내가 그대와 동등한 입장일 때나 가질 수 있는 거야. 내가 그대를 해한다고 해 봤자 얻는 게 없어. 납작 엎드린 채 잘 보이기 위해 꼬리라도 흔들어야 하지. 여태 내가 한 노력들은 역시나 헛수고였나 보군.”

뭐, 노력을 하기라도 했나? 숨 쉬듯이 나오는 개수작인 줄 알았지.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파필리온의 얼굴엔 허망함이 가득 차올랐다.

“난 그대를 원해.”

그러곤 마치 선포하는 것처럼 단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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