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이야기가 끝이 난 것인지, 퉁퉁 부은 눈을 한 에이레네와 디케가 함께 날 찾아왔다.
우리가 자리를 비켜 준 사이,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으나 필히 눈물이 가득한 이야기였으리라.
짐작 가는 주제가 있긴 했지만 섣불리 먼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과수원 직원 채용 시험 당시 자매가 큰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네, 말씀하세요. 이야기는 잘 하셨나요?”
“덕분에 편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둘은 목이 꽤 쉬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긴 목소리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자매에겐 위로 언니가 한 명 더 있었으나 둘에게서 귀와 눈을 빼앗아 간 참사 때, 그 사람은 물론 남은 가족 모두가 죽었다고 한다.
물론 에우노미아를 만나기 전까진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도저히 사람이 살아나올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아픈 마음으로 명복을 빌어 주며 살았는데….
죽었다고 생각한 첫째 언니가 기적같이 돌아왔다고 한다.
비록 당사자인 에우노미아는 과거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둘은 완전히 확신하는 눈치였다.
하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에 이름마저 똑같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나라도 그렇게 믿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잃어버린 기억을 돌리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언니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더없이 기쁠 따름이에요.”
휴가를 요청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려고 했다.
당분간 데이지2가 바빠지겠지만 직원도 많이 뽑아 놨으니 행정은 무리 없이 굴러갈 테고.
“여기 이걸….”
하지만 둘은 휴가를 요청하긴커녕 대뜸 내게 어떠한 장신구를 보여 주었다.
에우노미아에게 건네 보였던 것이었다.
새하얀 백금 베이스에 꽃처럼 촘촘히 돋아난 형태의 세공, 그 안에 푸른 타원형 보석이 달린 드롭형 귀걸이였다.
제법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긴 했으나 관리를 잘한 것인지 무척 화려했을 원본 형태가 무리 없이 상상이 갔다.
더구나 푸른 보석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도 대단해 보였는데, 아무리 못해도 상등품 이상의 태양의 보석이 분명했다.
푸른색 보석이면 아마도 ‘사파이어’려나?
“이건 저희 가족의 불행의 원인이자….”
그렇게 말하는 에이레네의 표정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젠 에우노미아에게서 우리를 떠올리게 만들어 줄 유일한 희망이에요. 우습지 않나요? 우릴 절망으로 밀어 넣었던 보석이 이젠 희망이라니…. 저흰 사고로 가족과 연관된 모든 물건을 잃고 이 귀걸이 하나만 남았답니다. 이게 마지막 남은 단서인 셈이에요.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다면….”
귀걸이의 정체는 자매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둘은 어렵사리 내게 귀걸이에 얽힌 비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한 가정이 파괴된 가슴 아픈 사연은 듣기 버거울 정도였다. 사파이어가 그런 사정을 갖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태양의 보석이 얻기 힘든 물건인 줄은 알았지만,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을 수준이라니.
테라리움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희귀한 보석.
어쩐지 보석이 가진 짙푸름이 마치 심연을 머금은 듯 소름 끼치도록 음울하게 느껴졌다.
“먼저 저희 어머니의 고향을 수소문해 보려고 해요. 본래 앞 번호 테라리움에서 사셨던 건 알지만 정확한 이야기는 해 주신 적 없거든요. 그동안 가족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젠 찾아야 할 때라고 다짐했어요. 저희가 가진 정보는 이 사파이어 귀걸이뿐이지만 워낙 희귀한 보석이니 어쩌면 예상보다 정보를 특정 짓기 쉬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보석의 가치가 문제였다.
둘이 가진 사파이어 귀걸이는 한눈에 봐도 상등품, 가뜩이나 사파이어 품귀 현상이 지속되는 현재라면 그들에게 안 좋게 접근하려는 이가 생길지도 몰랐다.
어쩌면 거짓된 정보를 팔고 등쳐먹을 수도 있겠지.
<테라리움 어드벤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냥 동화 같은 게임 배경이 아니었다.
“흠, 사파이어라…. 어라? 그러고 보니….”
사파이어 키워드에 관련된 대화를 언젠가 하지 않았었나?
분명 입수해 본 적 없는 보석임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키워드가 낯익었다.
“대대로 59번째 테라리움에서 진실의 사파이어를 세공하면서 살았으니까. 불 때문에 세계수가 힘을 잃기 전까지 59번째 테라리움엔 항상 9월 태양의 힘이 세계수의 가지에 맺혔다고 했어.”
생각해 보니 무려 이 희귀한 보석을 집안 대대로 세공해 왔다는 사람이 내 주위에 있었다.
도박으로 큰 빚을 진 루프가 허심탄회하게 집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은 훌훌 털어 버리고 개과천선했지만 그녀로 인해 뒤 번대 사람들이 얼마나 앞 번대 테라리움으로의 이주를 열망하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됐지.
희귀하다면 거쳐 간 사람도 적을 것이다. 대대로 내려온 귀걸이라고 했으니 더욱 그러하겠지.
운이 좋다면….
“멀리서 찾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정말 정보를 특정 짓기 쉬울 수도 있겠어요. 28번째 테라리움에 이 사파이어 귀걸이에 대해 알아볼 법한 분들이 계세요.”
루프의 가족은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이주를 끝내고 잘 정착한 상태였다.
그들은 주얼리 콘 보석상과 연계해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불멸의 다이아몬드 부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취급하던 사파이어와는 다르지만 같은 태양의 보석이라는 점에서 잘해 주겠지. 듣기론 의욕도 만만이고.
그러고 보니 본의 아니게 우리 테라리움도 과거 태양의 보석 생산지라는 공통점이 있었네.
“대대로 사파이어를 가공해 오던 집안이니 어쩌면 단번에 알아볼 수도 있고.”
내 말에 자매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그들이 줄곧 일하던 곳에 가족의 정보를 알려 줄 수 있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둘은 하루빨리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했다.
아마 말리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마차를 빌려 달려갈 기세였다.
자매가 자리를 떠나자 곧바로 에우노미아가 날 찾아왔다.
들어올 때부터 울상이었던 둘과 달리 에우노미아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방금 디케와 에이레네가 다녀간 거죠?”
오랜 대화에 성과가 있었는지 둘의 이름을 부르는 게 제법 친근했다.
다행이었다.
디케와 에이레네는 에우노미아를 자신들의 언니라 생각하고 상당히 절박하게 임했지만, 정작 에우노미아 쪽에서 거부 반응을 보인다면 난감할 것이다.
기억을 잃은 그녀에겐 둘은 생판 초면인 남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녀는 내가 먼저 권유하기도 전에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점점 내 옆으로 가까이 엉덩이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 모습에서 어쩐지 그녀에겐 현재 심적으로 의지할 곳이 절실하다는 걸 느꼈다.
“놀랐어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덤덤해 보였던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마치 하늘을 유영하는 새처럼 잔뜩 들떠 있었다.
“그래요. 제가 홀로 태어난 것도 아니니 분명 가족은 있을 테지요. 하지만 여태 포기하고 살았어요. 전 그들을 떠올릴 수 있는 어떠한 기억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면 제게 자매가 둘이나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얼마나 설레요.”
너무 들뜬 나머지 말끝이 하이 톤으로 샐 정도였다.
“정말일까요? 둘은 완전히 확신하고 있던데.”
“어쩌면 당신이 잃은 기억 속에 두 동생이 새겨져 있을 수도 있죠. 그리고 정황상…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해요.”
“전 사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봤어요. 제 처음 기억은 고아원이었어요. 어떤 드라이어드가 세운 고아원이래요. 참 뜬금없죠? 대체 어쩌다 그런 곳에 덜렁 남겨진 건지. 더구나 절 고아원에 데려다준 사람에 대한 정보도 없었어요. 어쨌든 기억을 찾기 위해 병원도 다녀 보고 최면 치료도 받아 봤어요.”
“차도가 없었나 보네요.”
“단 하나 얻긴 했어요. 제 이름. 솔직히 전 이게 제 이름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요. 누군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저에게 ‘에우노미아’라고 소리쳤기 때문에 그게 제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아니면 어떡하죠?”
한껏 들떴던 목소리가 금세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절 언니라고 불러 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제가 정말로 에우노미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스쳐 간 수많은 기억들 중 ‘에우노미아’란 이름은 가장 값지고 욕심나는 기억이에요. 제발 제가 그 에우노미아가 맞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무척 자신이 없어 보였다.
“세상에 저랑 닮은… 정말로 에우노미아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죠?”
“디케와 에이레네가 당신의 기억을 찾을 방법을 모색 중이에요. 자매가 살아생전 어머니와의 사이가 각별했어서 그분의 정보를 확보하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 말에 그녀는 다행이란 표정을 짓다가도 금세 다시 시무룩해졌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예상은 됐다.
그렇게 했는데도 기억을 못 찾거나 정말 가족이 아니라는 기억을 떠올릴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제 머릿속에 깊이 숨어 있을 기억을 끄집어낼 매개체가 필요하다 했어요. 그건 아주 사소한 계기가 될 수도, 무척 희귀한 순간이 될 수도 있다고 했죠. 그래서 전 그 열쇠를 찾기 위해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온갖 희귀한 경험은 다 해 봤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제 과거의 편린을 떠올릴 만한 순간은 없었어요. 만약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 해도….”
“벌써부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가진 기억이 갇힌 상자는 영원히 열리지 않는 게 아니라 맞는 열쇠를 아직까지 못 찾은 거라 생각해요.”
지쳐 보이는 그녀를 위해 객실에 구비된 차를 잔에 따라 주었다.
내온 지 시간이 흘러 많이 식었지만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은은한 허브 향은 여전했다.
“디케와 에이레네가 당신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말인데…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물론 둘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진 알아요. 덜컥 취직시켜 달란 이야기가 아니라….”
“2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 직원들을 위해 제공되는 숙소는 직원의 가족들도 이용 가능해요. 마음 놓고 쉬세요.”
“정말 고마워요! 보답이라고 하긴 뭐한데…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던 그녀는 갑자기 테이블 한쪽에 놓인 종이와 펜을 끌고 와 이것저것 적기 시작했다.
“청문회에서 느꼈어요. 당신은 제가 가진 정보가 필요하지 않나요? 그리고 이 정보가 큰 값어치를 할 것 같단 느낌도 받았어요. 제가 우연찮게 들어갔던 그 방… 사실 방문자는 당신이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에우노미아가 적는 정보는 놀라운 것이었다. 작성하는 정보들을 보면 그녀는 일부러 청문회에서 해당 정보를 숨긴 게 분명할 정도였다.
그녀가 종이에 적는 것은 어떠한 조직도였다.
비록 상당수의 글씨가 암호화되어 있지만 그건 인페르노의 내부 조직도란 확신이 들었다.
“시간만 주세요. 그럼 제가 그곳에서 본 모든 것들을 서류화시킬게요.”
자매는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아니면 역시 같은 핏줄이다, 이건가.
에우노미아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