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서서 아스키아 길드에 시들링을 뺏길 순 없는 노릇이니, 너무 늦어진다면 찾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형 길드에게 맞서는 게 과연 가망이 있나 싶었지만 1번째 테라리움 방문 이후로 담력이 상당히 세진 것 같다.
더구나 조금 전 낮은 거목이 내게 준 최고의 세 가지 선물로 한껏 고양되어 지금 당장이라도 5번째 테라리움에 쳐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진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에우노미아 쪽은 먼저 서로가 말을 트기 시작해야 내가 지켜보거나 끼어들 틈이 생길 텐데, 아직까지 제자리걸음이니 잠시 신경을 끄기로 했다. 이러다 오늘이 가기 전에 인사라도 나눌 수 있을까?
덜그럭.
내가 주머니에서 꺼낸 밤색 상자를 본 파필리온이 눈을 빛냈다.
“그게 받아 온 선물?”
“눈치하고는….”
빈 시간 동안 엘더를 놀리면 아주 유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상자를 열자 드러나는 광채에, 디저트에 파묻혀 있던 이리스와 제퍼는 물론 쉬고 있던 노토스와 헤르마까지 이곳을 힐끔거렸다.
파필리온이 목걸이를 향해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청문회 분위기는 꽤 좋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준 걸 보면 그건 또 아닌가 봐? 호의가 가득 담겨 있는데.”
호의의 기준이 반짝거리는 보석이니? 너도 엘더랑 비슷한 과구나.
“와, 그렇게 대단한 품질의 목걸이는 처음 봐요. 아무래도 반지보다 보석을 많이 사용하니 매물 자체도 많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이리스는 조금이라도 더 구경하고 싶은지 디저트들을 내팽개치고 슬금슬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스페셜 등급의 루비 목걸이. 7월의 드라이어드를 육성하는 드루이드라면 누구나 욕심낼 만한 아이템이었다.
더구나 굳이 전투 보너스와 맞지 않더라도 착용만으로도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 하지 않는가?
대기 시간 이후 나 홀로 참가한 청문회의 분위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확실히 두 번째 청문회는 이전과 반전된 분위기 속에서 잘 끝마쳤다. 낮은 거목이 내게 잔뜩 호의를 보여 준 일 역시 나와 내 드라이어드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 되겠지.
비록 낮은 거목의 독단적인 행동일 수도 있으나 내가 1번째 테라리움에 좋은 인상을 심어 줬단 사실을 굳이 아닌 척할 필욘 없었다.
난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이끄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행정 관리원이자 길드 마스터.
자신들의 상사가 인정받는 상사라는 걸 알게 된다면 존경심이 생겨나겠지.
여기저기 반목하고 다니는 상사보다 이편이 낫잖아?
그렇지 않아도 인페르노와 같은 대조직을 건드리고 다니는데 그보다 훨씬 큰 1번째 테라리움이 우호적이란 인식을 심어 주면 불안감이 많이 희석될 것이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한 일로 많은 공로를 인정받아서 얻게 된 보상이에요.”
내가 중심이 됐으니 유독 좋은 보상이 몰리긴 했지만, 구조대로 참가했던 이들에게도 1번째 테라리움이 범테라리움 대표이자 인도적인 차원에서 어느 정도 적절한 보상을 뿌렸다고 낮은 거목이 말했다.
그래 봤자 수고비 명목으로 다이아가 나갔겠지만.
나 역시도 날 구하기 위해 달려와 준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따로 보상을 전달할 예정이었다.
디케와 에이레네 그리고 파필리온이 테라리움으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보상과 관련된 업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목걸이 하나 툭 던져 주고 끝내는 게 더욱 기분 나쁜데요. 제이 님의 수고는 더 인정받아야만 해요.”
좀 전까지만 해도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이리스의 안색이 변했다.
“물론 이것 외에도 더 받았어요. 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리스의 날 향한 충성심은 가끔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 주는 게 고마우나, 한편으론 미안해졌다. 아직 많이 부족한 나인데.
여기저기 사고를 벌이고 다니는 길드 마스터 때문에 길드원들이 적잖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금융 치료뿐이지만, 꼭 어딜 내놔도 부끄러움 없는, 모자람 없는 길드 마스터가 되어야지.
“어떤 드라이어드에게 줄지는 정했나요?”
“보자마자 찜해 놓은 드라이어드가 있죠. 안 주면 울고불고 난리 칠걸요.”
“아… 혹시?”
이리스는 예상 반응만으로도 엘더인 것을 눈치챘다.
그때 아티팩트에서 불쑥 실새삼이 튀어나와 자연스레 내 무릎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래도 컸다고 무게가 좀 나가니 일순 허벅지가 저렸다.
“눈치 주니?”
“…….”
그래도 포기한 줄 알았는데 못내 아까운 모양이다.
“설마 저 드라이어드도 전투 보너스가 7월인가요?”
“웬 애를 데리고 있네. 못 보던 드라이어드인데?”
파필리온은 오늘 이 자리에서 실새삼을 처음 보긴 했다.
아마 실새삼이 아직까지 덜 자란 모습이었다면 내가 종일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됐을 텐데.
놀려 먹을 레퍼토리가 뻔히 보여서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쿡.
길고 잘 빠진 손가락이 아이의 말캉한 볼을 꾹 찔러 왔다.
방금 그 행동은 실새삼을 처음 봤기에 겁도 없이 행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작은 아이 모습이라곤 하나 이놈은 은둔자의 정원에서 엄청난 악명을 떨쳤던 드라이어드였다.
더구나 보이는 것처럼 진정 묘목이 아니라 속엔 꼰대 기질이 다분한 오래 묵은 고목을 보유 중인 녀석이었다.
퍽.
가느다란 줄기가 여러 다발 묶여 채찍의 형태를 한 것이 벼락처럼 파필리온을 후려갈겼다.
그 바람에 그는 허공에서 발이 뜬 채 멀리 내팽개쳐졌다.
실새삼은 엘더 못지않게 성깔도 있었다.
“윽… 무슨 저렇게 싹수 없는 묘목을….”
맞을 때 얼굴까지 같이 맞았는지, 파필리온은 뺨을 부여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근거렸다.
“무례하다.”
“이 얼굴이 어떤 얼굴인데. 무려 블랙 릴리의 그대가 첫눈에 반한 얼굴이라고.”
“흠흠, 반했다니…. 겉가죽이 내 타입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입을 열자마자 깼지.”
“내 드루이드는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저런 예의범절도 모르는 인간을 가까이 둬 봤자 이득 될 건 없다.”
“일은 그럭저럭 잘해.”
한 대 얻어맞아서일까, 파필리온은 거리를 둔 채 다가오지 않았다.
좀 더 어리석었다면 복수라며 제 드라이어드들을 꺼낼 법도 한데 그는 눈치가 빨랐다.
이리스는 속이 시원하단 표정으로 그 꼴을 즐겼다.
“어쨌든 그렇게 눈치 줘 봤자 넌 안 줘.”
“달라고 말은 안 했느니라….”
하지만 목걸이를 향해 힐긋힐긋 곁눈질하는 눈짓의 의미가 뻔했다.
“엘더.”
내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엘더가 아티팩트 밖으로 나왔다.
이리스는 역시나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아서일까, 막 나온 엘더의 표정은 불퉁했다.
“엘더. 이거 봐 봐.”
그래서인지 반짝이는 거라면 귀신같이 알아채는 그가 내가 들고 있는 목걸이 케이스를 발견하는 것이 늦었다.
아니, 알고 보니 실새삼이 내 무릎에 앉은 채로 어깨에 기대어 교묘하게 등 뒤로 케이스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별수 없이 케이스를 들어 엘더의 눈앞에 갖다 대자 실새삼의 눈에 아쉬움이 그득그득 들어찼다.
“와….”
엘더는 목걸이의 자태를 확인하고 굳어 버렸다.
살짝 벌린 입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고정된 시선으로 보아하니 영혼까지 탐욕에 사로잡혀 정신이 나가 버린 모양새였다.
“지혜의 루비래.”
“…….”
“네가 끼고 있는 반지랑 세트야.”
“…….”
“엘더, 숨은 쉬고 있어?”
선 채로 죽은 거 아냐?
케이스의 위치를 바꾸니 시선이 곧이곧대로 따라오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데.
“이거 누구 거게?”
“나.”
엘더의 반응이 어지간히 못마땅한지 실새삼이 툭 끼어들었다.
“진짜…. 진짜…. 쟤 줄 거야?”
실새삼의 칼 같은 반응에 울먹이는 엘더의 목소리가 심금을 울렸다.
어차피 주인은 정해져 있으니 실새삼이 부리는 건 심술이었지만 엘더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실새삼에게 정말 줄 예정이었다면 자신을 굳이 아티팩트 밖으로 부르지 않았을 건데도 말이다.
“그래, 내 거다.”
“애 놀리지 마. 너랑 사는 세월이 얼마나 차이 나는데.”
“왜…? 왜 내가 아니라 쟤야?”
엘더는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배반당한 비련의 주인공처럼 물기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실새삼이 얄밉긴 해도 솔직히… 재밌었다.
“아이고, 하필이면 전투 보너스가 겹쳐 버리네. 지혜의 루비에 걸맞은 드라이어드가 둘이나 있는데 어떡하지?”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실새삼이 깔아 놓은 판이 애초에 예정했던 놀림거리보다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맑게 젖은 예쁜 눈을 보니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엘더의 화려한 얼굴이 처량해지는 걸 보면 가슴 아팠지만… 눈 호강은 톡톡히 한단 말이지.
피로까지 정화될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의 미모였다.
“내가 네 첫 드라이어드잖아. 저게 아니라.”
“저거라니. 말조심하거라. 정말이지, 요즘 것들은 말버릇이 없어서, 원.”
“네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이어드는 내가 아니었어?”
갑자기 이렇게 흘러간다고?
그 물음에 흠칫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자 엘더가 더욱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아니 좋아하는 영역이 다 다르지. 난 내 드라이어드 전부를 좋아하는걸. 굳이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만 놀릴까?
“쯧쯧, 저런 어리광만 부리는 드라이어드에게 정녕 그런 귀한 보석을 넘길 것이냐? 내게 걸맞다니까?”
“이쯤 되니까 네가 하는 게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진심인지 알 수가 없네. 너 포기 못 한 거 맞지?”
실새삼이 아직까지 목걸이에 미련이 철철 넘쳐서인지, 건드려 보니 화드득 타오르는 엘더의 반응에 재미가 들려 버린 건지 긴가민가했다.
“제이 님, 저러다 울겠어요.”
이리스의 목소리에도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어느 정도 진심을 내포하고 있었다.
엘더는 정말 내가 실새삼에게 목걸이를 가져다 대기만 해도 눈물을 터뜨리며 주저앉아 버릴 것처럼 보였다.
할 수 없이 실새삼을 바닥에 내려두고 케이스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큰 엘더를 향해 손을 뻗어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빛이 나는 얼굴에 반짝이는 목걸이까지 더해지니 예술품이 따로 없었다.
새하얀 그의 위로 걸린 새빨간 목걸이는 대조적인 색깔만으로도 눈에 확 띄었다.
백지 위에 덩그러니 그려진 붉은 장미꽃처럼 시선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와… 진짜 잘 어울린다. 예뻐. 내가 설마 다른 드라이어드에게 주겠니? 이 목걸이 얻자마자 우리 엘더 먼저 생각났는데?”
그러자 와락 커다란 품에 단숨에 끌려갔다.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가득 풍기는 달콤한 향 내음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고마워….”
엘더는 정말 기뻐 보였다.
살짝 떨어진 품에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실새삼을 향해 오만이 가득한 승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