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니까 지능 스탯이 어울린다는 편견도 있었지만….
엘더는 탐욕을 버리고 좀 지혜롭게 굴 필요가 있지. 지혜의 빛이 앞날을 밝혀 준다잖아?
물론 좀 더 숭고하고 거룩한 의미의 염원인 건 알고 있지만….
“선물 정말 감사해요….”
벌써 한 개의 선물만으로도 그간의 노력이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생고생을 하며 얻은 것도 많았지만, 원래 게이머란 퀘스트 끝에 확정적으로 따라오는 실질적 보상에 길들여져 있는 법이다.
그런데 아직도 두 개나 더 남았다? 이 맛에 퀘스트를 깨는 거다.
다음 선물은 뭘까? 현재를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선물?
꿀을 앞에 둔 벌 같은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낮은 거목이 지체 없이 다음 선물을 내게 건네주었다.
작은 수첩 크기의 얇고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석판이었다.
“이게 뭔가요?”
석판을 이리저리 살피니 아무런 무늬 없이 평평하기만 할 뿐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단순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도통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만든 이가 말하길 메모리 스톤이라 하더군요. 재료는 이곳 테라리움의 과수원 온실의 석판 조각이 사용됐답니다. 재료가 재료다 보니 완성본이라곤 몇 개 되지 않지요.”
온실의 석판이라면 드라이어드 포트 옆의 거대한 석판을 말했다.
포트에 드라이어드 열매를 두면 해당 열매에서 개화하게 될 드라이어드의 정보를 읽어 주는 석판이었다.
“그 메모리 스톤엔 여태까지 1번째 테라리움에서 개화했던 드라이어드들의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드라이어드들의 정보요…?”
“현명한 드루이드가 되기 위한 소양 중엔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되는 식물들을 많이 공부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세상에 나와 있는 수만 가지 식물들의 정보를 모두 공부하는 것은 시간상으로 무리겠지요. 아마 그 메모리 스톤이 도움이 될 겁니다. 수십 권의 책을 들고 다니며 일일이 펼쳐보는 것보단 시간을 훨씬 절약해 줄 겁니다.”
외장 하드…? 설마 하는 마음에 석판 위에 핸드폰을 올리니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이 켜졌다.
핸드폰에 이걸 갖다 대서 정보를 읽는 방식인가 본데.
“그러니까… 이것만 있으면 제가 찾고자 하는 드라이어드의 정보를 다 알 수 있다는 건가요?”
너무 놀라워서 말이 떨렸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는 아닙니다. 1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드라이어드를 개화시켜 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다른 테라리움보단 많을 겁니다. 개화 이력이 있는 드라이어드라면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이건 말 그대로 현재의 내게 가장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드라이어드 백과사전!
여태 여행하며 수많은 드라이어드를 만났지만 정보를 몰라서 애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박식한 이리스나 시들링이 곁에 있다면 도움을 받겠지만, 그들이라고 항상 모든 드라이어드의 정보를 아는 건 아니었고 또한 매번 같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날 잡고 수험생 시절로 돌아가 식물들에 대한 정보를 달달 외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런 사기 템이 내 손에 들어올 줄이야.
“좀 살펴봐도 될까요?’
만약 사용법이 어렵다면 곁에 낮은 거목이 있을 때 사용해서 물어보는 것이 나았다.
그에게 양해를 구하니 편할 대로 하라며 이해해 주었다.
메모리 스톤을 장착하자 실행할 수 있는 창이 <무한 다이아>나 테라리움 관리 모드 등을 제외하고 하나 더 생겼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실행하면 핸드폰 화면에 온실의 석판 모습이 가득 찼다.
포트가 있어야 할 곳엔 검색창이 존재했는데, 아무래도 갖다 대기만 해도 정보를 읽어 주는 완전 사기적인 기능은 없는 듯했다.
시험 삼아 벨벳 메스키트를 입력했는데…. 정보가 없었다.
뭐, 세상에 나와 있는 벨벳 메스키트가 그녀 하나뿐이라고 했으니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 후로도 데이지나 민들레처럼 비교적 뽑을 확률이 높은 이름을 입력하니 곧바로 정보가 나타났다.
적어도 이름만 알아낸다면 기록을 훤히 읽어 낼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모를 경우를 대비해, 알고 있는 힌트로 유추해 볼 수 있나 실험도 해 보았다.
노멀 필드, 전투 보너스 8월, 회복형 등등 키워드를 열거해서 입력하니 놀랍게도 교집합을 갖는 드라이어드의 정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기쁨에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이제 적어도 빡대가리 공제희는 이곳에 없었다.
비록 검색을 해야 된다는 수고가 필요했지만 몇 초만 소비하면 정보가 줄줄 나왔다.
사람은 이래서 정보화 사회에서 살아야 돼.
“이 선물도 정말 감사해요. 딱 제가 필요로 하던 물건이었어요.”
어떻게 사람 마음을 이렇게 귀신처럼 알아맞히는지. 그에 대한 호감도가 미친 듯이 상승했다.
마치 다이아를 받은 엘더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세 번째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당연하죠!”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미래를 기원하는 선물.
분위기상 앞서 받은 두 개의 선물과 동등하게 귀한 선물이 될 것 같은데 대체 뭘까?
“이건 제한 구역 입장 허가증입니다.”
의외로 낮은 거목이 건넨 마지막 선물은 종이 한 장이었다.
“허가증이요?”
“1번째 테라리움이 관리하는 스노우 필드에 이 허가증만 있다면 마음대로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포인세티아의 본체가 숨어 있다는 곳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약 다른 스노우 필드에도 가실 거라면 그곳을 관리하는 테라리움으로부터 허가증을 또 발급 받으셔야 합니다.”
알고 보니 스노우 필드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불의 침입으로 인해 면적이 줄어든 스노우 필드는 보호를 위해 인접한 테라리움이 엄중히 관리 중이었다.
아마 드라이어드 열매를 통해 얻는 방법을 제외하곤, 접근이 제한되는 스노우 필드에서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를 만나는 건 아주 힘든 일일 테니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는 아주 얻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 좋게 테라리움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스노우 필드를 발견하게 된다면 모를까.
“이걸 주시는 게… 제 미래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으셔야죠. 설마 스노우 필드를 빼먹으실 심산이셨습니까?”
그의 웃음기 섞인 말에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는 것도 좋지만 반쯤 포기 상태였던 선물을 받는 건 더욱 기뻤다.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는 아직 주인이 없는 건가요? 전 당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는 드라이어드다 보니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지 못했지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인세티아가 여태껏 절 따라다닌 이유는, 단순히 제가 옛날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법 좋아하거든요.”
포인세티아에게 아직 주인이 없다는 건 내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두루두루 애정을 나눠 주는 타입이라고 하니 꽤 까다롭겠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나 역시 선택받지 못하는 거 아냐?
특수하게 가디언이 된 드라이어드답게 획득 방법도 참 특별했다.
“꼭꼭 숨어 있을 겁니다.”
허가증을 받아 드는 날 보며 낮은 거목이 당부했다.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 드라이어드다 보니 따라가지 않으려 꼭꼭 숨어 있을 거예요. 드루이드를 선택한다는 건 결국 미뤘던 직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지요. 이제까지 해 왔던 것처럼 마음대로 뛰놀던 생활에 제약이 생기니 반기지 않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선물을 세 개 받은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포인세티아를 바라봤다.
난데없는 숨바꼭질을 해야 된단 말이지? 내가 술래고.
“포인세티아와 함께하시면 앞으로 많은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당장 그녀의 분신 능력만 해도 상당히 유용해 보였다.
이 세상에 연락 수단이라고는 벌과 편지가 전부라 상당히 번거로웠는데, 여기저기 깃들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포인세티아가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물론 그것도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를 얻는데 성공했을 때의 일이지만.
난 낮은 거목에게 받은 세 가지 선물로 풍요로워진 주머니를 매만지며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숨뭄데이, 만세! 세 가지 선물을 주는 관습을 만든 사람들도 만세!
하지만 행복한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여기까지였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
“청문회 결과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요?”
1번째 테라리움에서 마련해 준 여관에서 쉬며 낮은 거목에게 들은 정보를 되새겨 보았다.
회장을 마지막으로 낮은 거목과 헤어지면 이제 다시 그와 만나긴 아주 어려울 거라고 했다.
짐작은 했지만 본래 그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끝까지 낮은 거목의 정확한 신분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엄청난 선물을 턱턱 안겨 줄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벌도 내릴 수 있는 존재란 걸 뜻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엔 이미 사람들이 파견됐고, 인페르노에 대한 공문은 오늘 저녁부터 곧바로 전 테라리움에 발효되며 이단 감찰단이 이 건을 도맡을 거라고 했던가.”
만약 내 쪽에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단 감찰단과 연계하여 일할 수 있도록 조정이 되어 있다곤 하지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 보이네. 뭐 대단한 거라도 받았어?”
세 가지 선물의 여파로 아직까지 활짝 펴 있는 내 얼굴을 보며 파필리온이 슬쩍 물었다.
하는 짓이 꼭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 같아서 무시했다.
“에우노미아는 어때?”
“부탁한 대로 그대의 두 보좌관과 함께 있도록 유도하긴 했는데….”
난 멀리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에우노미아와 함께 맞은편에 앉아 눈짓만 주고받는 디케와 에이레네가 있었다.
저 셋의 이야기는 또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시들링과 로웰라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묻는 게 늦었네요.”
그새 1번째 테라리움을 실컷 관광하고 온 건지 온갖 디저트 박스가 쌓여 있는 곳 위로 불쑥 이리스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아… 로웰라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제이 님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 중이고….”
로웰라는 여전히 내 미끼역할을 하고 있었나 보다.
“시들링은… 아스키아와의 일을 해결하러 그 길드의 본진이 있는 5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했어요.”
“수배 내린 길드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거면 큰일 난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28번째 테라리움은 지금까지 아스키아 길드에 포위되어 있을 걸요. 결국 자기가 원인이니 끝을 보겠다고 간 거라 말릴 수도 없고. 그런데 그렇게까지 걱정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제 착각일 수도 있지만…. 길드 부마스터가 모셔 가던데요?”
모셔 갔다고? 그쪽의 이야기도 어떻게 흘러갈지 참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