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7화 (367/604)

“용케 이곳에 포인세티아의 모체, 즉 본체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셨군요.”

“솔직히… 그 질문부터 이상했어요. 보통 드라이어드들에게 모체의 위치는 크게 중요치 않잖아요.”

난 모체에 세계수의 축복과 영혼이 깃들어 형상화한 것이 드라이어드라고 생각했다.

즉, 모체는 드라이어드의 선조, 가치관 등을 포괄한 좀 더 범용적인 단어다. 또한 모체는 드라이어드는 항상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엘더가 제 손으로 땅에 자신의 꽃나무를 피워 낼지언정, 엘더 플라워 꽃나무가 있는 곳에 엘더 드라이어드가 묶여 있다고 보지 않는 것과 같았다.

“포인세티아는 좀… 특별한 필드의 가디언인가 보네요?”

“네, 그렇습니다. 저 드라이어드는… 그대와 함께하는 두 그루의 가디언과는 다르기에 대하는 게 어려우실 수도 있겠군요.”

낮은 거목은 머리 위로 눈을 뿌리는 포인세티아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나도 그녀를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동화 속 요정 같은 드라이어드였다.

“포인세티아는 인간을 정말 좋아합니다. 물론 그런 드라이어드가 한둘이 아니니 특별할 것도 없지만.”

드라이어드들에게 인간인 드루이드는 특별하지.

“포인세티아는 어느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인간을 사랑합니다.”

인류애가 지극한 꽃이라니.

“전해지는 바론, 모든 필드를 통틀어 스노우 필드는 가디언의 자리가 오랜 시간 동안 공석이었습니다. 가장 늦게 가디언이 생긴 필드지요.”

“배울 게 한참 많은 녀석이야.”

낮은 거목의 말에 실새삼이 툭 끼어들었다.

그의 태도는 꼭 새내기를 대하는 꼰대 기질이 다분한 오래 묵은 고학번 같았다.

낮은 거목은 날 천천히 회장 안으로 인도했다.

넓은 공간 속 기쁨을 가득 담은 알록달록한 장식들을 눈에 담으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자생 필드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답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엘더가 말하길, 자생 필드가 노멀 필드인 드라이어드가 상대적으로 수가 많다고 했었다. 데저트 필드와 바이오 필드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많다고 했지.

그리고 노멀(normal)은 말 그대로 특출나지 않은 필드 대부분을 통틀어 아우를 수 있는 단어기도 했다.

“아마도 노멀 필드겠죠?”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먼 옛날, 스노우 필드가 압도적으로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요?”

대부분의 지형을 통칭하는 노멀 필드나 사막인 데저트 필드보다 더?

“현시대를 살아가는 저로서는 그 사실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으나 간간이 사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긴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불이 침입하기 전.”

그때는 드루이드들보다 더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베스탈리스들도 핍박받지 않던 아주 오래전을 말하는 거겠지.

“100번에 가까운 테라리움들의 일대가 새하얀 눈으로 가득한 스노우 필드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불에 괴멸하여 지도상에 X 표시로만 겨우 존재하는 지역들. 그 수많은 지역들이 알고 보니 스노우 필드였다니.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빠져나오며 목격했던 사막들이 떠올랐다.

불에 타 버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무의 대지.

물론 그곳은 또 다른 자생 필드의 영역이었을 수도 있으나, 먼 옛날 그토록 넓은 지역에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불이 침입하며 쌓인 눈을 녹이고 더 나아가 수많은 생명들의 터전을 태워 버렸지요. 삶의 터전을 잃은 것은 아주 큰일이긴 하나 그 바람에 눈 속에 파묻혀 잠들어 있던 병해충과 역병들이 깨어나 테라리움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답니다.”

병해충이라고 하니 내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백목마름병해충이 떠올랐다.

혹시 그것도 스노우 필드의 눈이 녹으며 깨어난 건 아닐까?

“그렇기에 먼 옛날의 현인들이 말하길, 스노우 필드는 어쩌면 세계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만악(萬惡)들을 세상의 끝으로 몰아 잠재워 둔 감옥과 같은 곳이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필드에선 할 수 없는 일을 스노우 필드가 도맡아 해 주고 있던 것이지요.”

새하얀 눈이 가득한 스노우 필드. 순백은 순결과 결백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알고 보니 그 속엔 시꺼먼 만악들이 잠재워져 있다라….

“차가운 눈밭과 부족한 햇빛 그리고 생명들이 꺼리는 만악들을 깊이 숨겨둔 곳. 그곳에 피어나 자리를 지키는 꽃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를 악착같이 두드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스노우 필드에 오랫동안 가디언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환경 탓에 꽃들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자신을 생각하는 데 급급하여 모두를 아울러 수호할 수 있는 가디언이 나오지 않았다.

“쯧쯧….”

잊을 만하면 실새삼이 툭 끼어들며 흉을 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실새삼도 만만찮게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은둔자의 정원에서의 실새삼을 생각하면,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원치 않아도 멋대로 기생하여 능력을 쪽쪽 빨아먹고 사용했잖아? 쟤도 이기주의의 끝판왕이라고.

“그럼 포인세티아는 언제부터 필드의 가디언이 된 걸까요?”

“필드의 가디언 자리가 오래 공석이 되면 필드의 규율 수호에도 문제가 되지만, 그 필드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게 문제가 따릅니다.”

필드의 규율이란 말이 어렵긴 해도 쉽게 풀자면 자연의 올바른 순환이었다.

이곳은 현신(現身)한 신인 세계수가 존재하는 세계. 그 세계수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돌보는 세계였다.

드라이어드는 세계수의 종으로 세계수의 힘이 미처 닿지 않는 곳까지 나아가 축복을 실현시켜 주는 일을 했다.

“세상의 모든 필드가 자연이 순환할 수 있도록 규율을 지키고 있습니다. 드라이어드는 필드의 한 자리를 빌린 만큼 그 필드의 자연이 정상적으로 순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임무가 있습니다.”

자연이 올바르게 순환되지 않는다는 건 생명이 죽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일련의 고리가 끊긴 것과 같았다.

“식물은 생태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단단한 지반이 되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뒤틀려 버린 공간에 갇혀 세상 밖에 나올 수 없었던 인삼 드라이어드들이 떠올랐다.

세상의 어느 한편에선, 인삼 드라이어드들이 갇혀 버림으로써 마땅히 지켜 주었어야 할 필드의 규율이 일그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인삼을 먹고 사는, 인삼과 상생하는 생물들은 본래 뻗어 나가야 할 지역까지 뻗어 나가지 못했겠지. 그래서 생명들에게도 문제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세계수에게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필드의 수호자를 내려 달라고. 만약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생긴다면 과수원의 세계수의 가지에 그 가디언의 꽃을 피워 신호를 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필드의 가디언이란 존재가 그렇게 보편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비교적 소수의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필드의 가디언. 하지만 고대에는 달랐나 보다.

“처음엔 세계수께서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 중 후보를 뽑으려 했으나 달리 나서는 이들이 없었고.”

이기적인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은 자신들이 사는 데 급급하여 모두 자리를 마다했다.

“사람들은 드라이어드들을 달래기 위해 화려한 축제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12월, 굳이 스노우 필드가 아니더라도 이 달은 대부분의 필드에 태양의 힘이 약해져 상당수의 식물들과 드라이어드들이 힘을 잃는 달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12개의 달 중 가장 마지막에 오는 달이다 보니 ‘끝’을 상징하기에 인식이 좋지 않았지요.”

모든 드라이어드들은 개화 시기에 맞춰 특정 달에 전투 보너스를 받는다.

특히나 데이지와 메스키트가 공동으로 보너스를 받는 4월을 포함하여, 태양의 힘이 적절하게 작용하는 3~5월은 상당수 드라이어드들의 개화 시기가 몰리는 달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8월인 바곳과 실새삼을 마지막으로 후반 달의 전투 보너스를 받는 드라이어드를 얻은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뒤로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겠지.

달이 다르더라도 태양의 힘이 담긴 보석을 액세서리로 착용해 부족함을 메꾸기도 하지만 전투 보너스 달이 몰리는 보석은 수요도 그만큼 높을 것이다.

“12월은 좋지 않다는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축제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수의 마지막 태양 기념일인 ‘숨뭄데이’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대신하여 이곳은 그런 기원을 갖는 비슷한 기념일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필드의 가디언은 그 축제에 반응한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맡게 된 건가요?”

“조금 다릅니다….”

낮은 거목은 다시금 포인세티아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끝내 스노우 필드에선 가디언 후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이상했다. 저기 눈앞에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있지 않은가?

“포인세티아는 본래 다른 자생 필드의 드라이어드였습니다. 스노우 필드가 아닌 트로피컬 필드의 드라이어드지요.”

세상에!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 역할을 트로피컬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황당함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혹시 포인세티아가 인간들을 좋아하는 것과 가디언이 된 이유가 관련이 있나요?”

내 말에 낮은 거목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인세티아의 신화도 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달래기 위해 축제를 열었으나 정작 트로피컬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축제에 큰 반응을 보였지요. 해마다 자생 필드를 떠나 축제를 구경하러 갈 정도로 말입니다. 어떤 포인세티아들은 아예 그곳에서 눌러살기도 했나 봅니다만…. 아마 그곳의 사람들은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만큼이나 포인세티아를 자주 봤겠지요.”

축제가 열리면 사람인 척 그 틈에 끼어들어 축제를 즐기는 요정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담긴 동화가 떠올랐다.

“오랜 기간 동안 축제를 반복해도 필드의 수호자가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낙담하기 시작했고, 축제도 그만큼 시들해졌습니다. 그러자 그걸 두고 볼 수 없었던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들이 꾀를 냈습니다. 자신들의 꽃을 몰래 세계수의 가지에 장식해 둔 것이지요. 본래 포인세티아는 12월에 꽃을 피우나 본인들이 살던 환경과 다른 곳에서 꽃을 피우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해냈지요. 어쨌든 그것을 본 사람들은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나타났다고 기뻐했습니다.”

사기를 치다니….

“하지만 어쨌든 그건 맞지 않는 일이지요. 그래서 포인세티아는 세계수에게 간청했습니다.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되게 해 달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12월에 반드시 꽃을 피울 테니 스노우 필드를 상징하는 꽃이 되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포인세티아는 되찾은 사람들의 활기를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류애가 넘쳐나는 꽃이 한 특별한 선택.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포인세티아가 지켜야 할 트로피컬 필드의 규율에 소홀해지게 됩니다.”

하나 포인세티아는 스노우 필드가 아닌 트로피컬 필드에서 태어나 그곳의 필드의 규율을 지켜야 하는 꽃.

“그래서 단 하나, 단 한 송이의 포인세티아만이 스노우 필드에 남고 다른 이들은 트로피컬 필드로 돌아가 마저 필드의 규율을 수행할 테니, 부디 청을 들어 달라 했지요.”

그렇게 포인세티아는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되었다.

사는 곳이 달라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12월에 꽃을 피워 내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는 꽃.

“포인세티아의 꽃말은 축복입니다. 어쩌면 이 신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꽃말일 수도 있겠군요.”

난 회장을 뛰노는 요정 같은 포인세티아를 바라봤다.

그녀를 제외한 포인세티아의 자생 필드는 트로피컬 필드로 기록될 테지만,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된 그녀만큼은 스노우 필드라고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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