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건물은 외부에서 올려다볼 때도 느낀 거지만 상당히 컸다.
우린 건물 안을 한참 걸었다. 어느 구간부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확연히 줄었고 느낌만으로도 관계자들 외에 이용할 수 없는 구역이란 게 확 와닿았다.
“1번째 테라리움은 모든 건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답니다. 이 건물 어딘가엔 과수원으로 바로 갈 수 있는 통로의 문이 있지요. 뻗어 나간 여러 개의 가지가 결국은 하나의 나무를 통해 모두 연결된다는 점을 표방하는 거랍니다.”
“어… 그건 엄청 중요한 비밀 아니에요? 외부인인 저에게 그런 걸 막 알려 주셔도 되나요?”
모든 건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1번째 테라리움에 대해 좋지 못한 사상을 가진 이에게 들어가면 아주 위험한 정보였다.
어느 한 곳의 보안을 뚫으면 다른 곳의 보안도 뚫을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또한 연결된 통로에 숨어 있다면 색적도 힘들 터였다.
“당연히 안 되지요.”
그럼 왜 알려 줘! 이거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일 나는 거 아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그러니 넌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 아냐?
“그만큼 1번째 테라리움은 세계수를 위해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고 계시는 그대를 귀히 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1번째 테라리움은 세계수와 한 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낮은 거목의 말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의 말이 곧 1번째 테라리움의 전체를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 제가 다른 극비도 알려 달라고 하면 알려 주실 건가요?”
이건 장난이었다. 그런데….
“당연하죠. 어떤 정보를 원하십니까? 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신상을 넘겨드릴까요?”
“아뇨, 당연히 그냥 해 본 말이죠. 그런다고 바로 알려 준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물론 2개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입장에서 테라리움의 정점이라는 1번째 테라리움의 영업 비밀을 알게 되면 유용하긴 하겠지만, 막상 알게 되면 명이 짧아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사람이 감당 못 할 비밀을 알게 되면 불안함에 잠도 못 자는 법이다.
그런데… 이곳 행정 관리원의 신상이 비밀이라고?
낮은 거목의 말에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 역시 그냥 해 본 말일까? 테라리움의 대표가 되는 행정 관리원의 신상이 비밀이라니.
그렇다면 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한 번도 대외적으로 노출된 적이 없다는 건가?
하긴, 월렛으로 자신보다 번호가 뒤인 행정 관리원의 정보는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정하고 숨긴다면 1번째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긴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낮은 거목이 이 테라리움의 대표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그가 행정 관리원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는 행정 관리원보다 더 높은 존재인 걸까? 테라리움에서 행정 관리원보다 높은 직위가 존재하긴 해?
차라리 1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모든 신경을 끊자.
방문하자마자 내 온갖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었지만, 애초에 난 1번째 테라리움을 이토록 빨리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 모험의 방향은 뒤 번대 테라리움에 치중되어 있긴 했다.
더 다이내믹하고 스페셜한 모험이 뒤 번대 테라리움에 몰려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뒤 번대로 갈수록 세계수 가지의 축복의 힘이 약해져 위험했다. 앞 번대보다 불의 개체 수가 월등히 많았고 크기 역시 남달랐다.
또한 불을 제외하고도 각종 위험이 들끓는 곳이니, 마치 레벨 업에 따라 더 높은 사냥터를 찾아가듯 본능적으로 뒤 번대 테라리움 방향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범인들은 그만큼 엄두도 못 내는 곳이니 덜 개척되었다는 느낌이 강하잖아?
이리스 파티가 아무렇지도 않게 뒤 번대 테라리움에서 겪은 모험담을 털어놓을 때면 심장이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드라이어드는 물론 드루이드의 레벨도 올려야 하고 장비도 제대로 갖춰야 하며 만발의 준비를 해야만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곳, 그렇기에 그만큼 모험심을 자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 성장의 척도를 직관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
1번째 테라리움은 애초에 대도시란 느낌이 너무 강해서 적당히 하드 콘텐츠를 즐기다 휴식 겸 찾아가려고 은연중에 생각했단 말이지….
그런데 이렇게 예기치 않게 방문하다 보니 내 마음은 아직까지 이곳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예정에서 한참 뒤틀린 행보는 짜릿함보다 불안함을 야기했다.
낮은 거목이 안내한 곳은 어떠한 회장이었다.
청문회장만큼 넓은 그곳은 문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으나 미로처럼 얽힌 복도가 그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즉, 길을 알지 않는 이상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란 뜻이었다.
“크리스마스?”
그곳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 바로 크리스마스였다.
회장을 꾸민 장식들이 12월의 큰 연휴에나 볼 법한 화려한 장식들이었기 때문이다.
리본을 휘감은 리스, 색색의 갈런드, 주홍빛으로 빛나는 작은 조명들, 화려하게 빛나는 오너먼트들, 붉은색과 녹색, 흰색이 어우러진 테마들….
모든 것들이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테라리움 어드벤처 세계관에 크리스마스는 어울리지 않지 않나?
이곳의 신은 오직 세계수가 유일하니 다른 종교의 기념일은 게임 외적인 이벤트를 진행할 때나 허용 가능한 범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게 정녕 크리스마스 장식이라면 신성 모독이지.
회장에 도착하자 포인세티아가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요정처럼 폴짝 뛰어다녔다.
그러고 보니 포인세티아는 트리 다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식물이었다.
12월에 꽃을 피우는 특성 때문에 상징성을 갖게 됐다고 하던가.
하지만 정작 장식에선 붉은 잎사귀가 꽃잎처럼 아름다운 데다 그 색상이 갖는 상징성이 더 부각됐다.
이건 아르바이트를 할 때 점장님의 강요에 가까운 부탁으로 매장 장식품을 찾다 알게 됐지.
“저 천박한 몸놀림 좀 봐.”
실새삼이 놓치지 않고 포인세티아를 흉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인세티아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한 회장에서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곳저곳 활보했다.
“포인세티아는 눈치채셨겠지만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입니다.”
낮은 거목이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포인세티아 자기 홀로 벌이는 축제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네…. 그런데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제가 10그루의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아야 하는데….”
저 드라이어드, 주인이 있는 게 맞지요? 그럼 제 메인 퀘스트는 어떻게 되나요?
그런데 낮은 거목은 딱히 자신이 그녀의 주인이라는 점을 피력하지 않았다.
“이곳에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의 모체가 있습니다.”
“음?”
“그 모체를 찾으신다면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을 세 가지 드리겠습니다.”
“선물이요?”
“세계수의 마지막 태양 기념일 ‘숨뭄데이’는 모든 이들이 세 가지의 선물을 받는 날이지요. 조금 이르지만 그대에게 미리 선물을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세계수의 마지막 태양 기념일이라…. 크리스마스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세계수에 맞춰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보내는구나.
그런 기념일이 존재한단 사실은 처음 알았지만,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선물을 준다는데 왜 거절하겠어? 내겐 낮은 거목의 제안이 퀘스트 보상처럼 다가와서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단, 그 드라이어드는 잠시 빠지는 게 좋겠군요.”
낮은 거목은 뒷짐 진 채 포인세티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실새삼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실새삼은 포인세티아에게 본체는 어디에 있냐는 말을 했었다.
그렇다는 건, 그는 이미 포인세티아의 본질을 알아봤다는 건데.
만약 지금 낮은 거목의 제안이 내게 내린 시험이라면 실새삼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맞았다.
“쉽잖아. 내 드루이드는 굳이 내 도움 없어도 저런 싸구려 겉모습 따위 간파할 것이다.”
실새삼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니… 난 모르는데.
애초에 도움을 줄 생각 따위 없었다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실새삼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반드시 내가 찾아야만 하잖아.
난 작은 요정처럼 뛰노는 포인세티아를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리만큼 존재감이 미약했던 드라이어드.
땅에 내려앉는 충격만으로도 모습이 일그러진 것을 보면 여태 봐왔던 그녀는 본체가 아닌 환영임이 분명했다.
모체를 찾으라고 한 이유는 뭘까?
난 회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포인세티아 화분과 오너먼트를 바라봤다. 바닥과 벽을 빼곡히 수놓은 예쁜 붉은 잎들.
저 중에 진짜 포인세티아의 모체가 있다는 건가? 왜 그런 수수께끼를 낸 걸까?
본체가 아닌 환영으로 우릴 맞이한 포인세티아. 그렇다면 그건 그녀의 특수 능력이겠지. 분신을 만들어 내는 능력인 걸까?
모체를 찾으라는 걸 보면… 분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특정 조건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게임에서 분신은 원래 본체의 능력치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뭔가 페널티가 존재할 게 분명했다.
난 회장 안으로 거침없이 걸어가 포인세티아 화분에 손을 뻗었다. 낮은 거목은 딱히 제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
촉감이 남달랐다. 이건… 모조품이었다. 진짜 식물이 아니라 조화였다.
혹시나 해서 다른 포인세티아도 만져 봤다. 그런데 이번엔 또 생화였다.
내가 단순했다면 생화인 이 화분을 골랐겠지만….
나는 침착하게 내가 여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언제까지 인간들의 틈에 붙어살며 본분을 잊고 지낼 것이냐.”
낮은 거목이 포인세티아를 질책하며 했던 말. 그리고 실새삼의 반응.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장식들.
내 지식에 의하면 포인세티아는 12월에 개화한다는 특징으로 대중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됐다.
상징…?
“이곳에 포인세티아의 모체는 없네요.”
여태껏 내가 만난 드라이어드들은 이 ‘상징’이 특성에 크게 반영됐다. 모티브 말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따라 히아신스가 남성인 드루이드에게 호감도가 낮다거나 민들레가 세상이 홍수로 잠겼을 때 홀씨를 날려 마른 땅을 찾은 신화에 의해 신의 계시라는 특성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상징성’이 포인세티아의 특성에 작용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크리스마스의 대표적인 식물 장식은 구상나무로 만든 트리였으나 이 회장에 트리는 보이지 않았다.
회장을 가득 채운 것은 포인세티아 장식이었다.
단순히 12월이 개화 시기라는 것만으로 세계수의 마지막 태양 기념일의 대표 꽃이 되진 않을 테고, 어떠한 이유가 있겠지. 대표인 만큼 스노우 필드의 어떠한 특성을 내세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메스키트처럼 사막의 물을 찾아 굳게 뿌리를 내리는 특성이라든가 주변의 모든 식물을 고사시키면서까지 기생을 멈추지 않는 실새삼의 특성처럼 말이다.
그녀의 능력이 분신이란 허상을 만들어 내는 것과 연관 지어 본다면…. 그녀가 포인세티아가 가득한 회장에 들어서도 여전히 분신의 형태를 유지한 걸 보면…. 이곳에 그녀의 본체는 없다.
내 답변에 낮은 거목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