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5화 (365/604)

“본체는 어디에 두고 그런 괴상망측한 꼴이더냐?”

실새삼이 워낙 꼰대 기질이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포인세티아는 높은 사람의 드라이어드일 수도 있는데 말조심해야 되는 거 아니니?

“이기적인 것들이 나 몰라라 하는데 나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어? 정말이지, 필드가 차갑다고 필드에 소속된 드라이어드들의 성격도 차가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별난 놈들뿐이야.”

실새삼에게 쏘아붙이듯 대답한 포인세티아는 갑자기 날 향해 말했다.

“그렇다고 내 성격이 차가운 건 아니야. 난 다정해. 난 특별하니까.”

그 말에 난 딱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다.

“지키긴커녕… 어디서 합창단 만든다면서 또 헛짓거리하고 있겠지.”

실새삼이 손을 휘휘 저으며 속을 긁자 포인세티아의 눈이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만. 이 자리는 그런 대화나 하자고 만든 자리가 아닌 것 같네요.”

메스키트의 제지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실새삼의 말을 곱씹어 볼수록 포인세티아는 참으로 파악하기 힘든 신비로운 드라이어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체가 따로 있다? 그럼 지금 눈앞의 드라이어드의 모습은 허상이란 걸까?

하지만 주인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상석의 사람들은 드라이어드들끼리 잡담을 나눠도 딱히 제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무신경하다기보단 그들을 존중하기에 배려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맞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그저 인간들이 맞춰 놓은 방식일 뿐이란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내 사회생활을 방해한다며 틈틈이 엘더를 혼내는 것처럼, 실새삼과 포인세티아의 대화를 끊은 메스키트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두 필드의 가디언들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필드의 가호를 내렸어요. 상황을 정리하는 덴 둘의 도움이 컸어요.”

“순례자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했군요. 훌륭합니다.”

그 말에 낮은 거목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단 몸짓을 했다.

“정말? 정말? 둘 다 규율 수호에 눈을 떴다고? 그것도 저 실새삼이? 쟤 눈은 이미 썩은 지 오래 아녔어?”

“내 상태가 온전했다면 이곳에서 널 상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거다.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말하는 꼬락서니가 저래서야. 스노우 필드의 미래도 다했군.”

포인세티아가 놀란 목소리로 툭 끼어들었다. 오죽 믿기지 않았으면 우리에게 달려들 기세로 앉아 있던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릴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두 발이 땅에 닿는 그 잠깐 사이에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드라이어드의 모습이 일순 지지직 흐려졌다가 선명해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포인세티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기에 달리 지적을 하기도 애매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오랫동안 감겨 있던 가디언들의 규율 수호의 눈이 뜨인 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드라이어드들의 상태가 차마 두고 보기 힘들 만큼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 드라이어드들은 마치 동물들처럼 약육강식의 방식으로 사람들은 물론 같은 드라이어드들을 해하고, 불과 싸울 의지가 없어 보였어요. 그 모습을 보고 이젠 더는 미룰 수 없다 깨달은 거겠지요.”

내 말이 끝나자 상석에 침음성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실태 파악이니 뭐니로 이전 청문회에선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때는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날뛰었단 말만으로도 퉁칠 수 있었다. 그 자리의 그들이 원했던 사실은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며 낮은 거목을 살피니 비로소 다시 열린 청문회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미진한 우리에게 조언을 달라는 식으로 말하더니… 정말 그들이, 아니 낮은 거목이 원했던 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을 오로지 내 관점에서 해석해 달란 뜻이었다.

아, 그렇게 깨닫고 나니 상황이 달리 보인다.

최소한의 인원을 남기고 청문회장의 모든 사람들을 물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내게 우호적인 드라이어드들로 채웠다.

또한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낮은 거목은 대화를 이끌고 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내가 말을 꺼내면 경청하는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질문도 없었고 의문도 없었으며 그들의 태도는 오로지 수긍뿐이었다.

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곧게 폈다.

이곳에서 내 자리를 깨달았다. 낮은 거목과 나는 지위의 차이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이 자리에 선 나는 그와 대등했다. 작은 세계수가 또 다른 작은 세계수를 만났을 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상황 설명 따위가 아니었다.

이 시간은 내가 순례자로서, 당당히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부를 향해 기꺼이 그 자리를 걷겠노라 선포한 순례자로서, 내가 얻은 깨달음을 전해 주는 자리였다.

난 순례자로서의 실적을 보고해야 했고 한편으론 올바르게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는가를 증명할 시험에 응하고 있는 것이다.

순례자의 시선으로 봐야 할 것들을 모두 보았는가?

“필드의 규율 협약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 드라이어드들은 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위험한 발언이었으나 작게 헛기침을 할 뿐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널리 세계수의 축복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라. 생명의 순환이 끊기지 않도록 걸을 수 있는 뿌리의 역할을 다하라. 드라이어드들의 역할은 단순히 불을 해치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그들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규율을 모른 채 본능에 충실한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과 차이가 없다고 봐야지요.”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 단순히 처단해야 될 대상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그들도 결국 드라이어드로 태어나 그 끝은 세계수의 품에 안길 생명들. 저들은 모르겠으나 이미 세계수는 기꺼이 그들도 품을 의향이 있음을, 바곳을 위해 열매를 내려 주며 보였다. 세계수의 눈엔 모든 드라이어드가 평등했다.

1번째 테라리움은 결과물인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에 집중해선 안 된다.

정 규탄하고 싶다면 그들을 만들어 내는 이들과 그 행위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순례자로서 무엇을 느꼈는가?

“필드의 가디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한 채 지냈다고 했어요. 규율의 수호자가 눈을 가렸으니 그 아래의 협약자들이 외면한 채 딴청을 부려도 감시하고 제재할 관리자가 없어요. 약화된 자연의 이치는 인페르노와 같은 파괴적인 단체가 더욱 활발하게 날뛸 수 있는 발판만 마련할 뿐이에요. 자연이란 거대한 흐름이 한낱 인간들의 욕심 따위로 흔들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자연은 자연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살아가야 한다. 공존은 반기나 반목과 침입은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순례자로서 앞으로의 방향은?

“이 모든 악순환 역시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자신의 드라이어드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가디언들의 마음을 변질시킨 거겠지요. 드라이어드들 역시 똑같이 욕심을 갖게 된 거예요. 필드를 수호할 본분조차 망각할 만큼 애틋해져 버린 바람에…. 그러니 끊어 내야 해요. 제가 오롯이 견고한 작은 세계수가 되어 그들이 본분을 다하도록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이 먼저겠지요.”

약한 나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느라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도록.

“또한 필드를 어지럽히는 인페르노를 처단하는 데도 앞장설 거예요.”

나는 세계수의 발이 되어 떠도는 순례자(巡禮者)가 아닌 고대의 정결한 자연의 법을 재현할 순례자(循例者)가 되어야 했다. 모든 필드의 규율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던 그때를 기리며.

“들었느냐.”

오랜 침묵을 깨고 낮은 거목이 말을 건넨 대상은 내가 아니라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였다.

“언제까지 인간들의 틈에 붙어살며 본분을 잊고 지낼 것이냐. 정도(正道)를 걷겠다는 참된 작은 세계수가 드디어 세상에 나타났는데 마냥 어리광만 부릴 것이냐?”

“…….”

그러나 포인세티아는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

“오랜 세월을 산 나무는 빼곡히 채워진 나이테만큼 지혜를 쌓는다고 하나 그것도 햇빛을 향해 부지런히 뻗어 나간 나무를 향해 한 말이었군요. 이리 오래 살았으나 두 발로 세상을 경험하는 그대에게 비할 바가 못 되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모두가 위대한 세계수 아래 평온을 누리며 평온을 지키겠다고 말하나 정작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요.”

낮은 거목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상석의 다른 이들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1번째 테라리움은 순례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방관하진 않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 테라리움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요. 이미 상당수의 이들을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인페르노 소탕을 위한 공문이 발효될 것입니다.”

이미 움직였구나.

증인의 자격을 들먹이거나 사사건건 반목하던 모습을 보이는 등 좋지 않은 시도가 번번이 끼어들었지만 결국 내부에선 초점이 맞춰진 모양이다.

“하지만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엔 앞서 말한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없을 수도 있어요.”

네이처 키퍼가 이리스의 예상대로 행동했다면 진작 드라이어드들을 모두 빼돌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드라이어드들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제한하던 힘은 사라졌다. 아마 헬 드라이어드의 만행으로 유리관 안의 드루이드들이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 원인이겠지.

네이처 키퍼는 그렇지 않아도 드라이어드들의 해방을 갈망했으니 힘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순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곳에 도착한 이들이 알아서 파악할 일이지요.”

낮은 거목이 상석에서 걸어 나와 내 앞에 서자 다른 이들은 일제히 그에게 허리를 숙인 후 회장을 빠져나갔다.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순례자의 목표엔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을 신경 쓰는 걸 눈치챈 건가?

물론 10그루 다 모아야 하는데 그중 한 그루가 주인이 있다면 퀘스트가 좀 꼬이긴 했다.

낮은 거목은 자연스레 앞장섰고 난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글쎄요…. 만났다 하더라도 제가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차가운 눈밭과 부족한 햇빛을 반기는 식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의지력이 참 강하지요.”

찰싹.

낮은 거목을 따라 걷는 내 옆에 올리브 드라이어드가 슬쩍 달라붙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제 주인이 따로 있을 게 분명한데 날 향한 친근감의 표출이 거리낌 없었다.

“혹시… 이 드라이어드들, 포인세티아를 제외하고 세계수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나요?”

내 물음에 낮은 거목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 안의 모든 드라이어드가 내 영혼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다더니….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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