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4화 (364/604)

대체 인페르노의 실제 조직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내가 짐작하고 있는 크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단 느낌이 든다.

단순히 수장 애쉬가 이끄는 사이비 교단으로 치부하지 말고, 애쉬 밑에 체계적인 조직도가 존재하고 여러 무리가 세부적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걸 상기해야만 했다.

테라리움 하나가 통째로 불에 타 괴멸했다. 그것도 불 몬스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화마로 말이다.

에우노미아의 말에 따르면 인페르노 전체가 매달린 것도 아니었고, 봄버라는 조직원이 제 밑의 사람들을 끌고 이뤄 낸 결과였다. 극단적인 베스탈리스들이 난동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테라리움 하나가 날아간다….

물론 테라리움은 뒤 번호로 내려갈수록 세계수 가지의 축복의 힘이 약해지고, 주민의 수가 적으니 방어 체계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단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산속에 외따로 지어진 터도 아니고, 번호를 가진 마을 하나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전멸했다는 사실은 쉬이 넘길 수 없었다.

혹시 67번째 테라리움 외에도 같은 원인과 결과를 맞이한 테라리움이 더 있는 건 아닐까?

관객석에서 자폭하려던 첩자를 막기 위해선 숨통을 끊는 수밖에 없었으니 이미 늦은 긴 했지, 그를 살려 뒀다면 또 다른 정보를 캐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두는 게 어때?”

파필리온이 홀로 앉아 있는 에우노미아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체 왜 외부인이 그런 보안 등급이 높은 자료에 접근하도록 그 여인이 내버려 둔 건지 모르겠지만, 67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정보 외에도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걸로 보이지 않아?”

파필리온의 말처럼 에우노미아는 노인의 방에서 또 다른 정보를 습득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그녀를 내 쪽에서 포섭해 보호하는 게 이득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치는 청문회의 모든 이들이 확인했기 때문에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를 제외하고도 더 있었다. 당장 1번째 테라리움에서도 내부의 첩자를 가려내는 데 공헌한 에우노미아를 내버려 둘까?

더욱이 푸른 잎에 수 초간만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여름 바람과 같은 에우노미아를 붙잡는 건 꽤 어려워 보였다.

“곧 청문회가 재개될 예정입니다.”

휴식은 짧은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급작스럽게 맞이한 것치곤 그래도 긴 배려를 받았다.

다들 복잡한 감정을 표정에 품은 채 대기실을 나가려는데 제지를 당했다.

“좀 전의 사고로 인해 청문회의 진행 방식이 조금 바뀔 예정입니다.”

그러곤 재개되는 청문회엔 오직 나만이 참가할 예정이며 다른 이들은 대기실에서 계속 대기해 달라고 했다.

“저만요?”

“필요한 증언은 모두 들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이 님 혼자 참석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 에우노미아에게 또 다른 정보를 털어 내거나 우리 쪽에 반기를 들며 지지부진한 시간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청문회 방식이 바뀌었다고?

문제가 생겨도 어차피 1번째 테라리움 안이었다.

난 보좌관인 파필리온조차도 대동하지 못한 채 대기실을 나섰다.

웅웅.

목적지의 문에 다다르자마자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지만, 차마 꺼내서 확인할 타이밍이 되지 않아 애써 무시했다.

재방문한 청문회장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관객석은 맨 앞줄을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에우노미아의 증인 자격에 이의를 제기했던 남자 역시 보이지 않았다.

중앙에 우리 측을 위해 마련했던 자리도 모두 치워진 채 단 하나만 남아 있었다.

“흠….”

그들이 가면을 썼기에 눈치채는 것이 늦었지만 상석도 인원 교체가 있었다.

상석의 제일 중앙을 전에 보지 못했던 이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다른 이들보다 로브가 화려하고 거대한 나무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릴 향해 반기를 들던 사람의 가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올리브?”

자주색 열매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품에 안은 익숙한 드라이어드가 화색을 띠며 날 반기고 있었다.

두 손만 자유롭다면 내게 양껏 흔들어 댈 기세였다.

그녀를 제외하고도 상석엔 전과 달리 드라이어드들이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순히 보안을 위해 경계를 서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테라리움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1번째 테라리움이 낯부끄러운 치부를 훤히 드러낸 데다, 그걸 오랜 시간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군요. 저는 1번째 테라리움에서 세계수를 가장 가까이 모시는 자, 달리 부르는 이름은 ‘낮은 거목’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를 대표해 오늘 일을 사과드릴 뿐만 아니라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어째서인지 거역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중후한 목소리가 공간을 무겁게 울렸다.

상석의 중앙에 앉은 이, 낮은 거목은 풍기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1번째 테라리움에서 굉장한 고위직 인물인 것처럼 보였다.

그가 입을 열자 주위에 앉은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가볍게 숙인 채 입도 뻥긋 못 하고 있었다.

왜 이제 와서 저런 자가 청문회에 등장한 걸까?

“나이가 든 잎은 새로 자라난 잎에 자리를 양보하듯, 본래 이 늙은이는 이런 자리에 나서지 않으려고 했으나… 드라이어드들이 워낙 성화를 부려서 말입니다.”

드라이어드들이 성화를 부려? 난 반사적으로 올리브 드라이어드를 바라봤다.

그녀는 마거리트가 떠오를 정도로 해맑은 웃음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들’이라고 했으니까….

조금 전부터 느낀 거지만 상석에 서 있는 드라이어드들의 날 향한 눈빛이 꽤 호의적이었다.

“고된 일을 자처하여 널리 은혜를 베풀고 다니는 분께 우리 1번째 테라리움의 처우가 영 마땅치 않으니 애가 닳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몇몇 이들이 숙인 고개를 더욱 깊게 내렸다.

“세계수의 부름을 받고 세상을 여행하는 작은 세계수가 방문했으니 그에 맞춰 대접해 드려야 마땅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서로가 얼굴을 붉히는 언쟁을 주고받으며 알력 다툼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도 됩니다. 모래에 피는 꽃이 따로 있고 물에 피는 꽃이 따로 있듯, 그것이 맞는 자들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대에겐 그대에게 맞는 자리가 주어져야지요. 어디 작은 세계수들의 방식대로 숲을 펼쳐 봅시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온 그대는 미진한 우리에게 어떤 조언을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대기하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어떤 드라이어드는 대놓고 상석의 탁자 위에 걸터앉았고 어떤 드라이어드는 아예 상석에서 빠져나와 층계에 걸터앉았다.

난 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당황하여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날 보며 낮은 거목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순례자를 보고 싶다며 그리 성화를 부렸으니 이 정도면 많이 참았지요. 무려 현존하는 작은 세계수 중 가장 세계수의 대리자에 걸맞은 자가 그대가 아닙니까?”

아무래도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중앙 행정 관리부와 이야기했던 순례자 소식이 전해진 듯한데….

저쪽이 드라이어드들을 한껏 꺼내 놓고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이제야 이해가 갔다.

청문회엔 나 혼자 참석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 그 말은 아무래도 내 드라이어드들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였나 보다.

그렇다면 꺼내야 할 드라이어드는 정해져 있었다.

내 부름을 받고 아티팩트에서 메스키트와 실새삼이 나타났다.

둘을 보는 낮은 거목의 눈엔 경외가 가득했다.

“더없이 경외적인 축복의 수호자들….”

필드의 가디언들을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또한 같은 드라이어드일지라도 몰라보는 이가 꽤 됐다. 메스키트가 숱하게 내 곁을 지켰음에도 그녀가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인 걸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지.

그런데 낮은 거목은 단번에 메스키트와 실새삼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했다.

“쯧.”

실새삼이 등장과 동시에 버릇없이 혀를 찼다.

그가 바라보는 곳엔 흥미롭단 표정으로 상석의 탁자에 걸터앉아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었다.

털옷처럼 두툼한 새빨간 원피스에 마찬가지로 두꺼운 숄을 두른 은발의 드라이어드였다.

무릎까지 오는 부츠는 물론 모든 옷의 테두리에 눈송이 같은 솜털을 장식처럼 두른 것이 꼭 산타 요정을 보는 기분이었다.

“실새삼이 메리(merry)한 묘목이 됐네. 회춘한 기분이 어때?”

실새삼의 냉대를 받은 드라이어드의 성격도 만만찮았다. 아는 사인가?

설마 그렇다면….

난 입장할 때부터 쉴 새 없이 진동하던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둔자의 정원 때와 마찬가지로 크로스 헤어가 자리한 금빛의 둥근 홀로그램을 띄웠다.

이게 나타나는 이유는 뻔했다.

“설마… 필드의 가디언?”

“그렇습니다. 역시 순례자의 눈은 다르군요.”

낮은 거목의 말에 상석에 앉은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빨간 드라이어드가 필드의 가디언이라고?

어느 필드의 가디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솔직히 실새삼과 핸드폰의 반응이 없었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일단 존재감이 달랐다. 강렬한 색감의 바크를 입고 있는 것과 달리 저 드라이어드는 존재감이 아주 옅었다.

정확히는 주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평범한 드라이어드들과 섞인다면 절대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 존재감이었다.

유령, 아니 은신 마법을 쓴 요정과 같은 느낌이었다.

메스키트와 비교하자면 확연하게 그 티가 났고, 하다못해 애가 된 실새삼과 비교해 봐도 가디언이란 이름에서 오는 웅장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버릇없기는 너나 너 전대나 다름없구나. 허구한 날 시끄럽게 노래나 불러 대는 것들이 정신이 성장할 틈이 있겠냐 싶지만.”

“고지식한 노인 같은 태도는 듣던 대로네. 어려진 김에 생각도 좀 젊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실새삼 보고 꼰대라 말하는 드라이어드 때문에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무슨 드라이어드야?”

“포인세티아. 겨울만 되면 집집마다 저걸로 치장해 둘 테니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꽃이다.”

“흔한 건 너만 하겠어.”

“쯧쯧, 천박한 말투하고는.”

포인세티아? 겨울? 설마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인 건가?

새로운 필드의 가디언을 만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난 필드의 가디언을 10그루 다 모아야 하는데… 저 드라이어드는 이미 주인이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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