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3화 (363/604)

에우노미아는 필요에 따라서 특정한 기억에 대해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음을 증명하듯, 마치 아직도 그곳에 있는 것처럼 모든 순간을 설명해 냈다.

불안에 떨던 그녀를 감싸던 주변의 온도, 천장에서 내리쬐던 조명의 밝기, 바닥을 가득 메운 타일의 개수, 특수한 열쇠가 꽂힌 방 그리고 그 열쇠의 홈 개수 등등.

상상하여 말해 보라 해도 힘들 정도의 세밀한 묘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눈앞에 그 장소가 펼쳐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감 난다고 한들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곳이 에우노미아의 말처럼 실재했음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었고, 다른 이들을 단번에 납득시킬 만한 무언가가 부족했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앞을 향해 손을 휘적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67번째….”

자신 있게 설명하던 이전과 달리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세계수의 67번째 테라리움 사태는 세간에 불에 의한 침입을 끝내 버티지 못한 것으로 마무리되었음. 테라리움에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은 전멸했기 때문에 목격자는 없을 것으로 추정.”

그녀의 허공에 들린 두 손은 무언가를 쥐고 있는 모양새였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뚜렷하게 향한 시선은 그날 그 방에서 그녀가 확인했던 서류를 보고 있는 모양새였다.

“방금… 67번째 테라리움이라고 했습니까?”

좌중에 일순 정적이 깔리고 모두가 그녀의 말을 행여나 놓칠세라 집중했다.

“불은 남쪽에서부터 시작, 통행로를 막으며 천천히 남동쪽에서 돌아 북진했고…. 일반적으로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여 오는 불의 침입 패턴과 확연히 다른 것이 보이나, 시기상으로 보아 무던하게 조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임.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없어 보임.”

“잠시만 이야기를 멈춰 주십시오.”

상석에 앉은 이가 에우노미아의 이야기를 끊더니 그들끼리 심각한 기세로 담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간 적이 있습니까?”

“당장 멈춰야 합니다. 청문회 주제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건 신성한 청문회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67번째 테라리움의 사건은 종결 당시에도 많은 찝찝함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그곳의 산증인이 한 명이라도 나섰다면 재조사가 가능했었지만….”

갑자기 등장한 67번째 테라리움이 그들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난 등 뒤에 선 파필리온에게 슬쩍 물었다.

“67번째 테라리움이 왜?”

“67번째 테라리움은 지도에 없지. X로 그어져 있을 거야.”

난 60번대 테라리움부터 눈에 띄게 X 표시가 늘었던 월드 맵을 떠올렸다.

“세계수 가지의 약해진 축복이 끝내 불을 이겨 내지 못한 거거든. 물론 공식적으론 말이야.”

“공식적으론? 그럼….”

“저 패랭이꽃 같은 여인이 사실은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뭐.”

실제론 그 테라리움이 불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다?

상석에서 외따로 진행된 담화는 끝이 났는지, 다들 다시금 에우노미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다시 증언을 진행해 주십시오.”

“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증언은 현재 청문회의 주제와 맞지 않습니다.”

상석에 앉은 이들끼리 의견 마찰이 발생했다. 문책을 통해 제일 먼저 분위기를 깨뜨렸던 자가 반기를 들었다.

그자는 에우노미아의 증언을 당장 멈추게 하고 다시금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으나, 그를 제외한 상석에 앉은 모든 이들에게 반려당했다.

“본 67번째 테라리움의 방화 사건을 계기로 봄버를 위시한 무리의 잔악한 기질은 교단 내에서도 더 이상 감당이 불가하다 판단. 봄버의 집단이 야기하는 피해가 너무 막심하니 교단의 처우 고려 요청. 이에 다른 쓸모를 찾자는 장로들의 판단하에 봄버의 처우가 결정됨.”

에우노미아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봄버는 최후의 불씨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퓨즈’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그 말에 에우노미아에게 집중되었던 상석의 시선이 일제히 관객석의 누군가를 향했다.

“1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 잠입. 최후의 순간, 불씨를….”

화르륵.

갑자기 엄청난 열기가 관객석이 있는 뒤편에서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바라본 곳엔 누군가 곧장 달려나갈 기세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광기 가득한 웃음소리가 청문회장에 울려 퍼졌고 관객석에서 큰 소란이 발생했다.

주변엔 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드라이어드들도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불꽃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일제히 몸을 날려 소란의 원인을 제압했다.

큰일이 발생할 뻔했으나 삽시간에 무마되었다.

역시 1번째 테라리움의 위명은 대단했다. 수준급의 드라이어드들이 철통같이 테라리움을 지키며 일말의 사건도 용납해 주지 않고 있었다.

소란 때문에 청문회는 잠시간 휴식을 가진 후 재개하기로 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우린 다시 대기실로 안내되었고 다들 방금 전의 소란으로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다만 에우노미아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멀리 떨어져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처음엔 법원을 방문하게 되어 설렌다며 활기찼던 그녀의 모습과는 많이 상반되었다.

“블랙 릴리의 그대,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물론 우리 둘만 말이야.”

파필리온이 대기실 구석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봐.”

난 우릴 대기실로 안내해 준 이에게 물었다.

“혹시 뒤늦게 도착한 다른 사람들은 없나요?”

“네, 없습니다.”

“네이처 키퍼 쪽이 많이 늦는데….”

“제이 님.”

잠자코 있던 이리스가 어딘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큰 기대는… 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이처 키퍼는 우리와 곧바로 합류하여 법원으로 향하진 않았다.

그들은 청문회에 참석하겠다고 의사는 밝혔으나 우리와 따로 행동했고, 사정상 늦게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뜻을 윈터가 전했다면 사정에 대해 물었을 테지만 어째선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나온 이후론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듣기론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괴멸시키기 위해 안과 밖에서 양동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에선 직원으로 위장 취업 후 차폐막 시스템을 마비시켜 드라이어드들을 풀어 주고, 밖에선 때에 맞춰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고발을 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믿고 있었다.

만약 청문회에 네이처 키퍼 측이 제때에 도착했다면 증인 부족으로 인해 갑자기 여론이 휘청거리는 사태 역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지 않을 것 같단 이야긴가요? 하지만 왜…?”

“솔직히 따로 행동하려는 낌새를 보고 눈치는 챘어요. 뒤늦게 온다고 했지만 장소를 정확히 묻지도 않았고 시간을 고지해 주지도 않았지요. 그들은 애초에 청문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네이처 키퍼는 관람객들과 사정이 다르지 않나요? 애초에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방문 목적이 다른데 무얼 걱정하는 거죠?”

“그들이 필요한 건 아마도 시간이 아닐까 싶은디….”

“시간?”

“그들은 자기 자신의 안위보단 드라이어드들을 걱정할 테니….”

헤르마가 슬쩍 끼어들었다. 이리스가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아마도 초기엔 우리처럼 고발할 계획을 가졌을 수도 있으나…. 후반엔 계획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어요. 직접 보고 겪은 드라이어드들의 특수성을 뒤늦게 깨달은 거죠.”

하긴 윈터에게 전해 듣기론 애초에 그들은 드라이어드를 해방시켜 주면 다들 자유를 찾아 떠날 거라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헬 드라이어드처럼 난데없이 난동을 부리거나 공작선인장처럼 자유를 찾을 의욕이 없는 경우가 전부였지.

그렇다면 생각과는 달랐던 드라이어드들을 보고 계획을 바꿨단 말인가?

“네이처 키퍼는 1번째 테라리움을 믿지 않은 거예요. 우린 이곳에 실태 고발 외에도 차후 조치 방안 마련으로도 온 거잖아요? 그들은… 1번째 테라리움이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버릴 거라 확신한 걸지도 몰라요.”

“…그래서 독단적으로 움직이겠다라….”

이리스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네이처 키퍼의 사람들이 아무도 오지 않은 이유가 설명이 됐다.

단순히 인페르노처럼 네이처 키퍼 역시 비밀리에 움직이는 단체다 보니 신원을 들키지 않으려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내 예상과는 차원이 다른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금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으로 되돌아가 바쁘게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을 빼돌리고 있으려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다.

다들 좀 정해진 메인 퀘스트대로 좀 움직여 주면 안 돼?

왜 이렇게 서브 퀘스트를 남발하지 못해 안달이냔 말이다.

솔직히 생각이라도 정리하며 쉬고 싶었지만 날 따로 부른 파필리온이 마음에 걸렸다.

“넌 또 왜.”

“이곳에서 최후의 불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거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꺼낸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인페르노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래, 너도 한때는….”

“이젠 아니니까 잊기로 하는 게 어때? 난 이제 그대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이라고.”

느글거리는 말투와 얼굴이 죄다 꼴 보기 싫었다.

“어쨌든 최후의 불씨는 장로 중에서도 그 여자가 즐겨 사용하는 방법인데. 최후의 순간에 다 터뜨려 버리는 거 말이야. 대게는 자폭이지.”

그 말은 아까 조금만 늦었어도 관객석에서 누군가의 자폭 쇼를 직관할 수 있었다는 건가. 끔찍하다.

“아, 그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도 아주 펑펑 터지더라….”

그런 끔찍한 뒤처리가 그 노인의 전매특허였다니.

“솔직히 증거라고 해 봤자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사람의 증언뿐이니, 아니라고 잡아떼면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성급했어. 하긴 그런 성질머리니 교단에서 버림받았겠지. 그건 그렇고 혹시 만났어?”

“누굴?”

“애쉬의 어머니 말이야. 저 패랭이꽃의 여인이 습득한 정보로 보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그 여자가 관리하던 게 분명한데. 왠지 그 여자 성격상 그냥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 같거든.”

파필리온은 확신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 이상한 노인네 한 명을 만나긴 했지.”

“…내 이야긴 안 했어?”

“딱히? 애쉬 자랑만 오지게 하던데.”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달리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나저나 67번째 테라리움이라….”

청문회 도중 뜬금없이 숨겨진 비화가 드러난 테라리움.

문득 인페르노를 향해 괴담처럼 떠돌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들링도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어딘가의 테라리움을 통째로 불에 태워 버렸다는 소문도 있었지.’

결국 단순한 괴담이 아니었음이 증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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