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2화 (362/604)

내가 아는 인페르노에 대한 정보 대부분을 청문회에서 오픈했다.

물론 나 역시도 단순히 이 자리의 대다수보다 많이 아는 편이지, 완전히 꿰고 있다고 보기엔 어려웠고 그 사실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되니 막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그때 노인이 준 열쇠로 그녀의 방을 탐색했다면 또 달랐을까?

그런 선택지가 발생한 것은 지금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계속 후회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아쉽긴 해도 그때의 선택이 있기에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말실수를 했다간 나에 대한 여론이 순식간에 바뀔 수 있을 만큼,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인페르노 카드를 너무 일찍 내민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청문회의 모두가 험악한 얼굴로 내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을 섬긴단 말입니까?”

“세계수의 은혜 아래 그런 몹쓸 짓을….”

“몰상식한 자들이 아직도 존재할 줄이야.”

어쩌면 수면 위로 떠오른 인페르노의 존재가 베스탈리스에 대한 탄압을 더 부추기게 되는 결과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미미르 가족들과 같은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은 더욱 힘들어지게 되겠지.

그들에겐 안타까운 일이나… 그렇다고 인페르노에 대한 이야기를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인페르노의 커다란 자금줄이며, 어쩌면 세상을 지배하려는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먼 훗날 더 많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행되던 드라이어드 학대와….”

드라이어드 전시회, 체험 학습관, 공연 등등…. 그곳에서 내가 보고 겪은 것들을 이야기할수록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실태는 인페르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았다면, 이곳의 모두가 쉽사리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지성과 이지를 겸비한 드라이어드를 짐승 수준으로 격하하여 지배하고 부려 먹으려던 음습한 시도.

세계수를 모시는 극성맞은 신성 국가나 다름없는 1번째 테라리움에선 인페르노는 확실한 이단이었고, 진정 종교였다면 대대적으로 종교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충분했다.

나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고 대표로 참석했던 이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드라이어드들이 모두 유리창 안에 갇혀 있었고… 묘목들은 낮은 울타리가 쳐진 들판에 풀어놓기는 했으나….”

그들 역시 직접 보고 겪은 일들을 그대로 증명하니 이는 내 말에 대한 사실 확인이나 다름없었다.

의외인 점은 구조대로 참가했던 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증인으로 나선 관광객들 중에 내 경험보다 더욱 세부적이나 심화된 경험을 겪은 이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닌 덕도 있지만….

완전 VIP들은 이미 멀찍이 손을 떼어 버린 거네.

배포용 초대장으로는 갈 수 없는 특별한 장소들에 대한 목격담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 대한 존재 여부는 오직 내가 곁다리로 얻어들어 풀어놓은 이야기가 전부였던 것이다.

하긴, 배포용 초대장 정도는 뭣도 몰랐다는 핑계가 통하니 선처를 바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식 회원들은 달랐다. 그들은 직접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후원해서 자격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최소 한 번 이상은 재방문했다는 뜻일 테니까.

그들은 실태를 알면서도 1번째 테라리움에 고발하기는커녕 눈 가리고 즐겨 왔으니 선처는 무리였을 것이다.

“사고가 일어난 후 제가 있던 곳은 금방 습격을 받아서 출구에서 더 먼 곳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는데…. 공연장으로 보이는 곳에 저를 비롯한 다른 많은 생존자분들과 함께 숨어 있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에우노미아의 증언이 막 끝났을 때였다.

“그렇다면 관람객 대표로 나선 증인분들께선 만약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본 불경한 일들에 대해 고발할 의향이 있었습니까?”

이 건을 꺼내는 건 아직 시기상조가 아닌가?

이 자리는 그저 실태 고발이 중요시되는 자리지, 그곳에 다녀온 관람객들에게 죄를 묻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미 발 빠르게 도망가 버린 다른 관람객들을 대신해 고발에 신빙성을 보태고 중요성을 깨우치기 위해 그나마 용기를 낸 이들을 위축되게 만드는 말이었다.

역시나 그 말에 관람객 증인 측의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난 문책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말을 꺼낸 이를 바라보았다. 상석에 앉아 있던 이들 중 하나로, 날 보는 표정이 여간 곱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 물음이 다소 어떤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이 자리의 질타는 오롯이 인페르노를 향해야 하는데, 뜬금없이 증인들에게 화살이 돌아간다고?

정 죄를 묻겠다면 더 후의 일이 되어야 할 건데.

“이견이 있습니다.”

그 물음으로 인해 청문회에 잠시간 고요가 흐른 틈을 타 뜬금없이 관객석 쪽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이견? 제3자의 의견은 청문회가 끝난 후 진행할 예정입니다만.”

“전 이번 청문회에 배심원으로 참가한 테사입니다. 진행 순서에 대해선 숙지하고 있으나 증인 중에 증언 신빙성이 문제가 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어 부득이하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신빙성이 문제가 된다?”

문책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갈수록 이상해졌다.

“네, 관람객으로서 증인으로 나선 분들 중 에우노미아라는 분의 증인 자격을 재검토해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에우노미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집중된 시선에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한 이에게 반가움을 표출했다. 아는 사람인가?

“듣고 보니 뒤로 미룰 순 없겠군요. 이견에 대해 들어 봅시다.”

이를 허락한 사람은 관람객 대표들을 향해 문책을 한 자였다.

“에우노미아, 그녀는 과거 사고로 인해 특수한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습니다. 심신이 고통스럽다고 판단되는 기억은 반사적으로 잊어버리는 희귀한 병입니다. 이 때문에 그녀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큰 사고를 겪었으니 기억에 혼란이 왔음은 당연지사….”

확실히 테사란 인물은 에우노미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건물 잔해에 깔려 정신을 잃으며 에우노미아는 그때의 기억을 잃기도 했다.

“그녀가 직접 그곳에 방문했다는 증언부터 신빙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테사는 그 후로도 열심히 에우노미아의 이야기를 꺼냈는데, 들을수록 그녀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건과 멀리 떨어뜨리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를 제외하고 관람객 대표 증언자는 둘이 더 있었으나 이건 우리에게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사태가 심각한 이유엔 물론 인페르노가 운영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확고한 자금줄이 될 만큼 수없이 많은 부자 관람객들이 이용했다는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관람객들 중에 고위층이 있다는 사실이 인페르노가 물밑에서 사회 전반에 인맥을 형성해 관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제기할 수 있고, 1번째 테라리움이 내부 스파이를 경계하며 더욱 치밀하게 조사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증언을 거부하고 도망갔고 이 자리에 있는 셋이 그나마 전부였다.

그중 한 명은 신빙성에 대한 이의를 받았고 남은 둘은 배포용 초대장으로 온 관람객이기에 많은 부분을 증언하지 못했다.

특히나 운 좋게 외곽 지역에서 숨어 있다가 발견된 둘과 다르게, 에우노미아는 마지막 증언에서 도피하지 못했던 생존자들 무리에 오래 섞여 있었기에 같이 있었던 자들의 신분을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일이 그대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 듯한데?”

내 뒤에 선 파필리온이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금 상황이 야기할 수 있는 결과들은 참 많았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옳지 않은 실태들은 부정할 수 없는 결과였지만, 사건의 크기가 이리저리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관람객들의 특수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애초에 불특정 다수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했다고 좁혀질 것이고, 인페르노에 대한 경계성이 낮아진다.

특히나 회원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그들의 니즈에 맞춰 제작된 위험 드라이어드 전시 지역이나 헬 드라이어드의 관람 쇼 등에 대한 증언은 내 경험담밖에 남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아무리 대표 격으로 참가한 내가 한 증언이라 할지라도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상황이 악화되어 만약 고위층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기 위해 내 말이 허구라고 화살을 돌리게 된다면?

“인페르노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건 그들이 정말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것도 있지만, 어쩌면 앞 번대 테라리움에 그들의 첩자가 있어서 정보를 가리는 걸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이 님이 나서서 인페르노에 대한 정보를 수면 위로 올리려고 하면 정말 위험해질 거예요.”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일로 중앙 행정 관리부가 방문하기 전, 날 향해 남긴 걱정스러운 이리스의 조언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자리에 인페르노의 첩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상황도 그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면….

“그렇다면 앞서 들은 증언들을 재검토해 봐야겠군요.”

기다렸다는 듯이 테사의 이견을 이어받는다.

“한 명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증인 자격을 재검토해 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일은 결코 쉽게 봐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일의 경중을 생각해서라도 우린 명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 따져 보고 의심해 봐야 합니다. 제이 님의 말에 따르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방문 이전부터 인페르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데, 무슨 연유로 그곳에 방문하신 겁니까? 애초에 당신이 인페르노와 일말의 긍정적인 연관이 없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난 그 말에 구겨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팔짱을 꼈다.

어수선한 틈을 타서 청문회의 본 주제를 빗겨 가려고 한다.

저자가 인페르노의 첩자일까? 아니면 사주를 받은 것일까?

“제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아요!”

그때 에우노미아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테사가 이견을 내세울 때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그녀였으나 갑자기 태세가 바뀌었다.

“물론 제가 특수한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반대로 특정 상황에 대해선 모두가 놀랄 만큼 굉장한 기억력을 갖고 있기도 해요. 필요 없다고 판단하는 기억을 잊어버리는 만큼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기억에 대해선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증거라며 내세운 발언은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전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기 전, 관계자 외엔 출입할 수 없는 건물에 있었어요. 그땐 습격을 피해 도망가느라 정작 제가 있던 곳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본 정보에 의하면 그곳은 결코 저와 같은 관람객들이 있어선 안 될 장소임이 틀림없어요.”

내가 열쇠를 꽂아 두는 선택지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녀는 놀랍게도 나 대신 노인의 방에 들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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