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테라리움의 보좌관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디케와 에이레네가 정말 이 사람이 보좌관이 맞냐는 표정을 하는 걸 보니, 파필리온이 여간 방정맞게 군 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들이 파필리온이 원래 행정 관리원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날 오랜만에 보는데 반갑지도 않아?”
“내 표정만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아?”
치근덕거리는 파필리온을 멀찍이 떼어 놓고 법원으로 입장하려던 때였다.
“어….”
차례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중 에우노미아에게 닿은 에이레네의 시선이 묘했다.
아는 사람을 발견한 눈빛에서 더 나아가, 경악과 불신이 감정의 시작을 끊고 점차 그리움으로 번져 가듯 눈가에 물기가 가득 어렸다. 누가 봐도 에우노미아는 에이레네에게 아주 특별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말도 안 돼….”
“에이레네? 왜 그러니?”
에이레네의 이상 행동 때문에 그녀의 언니인 디케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에이레네는 충격으로 인해 입을 다문 이후로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들은 아무래도 청문회에서 날 거들기 위해 급히 파견된 모양이었지만, 애초에 도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문제가 있다면 빠져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쉬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에이레네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다.
“저도 잘…. 갑자기 얘가 왜 이러는 거지?”
“보좌관은 파필리온으로도 충분할 것 같으니 진정될 때까지 에이레네를 달래 주세요.”
“아뇨…. 전 괜찮아요.”
에이레네가 무리하게 일을 강행하려 했으나 디케가 단호하게 막아섰다.
“무려 1번째 테라리움에서 열리는 청문회야. 그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지? 우리가 실수를 한다면 행정 관리원님의 명성에 누를 끼칠 수도 있어. 제이 님의 배려를 감사히 받도록 해.”
디케의 설득에 에이레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녀가 갑자기 저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디케는 에이레네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기 전, 그녀의 동생에게 이상 증상을 야기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이 좋지 않았기에 단순히 방향을 점 찍는 데에 그쳤지만, 마치 영혼을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시선이 매서웠다.
에우노미아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작은 소란으로 멈췄던 발길이 다시 이어졌다.
“에우노미아, 혹시 저들을 아시나요?”
난 멀어져 가는 보좌관 자매들을 바라보며 에우노미아에게 물었다. 에이레네의 반응을 보면 아주 특별한 관계인 것 같은데.
“글쎄요. 제 기억에는 없는 것 같은데. 어쩌면 과거의 절 아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네요. 제가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해서 과거 기억이 거의 없다시피 하거든요.”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은 데다 이번에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도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다니.
에우노미아의 사정이 참으로 딱했다.
“그런 일을 겪으셨다니…. 많이 힘드시겠어요.”
“음… 과거의 절 기억하지 못하는 건 슬프긴 해도 미련은 없어요. 생각하시는 만큼 전 그렇게 힘들지도 않답니다. 그날의 사고가 제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제 머리는 기억하기 싫을 만큼 힘든 일이 생긴다면 반사적으로 깡그리 잊어버리거든요. 과거를 잊었다는 건, 제가 그걸 계속 기억하는 한 생활하기 힘들 정도였다는 거겠죠.”
에우노미아는 처음 본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힘든 과거는 자동으로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진다라…. 그녀는 그게 장점이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과연 좋은 일이 맞을까 싶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아픈 과거라 할지라도 가끔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날의 내가 이겨 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밀어내는 건 정신 건강에 이로울 순 있다. 하지만 에우노미아의 경우는 밀어내는 게 아니라 소각한다는 느낌이었다. 아예 겪지 않았던 일로 치부하기.
그렇다면 그 과정 속에 엮여 있던 다른 수많은 기억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기대되지 않나요? 1번째 테라리움의 법원은 보통 중범죄자가 아니면 올 수 없는 곳이잖아요. 전 살아생전 이곳을 방문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사실 제 버킷리스트에 법원 방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중범죄를 저지를 순 없잖아요? 세계수 가지에 불이라도 질러야 하나? 고위직 암살? 그런 걸 나도 할 수 있으려나?”
법원 복도의 조용한 분위기를 상반된 들뜬 목소리가 깨트렸다. 당황스럽긴 해도 그런 그녀의 태도를 책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좀 전처럼 자신에게 에이레네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기억 속에 없는 인물인데 자신을 향해 경악과 애틋함을 넘나드는 눈빛을 보내다니.
어떻게든 상대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하나라도 더 캐묻거나 이유를 고찰해 보지 않나?
그 잠깐 동안 지켜본 결과 에우노미아는 상당히 산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에이레네의 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법원 방문에 대한 소감을 늘어놓더니 갑자기 중범죄의 종류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도 자체적으로 주제를 휙휙 바꿔 버리니 도저히 대화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아니, 그녀는 굳이 내가 대화에 호응해 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말을 이어 갔다.
증언…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지?
우린 대기실에서 청문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기했다. 죄를 짓고 온 것이 아니기에 대접은 융숭한 편에 속했다.
이를 보며 파필리온이 우스갯소리로 크레아시온 영감이라면 의자는커녕 찬 바닥에 앉아 물 한 모금 못 마셨을 거라며 밉살스럽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사람들을 비롯한 크레아시온도 이 법원을 거쳤으려나?
에우노미아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중범죄를 저질러서 온 사람들이니, 우리가 이곳에서 깎듯이 에스코트를 받는 것과 다르게 멸시와 냉대를 견뎌 내야 했을 것이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곧 시작될 청문회 장소로 안내하기 위한 직원이 등장했다.
드디어 시작이란 생각에 절로 긴장됐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사건 문책을 위해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보다 배는 더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그땐 술기운으로 어찌저찌 버텨 봤는데…. 이게 바로 장소의 위명이 가지는 위압감이라는 걸까?
중범죄를 심판하는 곳에 오니 내 온갖 행실들 중 책잡힐 건 없나 돌아보게 된다.
특히나 28번째 테라리움에 숨겨 놓은 바글바글한 내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
솔직히 이 사실을 들키면 이 자리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물론 28번째 테라리움을 향한 청문회가 될 게 뻔했다.
“후….”
“긴장되는 거야?”
“넌 긴장도 안 돼?”
이곳이 드디어 네놈이 몸담고 있던 인페르노를 공론화하는 자리다. 내가 말실수라도 하면 그렇게 비웃었던 크레아시온과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될 텐데 어찌 저리 태평할까? 아니… 확 찔러 버릴까?
내 속내를 눈치챈 것인지 파필리온이 실실 웃으며 내 어깨를 찔렀다.
“그간 봐 왔으니 나 일 잘하는 거 알잖아….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역시 눈치 하난 빨랐다.
“나와 다르게 누군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표정이라 배알이 꼴려서 말이야.”
“표정은 이래도 나도 긴장되지. 무엇보다 블랙 릴리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떨려 오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퍽
속삭이며 주고받던 말소리보다 큰 타격음에 잠깐 동안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렸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정면만 바라보는 나와 파필리온의 모습을 보곤 금세 흩어졌다.
“…운동했어? 힘이 좀 세진 것 같은데.”
“조용히 해.”
파필리온의 실없는 대화 덕인지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우릴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아치형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경건한 분위기가 무겁게 깔린 너른 대강당이 우릴 맞이했다.
고지대 위에 일렬로 자리한 상석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부채꼴로 퍼지는 객석들이 존재했다.
매체에서 자주 접한 법정 내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상석엔 예전에 16번째 테라리움을 찾아왔던 중앙 행정 관리부의 행색과 똑같은 이들이 앉아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후드를 푹 눌러쓰고 각기 다른 모양의 밀가루색 나무 가면을 쓴 사람들.
혹시 저들 중에 그때 날 문책했던 사람들도 섞여 있을까? 아니면 전부 그 사람들인가?
얼마 되지 않는 객석 역시 하얀 로브를 입었으나 가면은 없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소수긴 하나 그냥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 몇몇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우리의 자리는 상석과 객석의 중간에 놓여 있으며 상석을 바라보는 방향의 자리였다.
나를 비롯한 각 대표들이 자리에 앉자 만석이 됐는데, 애초에 보좌관의 자리는 염두해 두지 않은 듯했다.
파필리온은 별다른 내색 없이 조용히 내 뒤에 서서 내게 건네지는 서류를 대신 받아 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상황을 정리할 약간의 시간을 배려해 준 후, 곧바로 청문회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한 실태 고발 및 사후 조치를 위한 청문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자리에 계신 분들께선 세계수 앞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도록 오직 진실과 정직으로 증언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세계수의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 관리부는 우리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세계수에 위배되는 불경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습니다. 빠른 전달을 위해 요점을 제외한 사항들이 누락되어 있어 정확한 사태를 여기 계신 분들께 전해 듣고자 합니다.”
청문회 자리는 발언자의 목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에 덩달아 기가 눌린 난 침 삼키는 행동조차 조심하게 될 정도였다.
“그대들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란 곳이 실재하며, 세계수의 은덕으로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감히 행해선 안 될 이단 행위가 그곳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모두의 시선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대표구나, 젠장.
“네, 그렇습니다.”
고요는 닥쳐온 태풍에 가지가 휘날리는 나무처럼 깨져 버렸다.
웅성웅성, 경악을 금치 못한 사람들이 불신의 탄성을 주고받고 있었다.
침착하자. 이 자리는 내 죄를 묻는 자리가 아니다. 기죽을 필요 없어.
“덧붙여 이 자리에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만들고 운영해 온 한 사이비 단체에 대해서도 공론화하고 싶습니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의 만행을 1번째 테라리움에 들킨 날, 길드원들은 내 안위를 위해서 끝까지 인페르노의 존재를 숨기자고 말했었다. 물론 나서서 덮어 주잔 얘기가 아니라 직접 나서서 발화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인페르노에 속해 있던 크레아시온조차 보복이 두려워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다가 이젠 내가 보복당할 상황이었다.
난 인페르노를 너무 많이 쑤셔 댔다. 보호막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