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방식으로 1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계수와 가장 근접한 첫 번째 테라리움, 그곳을 수호하는 가지는 그 어떤 테라리움보다 크고 굵었으며 멀리서도 환한 빛이 보였다. 이런 곳에도 밤이 되면 어둠이 내릴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였다.
항상 꿈에서만 봤던 세계수의 윤곽을 두 눈으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와 저게 바로 세계수….”
나무라고 감히 생각지도 못할 거대한 산이 보였다. 마치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처럼 보였다. 그 바로 아래서 퍼 올린 흙을 각 테라리움의 과수원으로 유통한다고 했던가. 영롱한 푸른빛을 머금은 토양은 1번째 테라리움의 전반에 깔려 있었고 한눈에 봐도 특별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지금까지 보았던 테라리움 중에 가장 넓었다. 모든 테라리움들의 정점에 선 곳다웠다.
단순 상징성에 그치지 않고 도시 내부 구조도 그에 맞춰 특이했다. 피라미드와 흡사한 형태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테라리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과수원이 자리했고 그 아래로 층층이 구역이 나눠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높은 바위 지대에 놓인 아크로폴리스 아래로 촘촘히 건물들이 자리잡은 고대 아테네 도시보다도 더욱 본격적인 느낌이었다.
온통 새하얀 건물들은 세계수의 색을 상징하는 듯했으나, 동시에 1번째 테라리움은 고결과 청렴결백, 청결의 상징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티끌 하나 묻지 않는 백색으로 표현하려는 강박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병원과 법원 건물이 새하얀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 백색은 그 어떤 방식보다 1번째 테라리움이 건재하며 부가 넘쳐 흐른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서 외벽이 백색인 건물은 오염이 금방 눈에 띄기 때문에 기피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물론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을 테라리움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모든 건물이 깨끗한 걸 보면, 아주 빡세게 관리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만큼 인력은 물론 유지 비용이 많이 들 것이다.
“역시 다이아 분수가 있네.”
내 테라리움에서 볼 수 있었던 다이아 분수를 어렵지 않게 바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더불어 다이아가 차고 넘쳐 흐른다는 뜻이겠지. 테라리움이 풍족하다는 건 세계수의 가지가 건강히 잘 보살핌 받고 있다는 걸 뜻한다고 했던가.
돔 형태를 취하는 다른 테라리움들의 과수원 건물과 달리, 1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은 높다란 탑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산처럼 끌어 올린 지대, 그걸로도 모자라 마치 세계수의 꼭대기에 닿기 위해 발악이라도 하듯 드높게 세운 과수원 탑.
어쩐지 바벨탑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주민들 수도 많고 직원들 수도 많은 만큼 모든 용무를 수용하기 위해 위로 층을 올리는 구조를 택했을 뿐이겠지. 최선의 공간 활용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 진짜 많다….”
게임으로 치면 모든 유저들이 모이는 만남의 광장, 잠수 타는 캐릭터들이 음악도 없이 춤사위를 반복하는 곳, 장사꾼들의 채팅 도배나 입간판으로 바로 옆 사람의 채팅도 안 보이는 곳, 엄청난 렉 유발에 똥컴은 감히 접근도 못하는 곳, 이 모든 것이 방문하기 전 1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나의 상상이었다.
그리고 상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사람이 정말… 장난 아니게 많았다.
성수기를 맞이한 이름난 관광지처럼 발 디딜 곳 없이 북적거렸다.
갑작스레 도시 내에 등장한 대형 마차로 인해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죄지은 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주목은 부담스러웠기에 난 마차 안에 깊숙이 몸을 숨긴 채 초조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1번째 테라리움은 오랜만이네. 온 김에 맛집도 들렀다 갔으면 좋겠는데.”
“여긴 올 때마다 기가 눌리는 기분이야. 감히 너 같은 애는 올 곳이 못 된다, 그런 느낌 들지 않아?”
“그런데 월렛에 한 푼도 없으면 그 말이 맞긴 하지.”
나와 달리 제퍼와 이리스는 구경 삼매경이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의 구조는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지원군들이 몰고 온 마차로 모든 사람들을 안전지대까지 옮길 수 있었다.
또한 가지 부르기로 인해 안전 루트가 확보된 덕에 큰 전투 없이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지도상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의 경계가 되는 데드라인 등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막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저 불이 모두 태워 버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대지를 달리 이를 말이 없어서 사막으로 부른다는 느낌이었다. 그곳은 어떠한 생명도 살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데드라인은 마치 성 주위를 둘러싼 해자처럼 끝없이 깊게 파인 땅속에 물 대신 빠진 불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내리 떨어지는 경사에 기어오르지 못하는 불이 지옥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그곳을 지날 땐 열기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연금술로 외벽을 특수 처리한 마차가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데드라인은 자연이 스스로 경계를 짓기 위해 지반을 끊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최후의 보루로 파 놓은 함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데드라인의 존재가 그나마 뒤쪽에서 밀려오는 불의 침입을 막는 데 꽤 효과적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곳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지나가며 생긴 의문은 아직까지 해소되지 못했다.
내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으로 처음 향하던 날, 대체 내게 무슨 수를 썼길래 단번에 도착한 느낌을 받은 걸까?
이렇게 인상적인 지역들을 지나고도 아무것도 기억 못 할 정도라니.
뭔지 모를 그 기술이 탐이 났고 구할 수 있다면 값을 부르는 대로 쥐여 주고서라도 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것만 있다면 여행의 피로가 확 줄어들 것 같은데.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으로 갈 때는 순식간이었던 시간이, 나갈 때는 쉴 새 없이 달려서 겨우 지도상 끝자락의 테라리움에 도착하는 데만 해도 꼬박 이틀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새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연이어 터지는 사건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사람들은 모두 안전히 구조됐지만 드라이어드는 예외였다. 그들까지 옮기는 데엔 마차 자리가 부족했기에 인명 구조를 우선시한 것도 있었지만, 그들의 정체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라는 점에서 취급이 조심스러웠던 탓도 있었다.
모든 테라리움의 중심이라 볼 수 있는 1번째 테라리움이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를 이단으로 단단히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구조대가 오롯이 내 테라리움의 인력으로만 이루어졌으면 모를까, 수많은 테라리움들과 기업들이 모여 있다 보니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을 꺼리게 된 것이다.
나와 영혼의 연결을 맺지 않은 공작선인장 역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오겠다고 조를 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쉽게 순응한 채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남는 것을 택했다.
물론 파괴되어 가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그 모두를 버리고 온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몰라도 당장은 내가 불러온 세계수 가지의 축복의 힘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지금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일어난 일련의 모든 사태 고발 및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에 대한 처분을 논의하러 1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한 참이었다.
구조된 관람객들 대부분은 앞 번대 테라리움에서 하차했다. 그들에게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겪은 일련의 사태를 증명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불이익을 두려워해서인지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사회적 체면이 중요한 자들이다 보니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방문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구조만 해 준다면 뭐든 할 것처럼 굴더라도 막상 숨통이 트이니 머리가 맹렬히 돌아간 거겠지.
물론 그들 입장도 이해는 된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엔 너무 많은 위험 요소들이 엮여 있었다.
불을 숭배하는 괴기한 집단이 비밀리에 운영하던 곳, 인공 개량이 대놓고 성행하던 곳, 드라이어드를 전시하고 학대하던 곳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짓밟고 서자는 사상을 주입하던 곳. 이 모든 것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실체였다.
그들은 차라리 내게 금전적으로 보상을 하면 했지, 결코 1번째 테라리움에서 자신이 그곳에 가서 돈을 펑펑 쓰며 즐기고 왔노라 증명할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이번 일은 관람객들의 증언이 꼭 필요했기에 난감하던 찰나에 몇 명의 자원자들이 뒤늦게 나타났다.
구조에 대한 은혜를 갚겠다는 사람, 이제라도 마땅히 옳은 일을 하겠다는 사람, 그중에서도 특이하게도 이쪽이 더 재밌고 흥미로워 보여서 택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전 에우노미아예요. 이번 사건에 대한 청문회는 아무래도 1번째 테라리움의 법원에서 이뤄지겠죠? 전부터 그곳에 꼭 가 보고 싶었어요.”
원래 청문회가 법원에서 이뤄지던가?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법원과는 그 용도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네.
상당히 독특한 목적으로 증인을 자처한 그녀는 놀랍게도 헬 드라이어드의 폭발로 무너져 내렸던 건물 잔해에서 가까스로 구조된 사람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처음엔 정체를 의심했었다. 하지만 인페르노로 의심되는 증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
구조된 직후부터 안전지대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그녀는 사고에 대해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동행인이 있을 거라 추정되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동행인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마차는 법원처럼 보이는 거대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철저한 신분 확인이 진행된 후 내가 탄 마차로 누군가 다가왔다.
“제이 님, 본인 맞으십니까?”
“네, 제가 제이예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이 님을 비롯한 모든 관계자 분들은 절 따라오세요.”
관계자론 내 길드원들과 구조대에 속해 있던 해안 테라리움 연합의 대표 그리고 10번대 테라리움의 대표가 각각 선출됐다. 또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실태를 증명해 줄 관람객 대표 몇몇도 함께였다.
“앗, 제이 님.”
더불어 소식이 전해졌는지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일하고 있을 내 보좌관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블랙 릴리의 그대, 오랜만이야.”
예상 외로 파필리온 역시 대기하고 있었다.
인페르노가 무서워서 16번째 테라리움 안에선 꿈쩍도 못하더니 1번째 테라리움이라고 안심하고 온 모양이었다.
앞으로의 자리는 인페르노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될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그곳에 몸담았던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신나게 달려온 꼴이 참으로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