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8화 (358/604)

“이게 바로 1번째 테라리움에서 유행하는….”

“아무에게나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걸 사려면 멤버십이라는 것에 가입을 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지겨웠다.

상위 1%만 누릴 수 있는 특권? 내가 원하는 건 이런 시시한 말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특히나 잘난 체하는 ‘테사’조차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것이 필요했다.

지금 내게 알랑방귀를 뀌며 상인들이 늘어놓는 물건들은 이미 테사라면 다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게 보였다.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서만 쓰는? 1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만 납품하는? 다 필요 없었다.

그딴 건 다이아만 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키멜리, 보여 주고 싶다는 건 뭐야?”

“음… 네게 특별한 향수를 선물해 주려고 했는데….”

“향수? 후후, 그런 건 됐어. 난 또… 네가 테사는 보여 주지 못한 엄청난 걸 보여 주겠다고 하길래 기대했잖아.”

에우노미아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아니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녀와는 2번째 테라리움의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와 테사처럼 아카데미 학생은 아니었고 외부 초청 강사가 진행하는 수업을 도와주는 아르바이트 생이었다.

그날 첫눈에 반해 연락처를 주고 받았고, 아카데미 졸업 후 부모님의 사업을 도와 지점장 일을 하는 지금까지 열렬하게 짝사랑 중이었다.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테사가 보여 주지 못한 굉장한 경험을 선사해야만 했다.

이미 단둘이 11번째 테라리움의 해안 별장에 여행도 다녀왔다고 했지.

해안 별장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있으니 상관없었으나 그곳에서 열린 파티가 문제였다.

2번째 테라리움의 아카데미가 주최한 동문회가 11번째 테라리움에서 열렸는데 말이 동문회지, 졸업생 중에서도 참가자를 엄선해서 초대장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축하를 명목으로 온갖 저명인사가 방문해서 자리를 빛냈다고 했다.

내로라하는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들부터 대형 길드의 마스터들, 그뿐만 아니라 이름만 빌려줘도 완판을 불러일으키는 유명 드루이드를 포함한 연예인들까지.

나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었지만 초대장을 받지 못했고 테사 녀석은 아카데미 교수로 일하는 어머니를 배경으로 초대장을 얻었다. 그리고 동반인으로 에우노미아를 선택했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그곳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행복한 목소리로 내게 떠들어 댔다.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이 소중했지만, 그걸 듣는 것만큼은 고역이었다.

테사는 이미 날 앞질러 가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그 자식에게 에우노미아를 뺏길 수도 있었다.

“키멜리, 테사가 오늘 밤 오페라를 보러 가자는데 너도 갈래? 특등석 티켓을 꽤 힘들게 구했대.”

결국 그걸 그 자식이 먼저 채갔구나! 관계자에게 뇌물을 잔뜩 먹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걸…!

티켓은 어차피 두 장일 것이다. 내 자리는 없는 게 분명하다. 이번에도 또 둘이 데이트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하다니….

에우노미아를 만족시키는 일은 까다로웠다. 그녀는 현물에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대단한 드루이드들이 보석상에 대기를 걸어 놓고 기다리는 희귀한 태양의 보석이라 할지라도, 유명한 디자이너가 6개월에 겨우 한 벌만 만들어 낸다는 드레스라 할지라도.

손으로 쥘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에우노미아의 관심 밖이었다.

그녀는 조금 특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테라리움은 불의 위협으로부터 아주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항상 불의 침입을 걱정했다.

불이 세상을 위협하는 한, 항상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달고 살았고 살아생전 매시간을 빛나는 순간으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현물에 아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라면 신기해하며 꽤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아주 찰나라는 것이 문제였다.

잠깐 보는 순간에만 예쁘고 어차피 죽으면 다 버리고 가야 한다며 현물에 관심을 두지 않는 대신, 그녀는 ‘경험’에 집착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선 적어도 그 동문회를 뛰어넘는 뭔가가 필요했다.

나와 테사는 오랫동안 에우노미아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같은 나이, 비슷한 집안 수준, 비슷한 아카데미 성적, 태어날 때부터 라이벌이었고, 심지어 좋아하는 여자까지 똑같아 우린 죽는 순간까지 서로 경쟁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집안 때문에 넘쳐나는 다이아와 인맥을 총동원해 에우노미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어지간한 것이라면 이미 에우노미아가 전부 경험해 본 게 문제였다.

뭔가 신선하고 색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할 즘, 그 사람들이 내게 찾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내 부모님들께 찾아왔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네, 선택받은 분들만 즐기실 수 있는 지상 최대의 낙원입니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진귀한 것들을 잔뜩 구경하실 수 있죠.”

처음엔 사업차 방문했다고 착각할 만큼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곧은 자세를 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좋은 인상과 달리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해괴했다.

아무나 갈 수 없다는 최고의 휴양지.

솔직히 대부분의 테라리움에 별장을 가지고 있고, 수준급 드루이드들을 용병으로 써서 외진 지역까지 두루 여행 다녀 본 부모님들 입장에선 그들의 말이 썩 믿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런 부모님도 혹하게 만들었던 말. 지도상엔 없는 지역. 1번째 테라리움조차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는 지역.

그리고 난 직감할 수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에우노미아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다만 비밀리에 운영 중이다 보니 꼭 비밀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은 그리 대단할 게 없어 보였다. 검은색 종이로 만들어진 초대장이 전부였다.

출처를 모르는 이들이 봤다면 단순한 종이 쪼가리로만 보일 법한 것이었다.

“그거 제게 주세요.”

“왜? 그 여자애랑 가게?”

“단순히 연애 문제 때문만은 아니에요… 테사는 그런 곳에 방문해 봤다는 이야기를 한 적 없어요. 테사의 가족은 선택받지 못했다는 거 아닌가요? 제가 먼저 다녀와야만 해요.”

부모님들도 나와 테사의 경쟁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계셨다.

이미 집안은 서로 비등해서 결론이 나지 않으니 자식들이 장성하여 얼마나 더 성공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래? 테사는 아직이라 이거지? 그렇지만 좀 걸리는데.”

부모님들도 특권층이란 배경에 자부심이 많았기에 아무나 받지 않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회원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혹했지만, 1번째 테라리움도 모르는 비밀 장소라는 말이 어지간히 마음에 걸렸는지 쉽사리 초대장을 쥐지 못하고 계셨다.

우리 가족의 많은 사업들이 앞 번호 테라리움들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혹여라도 1번째 테라리움과 척을 질 여지가 생긴다면 하루아침에 집안이 쫄딱 망할 수도 있었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온갖 현혹의 말로 포장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사회적 위신을 고려해 봐야 한순간, 하지만 자신들이 아닌 자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자식의 경우 좀 더 무리한다면 단순한 일탈 정도로 무마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다녀와 본 후 말씀드릴게요.”

자식을 먼저 보내 뒤탈이 없다면 자신들도 가겠노라. 그 설득으로 난 겨우 초대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테사에겐 비밀로 한 채 에우노미아와 함께 드디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방문하게 되었다.

“대단해, 키멜리! 이런 곳은 난생처음이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엔 어떠한 용병도 데려갈 수 없었다. 오직 동행인과 단둘이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지도상에 없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도착한 목적지는 입구부터 탄성이 절로 나오는 굉장한 곳이었다.

예상대로 에우노미아는 뛸 듯이 기뻐했다.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잔뜩 달고 다녔다.

“네가 기뻐하니 나도 기뻐.”

비밀리에 운영된다고 했는데 관람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심지어 부모님의 사업과 관련하여 한 번쯤은 마주친 사람들이나 같은 아카데미 졸업생의 얼굴들도 보였다.

하나같이 특정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거나 재산이 아주 풍족한 사람들뿐이었다.

이렇게 명성 있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걸 보니 정체불명의 장소에 대한 불안감이 사그라들었다.

다들 한통속, 문제가 생겨도 다 같이 묶일 테니 일의 경중이 낮아지겠지.

“천천히 즐기자. 이곳에서 운영하는 여관도 예약해 놨으니 원하는 만큼 놀다 가도 돼.”

더구나 은근한 자부심도 차오르기 시작했다. 명성 있는 자들이 선택한, 증명된 VIP들을 위한 장소, 그곳에 내가 있었다.

“정말 최고야!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 말에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었다. 드디어 에우노미아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테사를 앞질렀다!

에우노미아와 함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각종 볼거리를 즐기는 매 순간순간이 행복했다.

만약 이대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면 미리 귀띔을 받은 곳에서 프러포즈도 할 예정이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오기 전부터 준비한 반지가 담긴 상자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답게만 흘러갈 줄 알았다.

갑작스러운 사고만 아니었다면.

“으아아악!”

“모두 대피하세요!”

“키멜리! 도와줘!”

“에우노미아!”

갑자기 전시관에서 드라이어드들이 탈출했다고 한다.

금방 진압할 거라며 가이드가 우릴 안심시켰지만 일은 점점 커져만 갔다.

우리보다 앞서 대피소로 향하던 무리가 일제히 습격을 받았다.

그래서 가까스로 도망쳤으나 사방엔 이미 드라이어드들에게 공격받아 죽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위험은 드라이어드 습격에서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주변의 드라이어드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 전조도 없이 큰 불을 내뿜으며 터져나갔다.

그 여파에 휘말린 사람들은 단번에 목숨을 잃고, 건물이 무너지고 잔해가 사방으로 튀며 2차 피해를 야기했다.

아비규환 속에 에우노미아와도 헤어졌다.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운 좋게 잘 숨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발… 누가 살려 줘….”

이럴 줄 알았으면 테사에게 초대장을 넘길 것을….

미처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끼리 무너진 잔해에 숨어 구조를 기다리는데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저거… 저거 다 불 아닙니까?”

누군가 어딘가를 손가락질하며 괴성을 내질렀다.

“불? 불이라고? 여긴 불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드라이어드가 모두 저 꼴이 됐는데 퍽이나 안전하겠습니다! 젠장!”

정말로 멀리서부터 엄청난 불길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태어나면서 본 불을 모두 합쳐도 저 군단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거리가 상당해도 벌써 주변이 열기로 후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우린 다 죽었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초대장을 받은 순간부터? 앞뒤 따지지도 않고 에우노미아와 냉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으로 향한 순간부터? 아니… 에우노미아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뭐든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어찌 됐든 이제 죽음만이 남았다.

드라이어드들의 습격을 피하고 그들이 터져나가는 것도 어찌저찌 피한다 하더라도… 결국 모든 것이 불에 타 버릴 것이다.

모두가 절망에 빠진 채 세계수를 향해 기도를 하며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는 순간….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주변에 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래? 저거 다 모래 아닙니까?”

“모래라고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너도나도 은신처에서 뛰쳐나와 하늘을 우러러봤다.

살면서 그토록 위대한 광경은 처음 봤다.

때론 금빛으로 때론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하늘까지 뒤덮고 있었다.

모든 빛을 차단해 세상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불길한 사고가 터지려는 징조론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우리 모두를 지켜 주는 견고한 방패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사… 살았다! 살았다!”

모래 벽이 생겨남과 동시에 주변에서 쉴 새 없이 터지던 굉음도 뚝 끊겼다.

“대체 저건 무슨 조화인 거죠?”

“드루이드… 드루이드가 아닐까요? 이곳에 우릴 지켜 주기에 위해 대단한 드루이드가 나타난 것이 분명해요!”

이게 정말 드루이드의 힘이라고? 그렇다면 그 드루이드는 신이 아닐까?

어찌 됐든 우린 드디어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래 벽이… 모래 벽이 사라지고 있어요!”

“어째서…. 계속 우릴 지켜 주려던 게 아니었나요?”

모래 벽은 언제 나타났냐는 듯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주춤했던 불이 다시금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향해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전과 달리 드라이어드들이 갑자기 불을 향해 달려들며 막으려고 하는 기세가 느껴졌지만 아무리 봐도 역부족이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통째로 타 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느껴졌다.

밀려 들어오던 불은 드라이어드의 공격을 피해 한두 개체씩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속으로 흘러들어왔고, 우린 다시 은신처에 몸을 숨긴 채 먹이를 찾아 꾸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불을 보며 덜덜 떨어야만 했다.

두 번의 기적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래 벽을 세웠던 그 드루이드는 정말 신이 맞았는지, 아니면 세계수가 이곳에 강림한 것인지.

다시금 하늘에 기적의 빛이 비쳤다.

우린 그걸 보며 확신했다. 우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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