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6화 (356/604)

‘너의 뜻을 따르겠노라.’, 내 손등에 와 닿은 메스키트의 입맞춤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드라이어드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데저트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은 들으라!”

그래프트가 끝나자 무너지는 모래 성벽 사이로 불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혼비백산하며 도망가던 드라이어드들은 천지를 울리는 메스키트의 장엄한 목소리에 일제히 멈춰 섰다.

그들을 향해 메스키트가 손을 뻗자 손길을 따라 금빛으로 빛나는 모래의 길이 퍼져 나갔다.

그 모래 길은 갈수록 영역을 넓히더니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스며들어 거대한 경계를 만들어 냈다.

마치 영역 선포를 한 것처럼 거대한 사막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한쪽에 나타났다.

모래의 흐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멈춰 선 드라이어드들의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일부 드라이어드들은 주변에 회전하는 금빛 고리가 생기며 환하게 빛을 냈다.

“내 부름에 응답을 받은 규율 협약자들이여, 그대들이 태어난 근본을 모른다 하나 영혼의 울림은 사막의 강렬한 열기를 향해 부르짖고 있다.”

어쩌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대다수 드라이어드들은 공작선인장과 헬 드라이어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지는 심각할 경우 자생 필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겠지.

그러나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인 메스키트가 모종의 힘을 사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부 드라이어드들에게서 반응이 나타났다. 아마 그들의 자생 필드가 바로 데저트 필드일 것이다.

“몰랐다면 지금부터라도 듣고 깨달으라. 우리 데저트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은 강인한 사막의 전사. 뜨거운 태양 아래 열악한 모래 위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이 우리들의 모체다! 우린 나약하지 않다!”

이를 보고 있던 실새삼도 자리에서 일어나 드라이어드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바이오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은 듣거라.”

메스키트에 비하면 작은 목소리였으나 결코 무시할 수 없도록 듣는 이들에게 가시처럼 첨예하게 파고들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실새삼의 연설은 착실히 퍼져 나갔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지반이 작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붉은 빛이 드라이어드들 사이를 넘나들었으며, 일부 드라이어드들에게 빛이 깃들어 회전하는 고리를 만들어 냈다.

바이오 필드는 영역 선포라고 느껴질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생물에 기생하여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부름에 응답을 받은 규율 협약자들이여, 움츠린 나약한 영혼이라도 그 안에 강한 의지는 존재한다. 갈망을 좇아 일어서라.”

자생 필드가 바이오 필드임을 뜻하는 붉은 빛의 고리는 데저트 필드에 비하면 확연히 수가 적었다.

그러나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밝기는 데저트 필드에 지지 않게 아주 선명하고 밝았다.

“무지하다면 지금이라도 듣고 배우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무대다. 우리의 모체는 약탈자지, 빼앗기는 자가 아니다. 긍지를 가지고 만인에게 군림하라.”

메스키트의 연설이 숱한 이들의 가슴속 열망을 자극해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느낌이었다면, 실새삼의 연설은 귀족들을 향해 품위를 지키라며 엄하게 나무라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어린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은둔자의 정원에서 봤던 성체의 실새삼은 고귀한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둘의 연설이 통했던 것일까, 빛의 고리를 둘러 확실히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드라이어드들은 우왕좌왕하던 것을 멈추고 무기를 들었다.

전처럼 혼란을 표출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며 난동을 부릴 태세론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 목표는 오롯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불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가 행동에 앞서 우물쭈물 발을 꼬며 시간을 버는, 그런 느낌이었다.

철컥.

메스키트는 투구를 장착하고 양손에 방패와 랜스를 들었다.

쿵!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메스키트의 거대한 신체와 육중한 장비의 무게 때문에, 그녀가 뛰어내린 곳 주위로 큰 소리와 함께 움푹 땅이 파였다.

“사막의 전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우리의 뿌리가 굵고 곧은 이유는 뜨거운 대지에 망설임 없이 첫발을 내딛기 위함이다! 언제까지나 떨어질 비를 하염없이 기다리지 말라! 우리가 강인한 마음으로 버티는 한 언젠간 영혼을 적실 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아직까지 망설이는 드라이어드를 향해 호되게 소리치며 불과 맞부딪히는 최전선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멈춰 서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메스키트가 거대한 군대를 이끄는 선봉장처럼 보였다.

“모래에서 나고 자란 것들은 언제나 호전적이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실새삼이 혀를 쯧쯧 차며 작게 말을 내뱉었다.

그 역시 직접 전장에 나설 모양인지 걸어 나갔으나 메스키트처럼 단번에 드라이어드들의 중심으로 향하진 않았다.

그는 어떤 때보다도 느긋하고 여유롭게 움직였다.

“군림하는 자들이여, 머리를 굴려라. 지혜롭고 현명하게 대처하라. 우리의 뿌리가 가늘고 길며, 그 어떤 것들보다 널리 뿌리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사방의 모든 환경을 우리의 무기와 다름없이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내놓지 않는다면 빼앗고 그래도 내놓지 않는다면 파괴하라. 아군이든 적이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하라. 그리고 살아남아라. 마지막에 몸을 적시는 비는 오직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실새삼은 선봉에 서는 메스키트와 달리 뒤에서 바이오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전두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약 완전히 성장한 상태였다면 다른 양상을 보여 줬을 수도 있으나, 그 행동에 반감을 갖는 드라이어드는 아무도 없었다.

왕좌에 앉아 신하를 부리는 왕처럼,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 실새삼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그들이 맡은 방향은 메스키트의 군대가 향한 곳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불은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어느 한쪽만 방어하는 것이 아닌, 전략적으로 양방향을 방어하려는 의도였다.

드드드드.

두 필드의 가디언이 비로소 전장에 뛰어들었을 때 핸드폰이 아무런 알림음 없이 세차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금빛 나뭇가지 문양이 핸드폰의 겉면을 휘감더니 눈부신 빛을 뿜어냈고 동시에 둥근 홀로그램 창이 둥실 떠올라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은둔자의 정원에서도 이러한 이상 현상을 보인 적 있었으나 조금 달랐다.

중심에서 사방으로 10개의 선이 뻗어 나간 별처럼 보이는 도형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중 단 두 개의 선만 선명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한 개의 선을 인지하자 그 옆에 작은 문구들이 떠올랐다.

현재 필드에 데저트 필드의 가호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일대 모든 드라이어드들의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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