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5화 (355/604)

드디어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아닌 척해도 난 그녀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초조했었다.

그녀와의 교감은 충분한데 아무리 때를 기다려도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가 조금만 더 부정적인 생각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이었다면, 난 그녀의 진정한 주인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열등감에 시달려 스스로를 좀먹어 갔을 거다.

광범위한 지역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그래프트만큼이나 속이 후련했다.

누가 사막의 나무가 아니랄까 봐, 역경에 역경이 들이닥치니까 비로소 내게 꽃을 피워 준다.

온 시야에 한결같이 가득 찬 모래 벽은 엘더의 그래프트에 비하면 화려하지 않았으나, 수수하다 평하는 벨벳 메스키트 꽃이 하늘 가득 뻗은 가지에 잔뜩 피어나니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는 것처럼 그래프트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이롭든 해롭든, 범위 내 모든 드라이어드의 스킬을 원천 차단하여 무(無)로 돌리는 그래프트라니.

참으로 굳건한 방패를 쥔 방어의 화신다운 그래프트였다.

우습긴 해도 이 상황에서 서버를 닫고 점검에 들어간 게임이 떠올랐다.

그래… 아무리 캐릭터가 미쳐 날뛰며 전장을 평정해도, 치명적인 버그가 게임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어도. 서버 점검 앞에선 무력하지.

그만큼 나와 메스키트의 그래프트는 너무나 경이로운 나머지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후우….”

그래프트를 위해 내 영혼에 직접 접목된 메스키트의 영혼은 너무나도 묵직해 온몸이 뻐근할 정도였다.

엘더의 수 배는 되는 것 같은 중압감에 내 몸은 겉으론 한없이 나무에 가까우면서, 한편으론 속은 거대한 바위로 들어찬 기분이었다.

이게 바로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이라 불리는 드라이어드의 영혼이 갖는 무게. 그 무게가 다시금 내가 감당해야 할 미래를 일깨우는 듯했다.

“…….”

자폭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 드라이어드들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죽음을 직감하고 최대한 나에게 멀리 떨어지려 바닥을 기어가던 공작선인장도 멈춰 섰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이변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눈물로 잔뜩 젖은 눈으로 울먹울먹 날 바라볼 뿐이었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래프트는 눈앞에 닥친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결해 주었으나, 우리에겐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내부의 불은 막았으나 외부의 불이 문제였다.

당장은 그래프트로 인해 펼쳐진 두꺼운 모래 벽이 견고하게 수비해 주고 있었으나, 그래프트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금 쳐들어올 것이다.

본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방어를 맡던 드라이어드들이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리고 수습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미 늦었다.

방어는 한 번 뚫리면 속수무책이었다.

댐에 난 구멍이 물살을 못 이겨 결국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처럼, 드라이어드들이 떠밀려 이룩한 방어벽은 겨우 얼기설기 벽돌을 끼워 넣어 만든 수준에 불과했다.

언제까지고 메스키트와 그래프트를 펼치며 막아 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황금빛 모래 벽엔 물기를 가득 머금은 푸른빛이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드루이드와 그래프트를 펼쳤다면 단순한 모래 벽이었을지도 모른다.

엘더와의 그래프트가 그랬듯, 이번에도 내 다이아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래가 단번에 으스러지지 않도록 수분이 되어 끈덕지게 모래들을 움켜잡아 내구도를 올려 줄 뿐만 아니라 유지 시간까지 늘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무한 다이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그래프트엔 결국 끝이 존재할 거다.

다이아 제로가 야기한 결과를 몸소 체험해 봤으니 또다시 사경을 헤매고 싶지 않다면 적절한 때에 그래프트를 끊어야만 했다.

외부에서 침범하는 무수한 불을 막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번엔 그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다.

메스키트의 영혼이 날 감싸며 역경을 이겨 내라 응원하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수많은 드라이어드들, 혼란에 가득 차 날뛰는 수많은 드라이어드들….

그들은 세계수가 이 세상에 내보낸 불의 유일한 대적자였다.

시야에 가득 담긴 저 수많은 드라이어드들이야말로 이 상황에 맞설 수 있는 최선의 병력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혼란에 혼란이 중첩되어서인지, 사실상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일말의 이지조차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야만스럽게 굴고 있었다.

애초에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폐쇄된 인위적인 환경에서 사회성 부족으로 길러진 드라이어드들이었다.

자연에서 태어난 야생의 드라이어드였다면, 지금쯤 그래프트가 펼친 모래 벽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 태세를 가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을 움직이는 모든 기준점들이 무너져 내렸다.

공포로나마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협력 행동을 꾀할 수 있도록 압도하여 지배했던 왕의 허상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묶어 두던 모종의 힘이, 유리관에 갇혀 있던 모든 드루이드들이 사망하며 끊겨 버렸다.

그렇다고 등에 칼을 들이밀고 강제로 적진으로 내몰 인페르노도 없었으며, 이 수많은 드라이어드들과의 영혼의 연결을 감당할 수 있는 드루이드도 없었다.

이 모든 외압들이 작용하지 않게 될 때, 드라이어드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야만 했다.

보통의 드라이어드들이라면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이 일깨워 준 드라이어드의 사명과 필드의 규율을 기반을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모든 드라이어드가 규율의 협약자입니다. 드라이어드는 필드의 한 자리를 빌린 만큼 그 필드의 자연이 정상적으로 순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임무가 있습니다.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야죠.”

인삼 드라이어드의 목소리가 현 상황을 질책하듯 떠올랐다.

“그건 그곳의 종을 대표하여 그곳에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뿌리 박힌 것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 딛고 선 필드를 불의 침범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지켜 낸 자리에 다시금 새로운 생명들이 싹 틔워 자연이 순환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드라이어드들은 확고한 의지로 맞서 싸워야만 했다.

저 드라이어드들에게 결핍된 것은 ‘필드의 규율’이었다.

“필드의 가디언이여….”

지금이야말로 필드의 수호자들이 나서서 방황하는 아랫것들의 영혼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때였다.

그래프트가 끝나자 내게 붙어 있던 메스키트의 영혼이 훌쩍 떨어져 나갔다.

손에 쥐여 있던 방패의 무게감이 점차 변하더니 어느새 메스키트의 형태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가 방패를 잡고 있던 그 손 그대로 자신의 손을 대신하여 떠받든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라락.

지반을 훑는 바람과 같은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메스키트의 반대편을 채웠다.

어느새 실새삼이 다가와 메스키트처럼 날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린 모습 때문에 메스키트와 다르게 다소 과장된 몸짓처럼 보여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태도와 풍겨 나오는 남다른 위압감이 그 역시 바이오 필드를 수호하는 가디언이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필드의 규율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했음을 스스로가 말해 왔었지.”

지금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데는 그들의 직무 유기도 한몫했을 거라는 건데.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가디언의 의무를 다해야 할 때야.”

그렇다면 왜 필드의 가디언들은 이리 되어 버린 것일까?

내 다그침이 무언가의 신호탄이 되었는지, 메스키트와 실새삼의 주위로 금빛 오라가 하늘하늘 피어났다.

문득 아티팩트를 채운 왼팔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팔에서 시작된 온기는 빠른 속도로 심장을 향해 번져 갔고 온몸이 기분 좋은 열기로 가득 찼다.

시야가 환하게 개안했다.

쿠구궁.

둘의 주위로 거대한 석판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눈먼 축복이 영혼에 투영된 곳곳의 세상을 살피며 눈을 뜨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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