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4화 (354/604)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엔 아직 수많은 생명들이 대피하지 못한 채 끝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겁에 질려 은신처에서 나오지 못한 관람객들이 있을 테고, 자연을 수호하겠다며 뛰어든 네이처 키퍼의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을 거다.

이 일의 원흉인 인페르노는 잽싸게 발을 뺀 지 오래겠지.

그 모든 생명들이 나와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내가 배운 도덕과 양심은 마땅히 그들의 절망에 공감하고 있었다.

끌려온 공작선인장은 널브러진 채로 숨만 겨우 헐떡이고 있었다.

고집스런 내 무응답에 결국 드라이어들은 공작선인장도 건물 밖으로 탈출시켜 줬다.

하지만 만일을 위해 우린 그녀와 멀찍이 떨어진 채였다.아파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가득 쟁여 둔 값비싼 포션도, 남들이 우러러 보는 희귀한 드라이어드도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마구 뒤엉켜 시작을 알 수 없는 실타래처럼 복잡한 감정이 나를 뒤흔들었다.

이런 결말이 펼쳐질 거라는 걸 이 세계의 위대한 존재라는 세계수는 알고 있었을까?

내 꿈에 찾아와 마냥 울기만 하던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보여 준 건, 단지 이 참상을 직접 겪고 절망하라는 계시였을까?

그건 구조 요청이 아니었어? 애초에 도움을 요청한 건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깔려 있었던 거 아냐? 그런데…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제이….”

망부석처럼 굳어 버린 내 어깨에 내려앉은 손길이 느껴졌다.

메스키트 역시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달려도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건 모든 것을 초기화하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어쩌면… 내가 잘못된 선택지를 고른 걸지도 모른다. 내 주제를 생각했어야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방문하는 건…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선택지였던 것이다.

난….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엄두도 못 내는 두 개의 가드너 스킬부터 아주 희귀한 장비 강화 능력까지.

이 정도의 힘이라면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자들을 쉽게 구해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은둔자의 정원을 빠져나왔을 땐 불가능에 가까웠던 자연재해와도 맞서 싸워 이겼으니까.

하지만 자만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작 내가 정을 준 공작선인장 드라이어드 한 그루조차 구해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나라니.

엄습해 오는 절망감에 그대로 내 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제이, 정신 차려요!”

양어깨가 거칠게 붙잡혔다.

밑도 끝도 없이 부정적인 생각 속으로 파고들려던 날 다그치듯 호박색 눈빛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내 마음에 잠식된 어둠을 걷어 내겠다는 모양새로 태양 같은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이는 이렇게 포기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우린 그동안 수없이 많은 위험들을 이겨 냈어요. 난 하나밖에 없는 내 소중한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숨 쉬듯 느껴 왔어요. 내 소중한 존재는 항상 그런 위험들에 거침없이 뛰어들었으니까요.”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제이는 모를 거예요. 전 제게 주어진 모든 위명들이 부질없을 만큼 겁쟁이예요. 내게 당신이란 존재가 각인된 이후부터 당신을 잃을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겁이 나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통제하고 만류하지 않았던 이유를…. 당신은 알고 있나요?”

메스키트가 평정심을 잃고 소리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위기의 순간이 오더라도 그녀만큼은 항상 침착하게 팀의 중심이 되어 주었다.

그녀의 존재는 내가 감정에 동요되어 흐트러지고 막막해져도 끝내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등대와 다름없었다.

“그건 당신이 그 어떤 일이라도 결국은 해내기 때문이에요. 제이는 모두가 불가능하다 여겼던 일을 보란 듯이 해치웠잖아요?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여느 때와 같이 제 곁으로 돌아왔어요.”

약간의 조바심이 섞인 말투가 날 다그친다.

“당신은 사막의 태양과도 같아요. 하루도 빠짐없이 늘 같은 자리에서 떠올라 광활한 대지를 평정한 모래 한 알 한 알에 깃들죠.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가로막아선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아침이 올 때마다 가르쳐 주는 거예요. 뜨겁게 타올라 내가 항상 그 자리에 있음을 각인시켜 주는 존재. 당신은 그래요. 밤이 온다고 영영 사라질 존재가 아니에요. 난 그걸 알기에 당신을 붙잡을 수 없어요.”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을 잠시 잊고 제게 집중하라는 것처럼 강렬한 스모키향이 풍겨 왔다.

“제이는 항상 겁쟁이인 절 다그치듯 모든 걸 이겨 냈어요. 태양처럼, 어떤 상황이 와도 항상 제 곁에 있어 줄 거라고 믿음을 줬다고요.”

“메스키트….”

“제이… 정신을 차려요. 여태 해 왔던 것처럼 길을 찾아요. 태양은 비단 사막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떠올라요. 그곳에 어둠이 있기에 밝혀야 한다는 것처럼, 회피하지 않고 빛을 내요. 이곳에 떠오른 당신은 결국 빛을 낼 거예요. 당신을 할 수 있어요.”

등대라 여겼던 이가 나는 그보다 더 밝은 태양이라 말한다.

이동하는 뿌리가 누군가를 탐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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