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2화 (352/604)

노인의 방을 찾는 건 수월했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기대어 서 있던 복도엔 문이 단 하나만 존재했다.

철컥.

찔러 넣은 열쇠는 홈에 매끄럽게 맞물렸다.

상당한 비밀이 잠들어 있을 노인의 방을 수색한다는 선택지.

그렇다고 내가 그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른 것은 아니었다.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것이었다. 열쇠를 사용해 잠긴 문을 열어 둔다.

이 행동만으로도 나 말고 다른 이들도 이 방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덜그럭, 텅, 텅.

굳이 조명등에 끼워 넣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조명석을 두어 개 복도에 던져두었다.

멀리서 봐도 희미하게나마 빛을 발하는 조명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이 건물에 나 말고 다른 침입자가 있는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그자가 우연찮게 이 복도를 지나가다 조명석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열쇠가 꽂힌 의문의 방을 발견해 준다면…. 나 대신 인페르노의 은밀한 비밀들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어쩌면 수많은 우연이 만들어 내야 할 기적이지만, 처음엔 불가능에 가까웠던 확률을 이젠 일어날 법한 확률로 만들어 냈다.

“그래, 이게 최선이지. 가자.”

결국 내가 고른 선택지는 헬 드라이어드를 쫓는다는 첫 번째 선택지였다.

건물 내부는 폭풍전야처럼 조용했다.

공작선인장은 넓고 복잡한 건물 안에서도 이미 앞서 나가 버린 지 오래인 헬 드라이어드의 흔적을 족족 찾아냈다.

얼마나 뛰어다녔을까, 비로소 목적지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

삐이이이익. 위잉, 위잉.

고요했던 분위기는 멀리서부터 흘러나오는 경고음으로 인해 깨졌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무력으로 열어젖힌 것인지 뻥 뚫린 벽에선 아직까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벽 너머로 사이렌 소리를 따라 붉은 조명이 깜박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때부터 안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내 드라이어드들을 불러내 곁에 뒀다.

헬 드라이어드가 뒤도 보지 않고 달려서 도착한 이곳엔 대체 뭐가 있을까?

안으로 걸음을 내디딜수록 긴장감이 날 억눌렀다.

철벅, 철벅.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 사이로 물기 젖은 내 발소리가 귀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약간의 점성이 있는 푸른빛 액체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기계 장치들이 어지러이 자리 잡은 넓은 공간에서 내 시야를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기둥처럼 자리한 거대한 유리관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유리관을 비롯해 당장 시야가 닿은 곳까지의 유리관은 모두 박살 난 후였다.

바닥을 적신 액체는 아무래도 유리관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보였다.

발밑에 떨어진 유리 조각은 제법 두꺼웠음에도 처참하게 깨진 상태였다.

“헙!”

유리 조각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희끄무레한 물체를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이 유리 파편들 뒤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것으로 보였는데, 상태가 썩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 민둥한 머리에 살가죽만 겨우 달라붙어 있는 듯한 가느다란 팔다리, 햇빛을 본 지 오래된 것처럼 새하얀 피부와 달리 검게 푹 꺼진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코와 입에 씌워진 산소 호흡기가 그것이 바로 전까진 생명이 있었던 존재라 말해 주고 있었다.

너무 비정상적인 모습이라 사람이라기보단 오히려 인형처럼 느껴졌다.

유리관 안쪽과 연결된 전선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몸을 칭칭 옭아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체불명의 사람은 본래 유리관 안에 있다가 유리가 깨지며 액체에 떠밀려 밖으로 내던져진 것으로 보였다.

“이게 다 뭐야…”

대체 왜 이 사람은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있었단 말인가?

더 놀라운 것은 똑같은 참변이 유리관과 멀리 떨어진 곳에 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부 다 헬 드라이어드의 짓인 걸까?

“이건… 드루이드의….”

엘더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끔찍해서일까,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뭐? 이 사람이 드루이드였다고?”

간신히 혼란한 마음을 추스르며 주변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냉기가 가득한 유리관 아래엔 일직선을 그리는 그래프만이 화면에 나타나는 모니터와 함께 작은 팻말이 딸려 있었다.

팻말엔 ‘퍼펫’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이건 설마 이 사람의 이름인 걸까?

“저건 멀쩡해 보이는데.”

또 다른 박살 난 유리관으로 향하려는데 실새삼의 말이 날 멈춰 세웠다.

반대 방향엔 어둠 속에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멀쩡한 유리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 유리관은 텅 빈 채였다.

해당 유리관 아래에도 역시 팻말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알아볼 수 있는 단어가 아닌 ‘S.C’라는 약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빈 유리관에도 원래는 예정된 주인이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그 사람에겐 다행일지도 모른다. 유리관 안에서 액체 속에 잠겨 있다가 저 시체와 같은 끔찍한 꼴이 되느니, 텅 빈 유리관이 영영 주인을 찾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힘겹게 발걸음을 떼 또 다른 박살 난 유리관을 향해 갔다.

역시나 똑같은 몰골을 하고 널브러진 시체와 더불어 단어가 적힌 팻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테리쿨라.

살아생전 드루이드였으며 팻말에 단어가 적혀 있단 것 외엔 둘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대체 왜 이 정체불명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흐흐…”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저 멀리 또 하나의 유리관이 보이는 곳 아래에 타닥타닥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토록 찾던 헬 드라이어드가 마치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유리관을 껴안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헬 드라이어드는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우릴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부상을 입었다는 두 눈이 섬뜩하게 이쪽을 노려봤다. 하지만 초점이 명확하지 않은 걸로 보아 아직까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듯했다.

우리가 당도한 이곳의 처참한 광경은 모두 저 헬 드라이어드의 짓인 것이 분명했다.

“훅… 훅….”

헬 드라이어드의 호흡이 갈수록 거칠어졌다.

초점 없는 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헬 드라이어드는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상당히 여유가 없어 보였다.

“끄으… 돌려내….”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헬 드라이어드의 시선이 멈춰 선 곳엔 나와 공작선인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망가지고 있어…. 이럴 순 없어….”

공작선인장은 자신을 향해 뻗어 나오는 악의에 완전히 굳어 버렸다.

헬 드라이어드는 그 말처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끝없이 불타오르는 발화선에 휘감긴 채로도 멀쩡했던 바크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피부에선 진액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나 때문인 거야?”

“저 말은 듣지 마.”

“하지만 아파하고 있어… 나 때문일지도 몰라.”

헬 드라이어드의 약한 소리는 순진한 공작선인장의 양심을 제대로 후벼 팠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이유가 제 손에 쥐어진 돌 때문이란 것을 눈치챘는지, 돌을 쥐고 있는 손을 덜덜 떨었다.

공작선인장이 헬 드라이어드의 일부 능력들을 봉인시키거나 약화시킴으로써 망가지는 데 가담했을지언정, 헬 드라이어드가 저 꼴을 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페르노와의 전투로 인한 대미지 축적과 온몸을 휘감은 발화선 때문이다.

“내게도 있었던 거야. 난 다시 강해질 수 있어….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어.”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뜻 모를 소리가 발작처럼 터져 나왔다.

여태 내가 본 박살 난 유리관과 달리 헬 드라이어드의 옆에 있는 유리관은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불어 안엔 예상했던 대로 똑같은 몰골의 사람이 푸른빛을 띠는 액체에 잠겨 있었다.

혼란스러운 광경 속에서 그래프가 규칙적으로 요동치는 모니터가 시야에 잡혔다.

설마 저게 심전도를 보여 주는 모니터였어?

그럼 헬 드라이어드의 공격으로 인해 유리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생명이 다한 것이 맞았고, 유일하게 그래프가 요동치는 유리관 안의 사람은 아직 생명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여기였군. 영혼의 연결을 흉내 낸 실이 시작되는 곳이 말이다.”

실새삼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 실이 저 사람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어쩌면 모두였을 수도 있고.”

애매한 답변이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드라이어드들이 드루이드가 없어도 아무런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

그 모든 해답이 어쩌면 유일하게 살아 유리관에 갇혀 있는 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폐한 땅에 다시 초목을 불러올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한 목숨을….”

불현듯 과거를 헤매는 듯한 아련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헉….”

갑자기 잔잔했던 유리관 안에 부글부글 공기 방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은 듯이 액체 속을 떠다니던 사람의 눈이 번쩍 떠졌다.

텁!

새하얀 손이 유리 벽을 짚었다.

그 바람에 곁에 붙어 있던 헬 드라이어드가 움찔 놀라며 유리관에서 떨어졌다.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리관 안의 사람과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자는 유리 벽을 짚지 않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유리 벽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헬 드라이어드 때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던 난 그 뜻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자는 고집스럽게 내게 눈을 마주치며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꼭 내가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픽.

일순 번개라도 내려친 것처럼 시야가 번쩍였다.

‘갈피 잃은 모든 꽃은 스스로 타오른다.’

동시에 알 수 없는 문구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게 저자가 내게 전하고자 한 말인지, 경황없이 떠오른 문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그자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는 건 확실했다.

적는 행위가 끝나자 뜬 눈이 다시 감겼고 두 팔이 축 처졌다.

그리고 요동치던 심전도 모니터의 그래프 역시 다른 박살 난 유리관들과 다름없이 일직선을 유지했다.

갑자기 헬 드라이어드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상 현상은 헬 드라이어드에게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아….”

공작선인장 역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양어깨를 끌어안고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지척까지 다가온 불길한 기운을 표현하듯, 방 안을 시끄럽게 울리던 경고음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노인이 예고했던 무언가가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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