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0화 (350/604)

가만 보니 애쉬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저 새빨간 눈. 좀 더 정확하게 따져 보려면 그녀가 젊었을 적 모습을 알아야 하겠지만, 어쩐지 분위기도 좀 닮은 듯하고?

아니, 애초에 엄마라는 말이 날 현혹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라면?

그저 그런 말을 듣고 나니까 묘하게 닮아 보이고 그러는 게 아닐까?

“꽤 과격한 아이였지?”

“…….”

“짊어진 게 많다 보니 독단적인 성격이 됐단다. 스스로 적을 만드는 타입이지, 그 아이는.”

애쉬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후,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많이 허비하진 않을 거예요. 저 진짜 딱 궁금한 거만 해결하고 바로 갈 거거든요! 대체 제가 애쉬를 알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설마… 떠본 거예요?”

만약 떠봤는데 내가 좋다고 걸려든 것이라면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것 같았다.

“내 아들을 매몰차게 내쫓은 젊은 여자가 한 명 있다고 했지.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그 이야기란다.”

“그렇게 소박맞았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말아 주실래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어쩐지 장난기가 섞인 말투라 더욱 약이 올랐다.

“애쉬와 겉으로 드러나게 반목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다들 짧은 생을 살고 가기 때문에 쉽게 특정할 수 있지.”

적이 되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잖아. 파필리온을 대할 때 지나치게 난폭한 성격인 건 알았지만…. 상당히 잔인한 사람이었네. 양어깨가 오싹했다.

“난 처음에 그게 은발 아가씨인 줄 알았지. 델어닝이라고 했던가? 애쉬를 제대로 물 먹였다지? 우리 사이에서 꽤 소문이 자자하게 났었어.”

“어닝….”

“하지만 역시나 오래 살긴 했어도 이미 그 아가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그런데 여전히 애쉬가 그 여자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하고 있는 걸 보니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인물임이 분명한데….”

“절 캐고 다니고 있단 말이죠….”

역시 날 가만 내버려 두고 있는 건 아니었네. 그렇다면 혹시 내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오게 된 사실도 알고 있을까?

“후후, 보통은 다들 애쉬의 눈에 띄지 않게 숨죽이고 사는데 어찌나 활발하게 움직이는지 잡는 게 도통 쉽지 않은가 봐. 그래서 어쩌면 머지않아 나와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사실 이렇게 장황하게 추리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여도 그 여자가 그쪽이란 건 인적 사항을 들었기 때문에 눈치챈 거야. 겁도 없이 이곳에 들어선 걸 보고 확신이 들었고.”

결론은 애쉬와 반목했는데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서 잘만 돌아다니는 바람에 정체를 들켰다는 것이다.

“걘 당시에 쫓아내는 거밖엔 방법이 없었어요. 이 정도면 꽤 인도적인 처우 아닌가요?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날 죽이려 들겠다는 건 알겠네요.”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았다고 들었는데.”

“그 연금탑이 그저 장난감이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소름이네요. 그건 그렇고 걘 대체 어떻게 막돼먹은… 녀석이길래.”

아무리 적이라 해도 모친 앞에서 험담하는 게 쉽진 않았다.

“그렇게 답도 없이 세요?”

“애쉬는 역대 베스탈리스들 중 가장 태양에 근접하단 평을 받는 강력한 아이지.”

하긴 지상에 뜬 태양 그 자체였지.

“베스탈리스는 여자만 될 수 있다던데.”

하지만 과거엔 여자만 살아남았던 베스탈리스들인데 어떻게 남자인 애쉬가 가장 강하냔 말이지.

“그런 것도 알고 있다니, 역시 쉽게 볼 아가는 아니었구나. 그래, 본래라면 애쉬는 태어날 수 없는 아이였긴 하지. 내게서 태어났으니 더욱. 아마 애쉬가 여자였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물밑에서만 조용히 움직이진 않았을 거란다.”

“…….”

난 잠깐 동안 말을 잃었다. 애쉬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지금 보다 더 괴물이었을 거란 말인가?

내가 만났던 애쉬는 당시에 쫓아내는 것 외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선보였었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이 낳았으니 애쉬가 강하다고 표현하는 저 노인은?

눈앞의 노인 역시 애쉬만큼 강한 힘을 낼 수 있다는 건가?

애초에 도망친다는 선택을 했어도… 성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대화로 날 붙잡아 준 것이 말 그대로 지극히 인도적인 처우인 거면 어떡하지?

“그런데도 살았잖아요. 애쉬도 샘의 원천… 그 씨앗을 먹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건가요?”

내 말에 그녀는 의외라는 얼굴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오호라, 거기까지? 이건 확실히 내부 사람들에게 들은 정보일 텐데. 누굴까? 이런 귀중한 정보를 외부인에게 공개해 버린 사람이.”

난 로웰라의 취조에 얼떨결에 정보를 불어 버린 미미르를 떠올렸다.

“변절자 녀석들 중 하나겠군. 정말이지, 우리끼리 뭉쳐 단단해져야 하는데 자기들만 살겠다고 뛰쳐나간 머저리 녀석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변절자는 아무래도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을 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맞아, 샘의 원천을 삼켰지. 그것도 열 개를 말이야. 어쩌면 수백 명의 베스탈리스들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샘들을 파괴하면서까지 태어난 것이 애쉬란다. 그래서 그 아이의 어깨엔 수많은 생명의 짐이 얹어져 있지.”

미미르를 살리기 위해선 샘의 원천 한 개가 소모됐다.

미미르의 어머니 역시 대대로 강한 베스탈리스였기 때문에 샘의 물을 마시는 걸로 그치지 않고 강력한 불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샘이 메말라 버릴 것을 각오하고 샘의 원천을 희생시켰다고 했다.

하지만… 애쉬가 태어나기 위해선 그 열 배의 샘의 원천이 소모됐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눈앞의 노인은….

긴장으로 인해 침이 꿀꺽 넘어갔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빨리 오게 됐다면, 어쩌면 내 적은 애쉬가 아니라 눈앞의 노인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스스로가 노쇠해서 예전만큼 힘을 못 쓰겠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긴 했으나… 여태 들은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그녀는 전성기 시절 그 어떤 베스탈리스들보다 강했을 거라고 느껴졌다.

“그… 원천을 마시고 겨우 태어난 어떤 남자아이는 불의 힘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던데….”

설마 이걸로 미미르가 특정되진 않겠지?

“음, 샘의 원천으로 인해 애쉬가 무사히 태어난 것은 맞지. 문제는 그저 태어나기 위한 수단으로만 전부 소모되어 버리는데 그쳤다는 거란다. 그 아이 안에 잠재된 불의 힘은 끊임없이 타올라 모든 샘의 원천을 태워 버렸어. 억누르지 못한 거지.”

미미르는 물이 불을 이겼기에 베스탈리스로 태어났어도 불을 다룰 수 없었다.

하지만 애쉬는 불이 물을 이겼기에 불을 다룰 수 있었다.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지, 그 아이는. 제어해 보겠답시고 뭐든 주렁주렁 달고 다니곤 있지만.”거기까지였다. 그녀는 애쉬에 대한 이야기를 갑자기 뚝 끝마쳐 버리곤 흥미롭단 표정으로 날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얼핏 보면 애쉬는 자유자재로 불을 다룬다기보단… 제어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꼭 불에 잡아먹히고 있는 것처럼 표현했지.

불을 억누르기 위한 샘의 원천은 이미 다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고 했다.

미미르의 열 배나 되는 샘의 원천을 삼켰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안전히 태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전부라고.

그렇다는 건, 샘의 원천이 다 억누르지 못한 애쉬 안에 담긴 불의 힘은 지금 무엇을 태우고 있는 거지?

애쉬를 처음 만났을 때 당시 강렬한 첫인상엔 그가 잔뜩 달고 있던 장신구들도 한몫했다.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의 집착적으로 귀며 손가락에 보석들을 잔뜩 끼우고 있었지.

그게 전부 제어구였다는 건데. 성격도 잔인하고 난폭한 데다 거슬리는 적은 다 죽여 버려야 만족한다면, 그냥 강하면 좋은 게 아닌가? 그러나 그런 일차원적인 의문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그는 제어구 같은 건 쓰지 않아야 했다.

불의 힘을 억제해야만 하는 이유…. 설마 불이 태우고 있는 건 애쉬의 생명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애쉬의 난폭한 모습이 꼭 꺼져가는 생명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으로 느껴지긴 했다.

내가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자 노인의 흥미를 가득 담은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일단 적을 알아야 저도 대응할 수 있으니, 애쉬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볼일은 여기까지.

멋대로 달려가 버린 헬 드라이어드가 지금쯤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슬슬 발을 뺄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날 보며 노인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이 꼭 다음엔 어떤 이야기로 날 붙잡아 둘지에 대한 고민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래, 지금쯤이면 되겠지.”

“그냥 보내 주시네요?”

“후후, 내 목적은 이미 완수했으니까. 사실 아가를 붙잡는 데 좀 더 과격한 방법을 쓸 수도 있었으나….”

과격한 방법? 역시 말만 노쇠했다고 할 뿐이지,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이야기는 해 보고 싶었단다. 아무래도 넌 우리 아이의 앞길을 막을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럼… 그냥 치우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지 않나요?”

물론 죽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떤 장애물은 이겨 냈을 때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한단다. 우리들의 미래를 이끌고 있는 아이인데 지금 있는 자리에서 만족하면 안 되지.”

“…반드시 제가 질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내 말에 그녀는 딱히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내가 애쉬의 큰 적이 될 것처럼 보이긴 하나 결국은 패배할 거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난 주인공의 성장에 밑거름이 될 조연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주인공이지.

“지금 이렇게 절 내버려 두시는 걸 후회하게 될 수도 있어요.”

“내가 언제 그냥 널 내버려 두겠다고 했니? 지금은 굳이 내 손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란다.”

탁탁탁.

갑자기 우리 둘을 제외하고 텅 비어 있던 복도에 발소리가 가득 울렸다.

설마 시간을 끄는 사이 내가 알아채지 못하게 지원군을 부른 건가?

“장로님, 떠날 시간입니다.”

한 무리의 인페르노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노인과 함께 있는 날 보고 눈을 치켜떴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모양새였다.

결국 전투구나 싶어 나 역시 맞대응해 주려고 하던 찰나였다.

“그만, 내버려 두렴. 어차피 살아 나가진 못할 테니.”

그녀의 말에 인페르노들은 단번에 경계를 풀었다.

대체 무슨 소리지? 지원군을 부른 게 아니라, 어차피 내가 살아 나가지 못할 거라고?

그녀는 갑자기 작은 열쇠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던졌다. 놓칠 뻔했으나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덕에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내 방엔 아직 폐기하지 않은 자료가 남아 있을 거란다. 거기서 뭐라도 얻으면 운이 좋은 거겠지. 하지만 어차피 밖으로 유출될 일은 없으니 너를 맹랑하게 움직이게 하는 그 호기심이라도 양껏 채워 보렴.”

“괜찮으시겠습니까?”

인페르노 중 하나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질문을 무시한 채 내게 말했다.

“큰 장애물이 될 것처럼 느껴진다곤 했으나 네가 아직 완전한 장애물이 된 건 아니란다. 살아남는다면 인정해 주마. 난 부디 네가 그런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하마.”

노인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자신을 데리러 온 인페르노들과 함께 등을 돌려 버렸다.

“대체 뭐지? 이봐요!”

애타게 불러 봤자 이미 그들은 홀연히 떠나 버린 후였다.

그녀가 내게 던져 준 열쇠를 쥔 채 갑자기 엄습해 오는 엄청난 불안감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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