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에서의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대했던 이미지가 있었으나 직접 보니 달랐다.
여기서도 제2의 세계수니 뭐니 하면서 설쳐 댈 거라 예상했고, 성안이 숲처럼 치장되어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갑자기 날 칭칭 묶고 함정으로 끌고 가는 기이한 줄기가 나타나거나 가상 아티팩트 공간 속에서 치열하게 미러전을 펼쳐야 할 일이 없다는 건 다행이긴 하지만.
“어우… 어떻게 건물에 사람 사는 냄새가 조금도 안 날 수가 있지?”
대부분의 건물에 존재하는 안내 데스크도 없었고 내부 지도라든가 하다못해 표지판도 없었다.
시야에 닿는 천장과 바닥, 문 모든 것이 특징 없이 동일해서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철저하게 아는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모든 정보를 숨긴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오랫동안 이 건물을 이용해 온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겠지만, 처음 당도하는 사람은 한 발자국만 떼도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불친절한 설계였다.
지금 있는 층이 몇 층인지, 서 있는 곳이 출입구에 근접한 로비가 맞긴 한 건지, 애초에 발길을 잘못 든 사람이 헤매고 헤매다 결국 발각되어 쫓겨나도록 만든 것이 건물 설계 의도였다면 아주 잘 통할 거란 판단이 들었다.
이런 설계가 이곳에 굉장히 중요한 것을 숨겨 놓기 위해 미로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게 했다.
내부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건물에 진입할 때 잡은 공작선인장의 손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었다. 손을 놓는 즉시 그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곳이다.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하지?”
길을 잃기 딱 좋은 공간이라 발길을 떼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왼손 법칙이라도 써야 하는 걸까? 벽에 왼손을 짚고 쭉 가다 보면 결국 미로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이론 말이다.
하염없이 서 있자니 상황이 종료되어 인페르노나 헬 드라이어드가 쫓아 들어올까 봐 걱정되기에 일단은 움직이려 할 때였다.
“저기… 달려오는데. 쟤도 나처럼 너와 함께하고 싶나 봐.”
잡티 하나 없이 말끔한 벽에 손을 댈까 말까 고민하는데 공작선인장이 내 손을 쭉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방향엔 끝내 모든 인페르노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한 건지, 야차 같은 얼굴을 하고 달려오는 헬 드라이어드의 모습이 보였다.
얘… 저게 어떻게 너와 같은 마음이겠니…?
“악! 미친, 벌써 승패가 결정 났다고?”
인페르노 녀석들, 좀 더 끈질기게 버텼어야 할 거 아냐?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대로 왼쪽 방향을 선택해 달렸다.
노기에 가득 차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등 뒤에 꼬리처럼 달고 고요한 복도를 내질렀다.
“안녕?”
“헉헉, 인사하지 마! 그렇게 착한 애 아니야.”
정말이지, 그렇게 헬 드라이어드의 난폭한 모습을 눈앞에서 직관해 놓고 천진난만하게 인사를 건네는 공작선인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뛰어 봤자 벼룩이었다.
전투를 피해 내 발로 아무리 도망쳐 봤자 헬 드라이어드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미 데이지에 근접한 스피드를 낼 수 있는 드라이어드라는 게 증명되지 않았는가?
예정보다 빨랐지만 다시금 드라이어드들을 불러와 전투를 벌이려고 했는데….
“어?”
헬 드라이어드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가뿐히 날 지나쳐 가 버렸다.
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내 달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마치 애초에 내가 이곳에 있던 것 따위 관심도 없었다는 듯 무시한 채 헬 드라이어드는 날 앞서 훌쩍 멀리 달려가 버린 후였다.
“뭐야?”
“가 버렸어.”
“내게 복수를 한다든가….”
공작선인장이 자신에게 무슨 수를 썼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노릴 줄 알았는데.
막 아티팩트에서 드라이어드들을 불러내려고 했던 내 시도가 어쩐지 무안해질 정도였다.
복잡한 구조에 첫발을 떼는 것도 힘들어했던 나와 달리, 헬 드라이어드는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목적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막힘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이번엔 날 보지 않았어.”
공작선인장인 이미 헬 드라이어드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방향을 바라보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헬 드라이어드를 향한 능력 사용에 실패했다고 좌절하는 모습이 아니라 정말 단순히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것에 실망한 모습이라 골 때렸다.
“날 보지 않았어.”
어지간히 실망했는지 두 번 강조했다.
“차라리 잘됐어. 이런 낯선 곳에서 쓸데없이 전투를 벌이느니….”
“아니… 그 드라이어드는 날 볼 수 없었어. 그 애 눈이 보이지 않아.”
그런데 다시금 터져 나오는 탄식의 내용이 너무나 의외였다.
“뭐?”
“눈이 이렇게….”
공작선인장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떠진 양 눈을 가로로 긋는 시늉을 했다.
“다쳤어.”
난 헬 드라이어드가 나를 지나쳐 갔음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분노로 인해 붉게 충혈된 줄 알았던 눈이 사실은 부상을 입은 것이라니.
결국 인페르노도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헬 드라이어드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것이다.
그런데 왜 바로 자가 회복을 사용하지 않은 거지?
난 문득 공작선인장이 쥐고 있던 돌 중, 재회 때 유독 크기를 키웠던 돌을 찾아냈다.
“설마….”
공작선인장이 아무래도 헬 드라이어드의 자가 회복 능력을 봉인해 버렸거나 위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려 버린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고많은 스킬 중에 그걸 봉인해 버리냐.
그렇다는 건… 공작선인장도 자가 회복 능력을 보유 중일 수도 있다는 거 아냐?
헬 드라이어드의 자가 회복 능력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의 속박에서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공작선인장이 그 이유 중 하나를 무력화시킨 만큼… 헬 드라이어드에겐 어쩌면 끝이 선고된 상태일 지도 몰랐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드라이어드가 절박하게 달려가는 곳은 대체 어떤 곳인 거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던 모습은… 그곳에 자신을 구할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끼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나오지 않을, 확신에 가득 찬 몸놀림이었다.
가 보자. 어쩌면 내가 찾던 무언가도 헬 드라이어드가 향한 곳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거리가 상당히 벌어졌어도 헬 드라이어드가 헨젤과 그레텔처럼 곳곳에 제 흔적을 남겼기에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내비게이션이 된 헬 드라이어드를 뒤쫓아 가던 도중 누군가 날 불러 세웠다.
“아가, 멈추렴.”
뜬금없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목숨 줄처럼 공작손인장의 손을 거세게 움켜쥐었는지 충격이 그녀에게까지 전염되어 화들짝 몸을 떨었다.
“뭐… 뭔…. 아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조명이 닿지 않아 유달리 어둠에 가려져 있던 쪽이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누군가가 천천히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에 앙상한 팔다리는 저물어 가는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 줬으나, 붉은 눈동자만큼은 막 타오르는 불처럼 선명해서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저 노인도 인페르노일까?
“절 부르신 건가요?”
“그럼 이곳에 너밖에 없지 않니?”
보안이 철저한 건물을 헤매는 낯선 타인은 한눈에 봐도 적일 텐데, 날 대하는 목소리엔 여유가 가득 넘쳐흘렀다.
그녀는 마치 내가 오랜만에 만난 손녀라도 되는 것처럼 여상하게 대했다.
“누구세요?”
“그건 내가 묻고 싶구나. 길을 잘못 들었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곁에 있는 공작선인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곳은 외부인이 돌아다녀선 안 되는 곳이란다. 나가는 길을 모른다면 알려 주마.”
되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내 모든 숨겨진 목표가 이 건물에 숨어 있었다.
일부러 답을 하지 않고 뒷걸음질을 쳐 그녀에게서 조금 거리를 벌렸다.
노인이기 때문에 얕보려는 건 아니었지만 건장한 인페르노를 만날 때보단 덜 긴장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의 곁엔 드라이어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드루이드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양 손목이 텅 비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인페르노라면 어쩐지 무리 없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그래, 길을 잘못 든 건 아닌 모양이구나.”
내 태도를 통해 반항을 읽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껏 돌아다니게 둘 순 없단다.”
어떻게 하지? 도망갈까? 아니면 전투를 치러야 하는 걸까?
“내 아들도 딱 네 나이대겠지. 그 아이도 말을 잘 듣지 않는데,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한창 창창한 젊은이를 힘으로 이기는 건 노쇠한 나로서는 어렵더구나.”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본 호전적이지 않은 베스탈리스는 미미르의 가족들뿐이라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천성인지 하나같이 타오르는 불처럼 난폭해서 항상 마주칠 때마다 전투를 벌였으니까.
저 노인이 내게 드라이어드가 공작선인장 하나뿐이라고 오해해 주면 좋을 텐데.
“그래서 전투는 무리고…. 좀 다른 방법으로 너를 붙잡아 볼까?”
함정일까? 어떤 기술을 쓰려고 하는 걸까? 지원군을 부르는 게 아닐까? 헬 드라이어드를 상대하러 건물의 모든 인페르노들이 달려 나가진 않았을 거 아냐?
“젊은이들은 젊은 신체만큼 뇌도 젊어서 항상 머리를 굴리며 호기심에 사족을 못 쓰지. 지식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다면 가선 안 될 곳도 기꺼이 발을 들여놓고 말일세.”
‘마치 너처럼.’이란 말이 생략된 느낌이었다.
나이가 지긋하단 건 그만큼 수많은 경험을 한 자라는 걸 뜻했다. 세월을 살아간 레벨이 겉으로 드러나는 거지.
직접 겪고 듣고 깨달은 지혜만큼은 내가 한참 뒤떨어질 것이다.
만약 계략으로 승부를 건다면 난 휘둘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무슨 말로 홀리든 절대 넘어가지 않을….
“애쉬를 만난 적이 있지?”
“헙!”
젠장, 졌다. 심리전에서 중요한 건 상대에게 시작부터 절대 내 속내를 들키지 않아야 하는데 처참히 실패했다.
그리고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아니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오는데?
이미 늦었지만 난 애써 모른 척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호기심에 사족을 못 쓴다고 했단가?
딱 그 꼴 아닌가?
인페르노의 수장 이름이 ‘애쉬’였지. 노인이 꺼낸 ‘애쉬’라는 자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아? 물어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온 것일 테고.”
나에게 직접적으로 애쉬를 만나본 적 있냐고 물어오는 노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 불안감이 커졌다.
“저 죄송하지만 제가 바빠서….”
차라리 튀자. 노인이 어느새 금단의 붉은 사과를 들고 꼬리를 휘젓는 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급하게 자리를 뜨려는 내 기색을 눈치챈 노인이 이건 절대 지나칠 수 없을 것이라는 듯 은근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가, 내가 애쉬의 엄마란다.”
“와… 걘 걍 불구덩이에서 지 스스로 태어난 줄 알았는데.”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