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8화 (348/604)

그렇다면 공작선인장의 동행에 대해 다시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지의 전설 기술을 통해 허를 찌르는 전략은 이미 들켰기 때문에 다시 사용하는 건 어려울 터였다.

다른 전략이 필요한 시점에서 공작선인장이란 새로운 열쇠를 발견했다.

그녀가 헬 드라이어드의 자가 회복 스킬만 제대로 봉인시켜 줘도 큰 도움이 될 텐데.

하지만… 실새삼이 거듭 강조하며 말했던 위력이 약하다는 평가가 걸렸다.

공작선인장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그녀는 자신에게 오롯이 시선이 집중되는 게 마냥 좋았는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작선인장은 헬 드라이어드의 공격에 금방 쓰러질 것 같아….

그녀 역시 드라이어드임에도 쉽게 깨져 버릴 것 같은 도자기 인형처럼 조심히 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우….”

마치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 준비된 기믹처럼 때맞춰 능력을 발휘한 공작선인장을 결국 데려갈 수밖에 없겠다는 판단으로 기울자 한숨이 나왔다.

자가 회복 능력을 완전히 봉인할 수 없더라도 위력을 감소시켜 준다면 그건 그거대로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구나 아직 마거리트의 예언 적중 패시브가 한 발 더 남아 있었다. 버프를 받는다면 결과는 또 모른다.

“같이 갈래?”

“설마 공작선인장을 데려가시려는 건가요?”

반색하며 환하게 웃음 짓는 공작선인장과 달리 네이처 키퍼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의 능력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잘 안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 같은 드라이어드니 걱정이 되겠지.

더구나 그들의 목표는 공작선인장을 안전하게 보호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탈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할 게 뻔한 곳으로 보내고 싶지 않을 터였다.

“나 정말 따라가도 돼?”

“응, 네 능력이 필요해.”

그렇다고 그들이 공작선인장을 설득해 데려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을 듣지 않는 그녀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뒤만 졸졸 따라오지 않았는가?

“공작선인장은 제가 잘 보호할게요.”

네이처 키퍼의 사람들은 내 결정이 상당히 탐탁지 않은지 지금까지 보내왔던 호의적인 눈빛을 싹 거둬들였다.

“믿겠습니다.”

하지만 윈터는 반대였다.

“드루이드님께서 금은화를 제게 보내 주셨던 것처럼 공작선인장도 안전하게 저희에게 보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윈터는 제 가슴께에 손을 올린 채 마치 정말 금은화와 공명하듯 느리고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저희는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가 앞장서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작선인장은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나와 영혼의 연결을 맺을 줄 알고 기대한 눈치였지만, 애석하게도 헬 드라이어드와의 재대결을 끝내면 다시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걸까? 도주 경로가 내가 가려는 목적지와 같은데.”

훌쩍 사라져 버린 헬 드라이어드가 향한 방향엔 진줏빛 성이 있었다.

왜 하필 그곳으로 도망가려 한 걸까?

“고요해졌어.”

엘더의 혼잣말처럼 끊임없이 우릴 괴롭혀 왔던 위험 드라이어드의 습격이 뚝 끊겼다.

어쩌면 헬 드라이어드의 부상과 관련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곳이 조용하다면 다른 쪽은?

완전히 습격을 멈춘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을 택한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꽤 많았던 관람객들은 다 어떻게 됐을까?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면 남은 사람들을 위해 구조요청을 했을까?

작은 장난감 크기만 했던 진줏빛 성이 어느새 한눈에 다 담기 힘들 정도로 성큼 가까워졌다.

가는 도중에 겨우 몸 하나 구겨 넣을 수 있는 공간에 숨죽인 채 숨어 있던 관람객들과 용케 타깃이 되지 않았는지 같은 자리를 하릴없이 배회하고만 있는 공격성 없는 드라이어드들을 만났다.

날 발견해도 내 주변의 드라이어드들 때문인지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해서 잘 보이는 곳에 비상식량과 물을 잔뜩 꺼내 뒀다. 구조가 온다면 언제가 될지 모르는데 굶어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 이건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친절이었다.

공격성 없는 드라이어드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 따랐던 것일 테다.

사람들에게는 식량과 물이라도 줄 수 있었지만 그 드라이어드들을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안타깝게도 없었다.

차라리 네이처 키퍼 쪽 사람들과 연락이 됐다면 안내라도 해 줄 텐데.

“멈추세요.”

드디어 성에 다다랐을 때, 날 막는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위험 드라이어드들 대신 앞을 가로막는 자들의 정체는 놀랍게도 인페르노였다.

그들이 밀려도 최후까지 지켜 내야 할 장소가 진줏빛 성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상당수가 성문 앞에 포진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성은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아름다운 성과는 달랐다.

현대식 건물에 성의 외형을 입혔을 뿐이었다. 입구부터 설명회를 들었던 건물과 다름없는 최신식 건축물이었다.

“관람객? 드루이드 관람객이라고?”

“그 이상한 놈들은 아닌 거 같지?”

“혹시 모른다.”

날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에 경계가 가득했다.

“관람객이십니까?”

일단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그런 신분으로 왔으므로 초대장과 팸플릿을 꺼내 보였다.

“이곳은 현재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만약 대피소를 찾는 중이시라면 저 방향으로 쭉 가시면 보호를 받고 있는 건물이 나올 겁니다. 그곳에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흠….”

솔직히 다들 위험 드라이어드들을 상대하느라 바빠서 성 안까지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저렇게 다들 경계하고 있으니 평화로운 방법으론 진입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나저나….

난 공작선인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들 바크가 달라진 그녀를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꽤나 애지중지 데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알아차리지 못하는구나.

하긴, 그들의 기억 속에 공작선인장은 움직이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드레스를 두른 드라이어드였으니 지금과 같은 모습이라면 몰라볼 법도 하다.

일단 후퇴할까?

안내를 따르지 않은 채 시간을 질질 끄는 건 좋지 않았다.

인페르노는 이미 파라다이스 내부에 적대 세력인 네이처 키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의심을 사서 그들을 상대하느니 지금은 잠시 후퇴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잠자코 그들이 안내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척, 시야에서 벗어날 때쯤 샛길로 빠져나와 몸을 숨겼다.

성에 들어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들어간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아니 애초에 뭘 찾아야 하는 거지?

그때였다.

웅웅.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동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내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는 아니었고, 근원지를 찾으니 특이하게도 공작선인장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어….”

그녀가 놀란 눈으로 손을 펴자 그 안에 돌들이 빛을 반짝이며 떨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는 걸까?”

공작선인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표하는 것과 동시에 메스키트가 매서운 눈으로 우리가 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성문을 지키던 곳에서 뭔가 일이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쾅, 콰광!

내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방향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반응을 보이는 돌들 그리고 사건의 발생.

“헬 드라이어드의 짓이네.”

그새 체력을 완전히 회복했나 보다.

헬 드라이어드의 도주 경로와 우리의 행로가 겹침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만나지 못했던 것이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하듯 헬 드라이어드는 가까이에 자신이 있음을 소란으로 과시하고 있었다.

차라리 인페르노와 헬 드라이어드가 접전을 벌인다면 나로서는 이득이었다.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잠입할 기회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 보자!”

굉음이 터진 곳으로 달려가니 예상했던 대로 인페르노와 헬 드라이어드가 맞붙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드라이어드들의 실력으로도 간신히 상대할 수 있었던 오버 밸런스 급의 드라이어드였다.

불에 면역이 있는 드라이어드를 불이 주특기인 인페르노가 상대하려니 금방 전투의 우위가 드러났다.

그래도 만약 우리가 성문 앞에서 인페르노에게 반기를 들고 교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인 헬 드라이어드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을지언정, 본래라면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들을 상대하는 건 나 역시 예전처럼 이리스 파티와 같은 지원군이 필요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라면 몰래 잠입할 수 있겠어. 다들 아티팩트로 돌아가 줘.”

우르르 이동하는 것보단 수를 줄이는 것이 눈에 덜 띄었다.

하지만 역시나 내 결정에 연이어 반대 의견이 터져 나왔다.

“이럴 시간이 없어. 저러다 둘 중 하나가 완전히 이겨 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야. 헬 드라이어드의 발목이 묶이고, 인페르노의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지금이 기회야.”

결국 공작선인장을 제외한 모두가 아티팩트 안으로 들어갔다.

난 공작선인장의 손을 잡고 황급히 성문을 향해 달렸다.

안에서 헬 드라이어드에 맞서기 위한 지원군이 나오느라 문이 열린 채로 있던 덕에 적당히 엄폐물에 몸을 숨기며 통과하기만 하면 됐다.

“어?”

“왜 그래?”

간신히 문을 넘었을 때, 공작선인장이 놀란 소리를 냈다.

“나랑 방금 눈이 마주쳤어. 이것 봐.”

그녀는 손에 있던 돌 하나를 집어 내게 보여 주었다.

원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돌 중 하나가 크기가 좀 더 커지고 발색이 뚜렷해졌을 뿐만 아니라 향기가 진해졌다.

눈이 마주쳤단 것은 공작선인장이 또 한 번 자신도 모르게 헬 드라이어드에게 능력을 사용했단 뜻이 분명했다.

그리고 헬 드라이어드 역시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눈치챘단 거겠지.

복수전이라도 한다고 귀찮게 굴면 큰일이었다.

일단 최대한 도망가야만 했다.

밖의 소란 때문인지 안은 고요했다.

진줏빛 성의 고풍스러운 외관답게 내부도 비슷한 분위기를 기대했으나 성 안에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정말 성의 화려한 외형만 빌렸을 뿐인 깔끔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이 건물의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외부인을 위해 개방한 적이 없을 거란 느낌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고 보니 팸플릿의 지도에 진줏빛 성에 대한 안내는 없었지.

뭔가 있어 보이는 외관은 단순한 눈속임용일 뿐, 내부 관계자들을 위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중추 건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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