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7화 (347/604)

이걸 전투에 승리했다고 볼 수 있을까?

헬 드라이어드를 완전히 처치해야 이곳에서 운신이 편했기에 승리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찝찝한 느낌만 가득이었다.

도망간 헬 드라이어드를 쫓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함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한 대만 때리면 될 것 같은데… 그 아쉬움을 이기지 못해 파티가 극적으로 터지는 일을 수없이 많이 봤지.

탈출 후 이미 여기저기 휩쓸고 다녔을 드라이어드들은 우리보다 훨씬 이곳 지형을 더 잘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사방이 그들의 아지트가 되어 있을 수도 있었고.

저 재빠른 속도를 쫓을 수 있는 건 데이지뿐인데, 그녀가 아무리 강해도 홀로 적진에 보내는 선택은 너무 무모하단 판단이 들었다.

또다시 헬 드라이어드의 추종자들이 몰려와 지지부진한 전투를 벌이며 발목이라도 잡게 된다면 우리의 손해였다. 체력만 계속 허비하게 될 테니까.

아마 헬 드라이어드는 도망간 후 여유를 되찾으면 자가 회복을 통해 자신을 수습할 것이다.

그리고 준비가 된다면 다시금 우리에게 도전해 오겠지.

그때는 이미 우리의 회심의 공략법을 들켰으니 또 통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맞서야 하지?

물리 딜이 가능한 공격형 드라이어드를 좀 더 데리고 있었어야 했나….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는데.

“가 버렸어.”

공작선인장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시선은 헬 드라이어드가 도망간 방향에서 떠날 줄 몰랐다.

“응, 도망가 버렸네. 어쩔 수 없지. 자, 이제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겠지? 날 따라오는 건 그만두고 저 사람들을 따라가도록 해.”

공작선인장이 주춤했다.

단번에 따라오겠다고 떼를 쓰지 않는 걸 보니 위험을 톡톡히 깨달은 모양이다.

“그렇게 할게….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약해지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눈으로 처량한 얼굴을 하니 죄책감이 속을 콕콕 찔렀다.

하지만 여기선 단호하게 내쳐야 한다.

나도 모르게 결심과 반대되는 말을 내뱉을세라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공작선인장이 주춤대며 말을 걸어 왔다.

“저기… 가기 전에 네게 이걸 주고 싶어.”

공작선인장은 꼼지락거리던 두 손을 펼쳐 안에 담긴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울퉁불퉁한 보석 같은 색색의 돌들이 담겨 있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녀가 가진 돌 중 하나를 집어 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니 단순히 영롱한 빛깔을 내는 예쁜 돌 같지만은 않았다.

돌은 살짝 햇볕에 달궈진 듯한 따스한 열기를 은은히 내뿜고 있었고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대니 코끝으로 미세한 향기가 맡아졌다.

공작선인장이 쥐고 있던 돌이니 그녀의 향기가 뱄을 법도 하지만 그녀가 내뿜는 진하고 인상적인 향기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하나하나 살펴본 돌들은 색과 모양은 물론 향기까지 제각각이었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건 아니야. 갑자기 생겼어.”

“갑자기 생겼다고?”

“응, 어쩌면 그 애의 물건일 수도 있는데….”

공작선인장은 말을 하다 멈추고 헬 드라이어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애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손에 이게 하나씩 생겼어.”

처음 보는 물건이었기에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혹시 공작선인장이 헬 드라이어드를 상대로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발휘한 거 아냐?

그나저나 그렇게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도 헬 드라이어드는 공작선인장에게 한눈팔았단 말이야?

“이게 대체 뭘까? 드라이어드의 능력인 것 같긴 한데.”

공작선인장이 들고 있는 돌들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주위로 드라이어드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손을 좀 내려 봐라.”

키가 닿지 않는 실새삼의 뻔뻔한 명령에 공작선인장은 기꺼이 손을 내려 주었다.

실새삼은 돌을 하나 집어 나처럼 이리저리 살폈지만 어쩐지 관찰의 심도가 나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드라이어드의 능력이 갇혀 있군.”

“이게?”

전에 냄새로 짭신 엘더를 찾아낼 때도 그렇고, 실새삼이 가끔 드라이어드라기보단 탐지견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생겼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게 네 능력일 것이다. 공작선인장은 만나 본 적 없는 종이라 나도 아는 건 딱히 없는데.”

“어쩐지. 데이지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데 공작선인장에게 한눈팔 여유가 있나 싶었어. 공작선인장이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썼기 때문이구나.”

“지원형이라면 상대의 주의를 자신에게 끄는 능력을 썼을 법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교란을 위한 능력은 아닌 걸로 보이고.”

상대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교란형 스킬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라면 이리스 파티에도 둘 있었다.

유희란 꽃말의 힘으로 전투 의지를 상실시키는 히아신스와 불신과 배반이란 꽃말의 힘으로 아군끼리 싸우게 만드는 월계수였다.

“넌 꽃말이 뭐냐?”

“꽃말은 왜?”

“보통 지원형들의 능력은 꽃말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꽃말을 안다면 능력 유추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실새삼의 질문에 공작선인장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제 겨우 자신의 이름을 깨달은 드라이어드가 꽃말까지 알기엔 무리가 있을 법했다.

“거기 빨간 꽃.”

갑자기 실새삼이 데이지를 불렀다.

“딱 죽기 직전까지만….”

“무슨 속셈인지는 알겠는데 그걸 내가 가만 두고 보겠니?”

공작선인장을 리타이어시킨 후 능력을 사용해 훑어볼 모양인데, 애초에 적이라면 모를까 공격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해한 드라이어드를 향해 예의와 염치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함이었다.

“해가 될 것처럼 보이진 않으나 그렇다고 제이에게 썩 도움이 될 것 같은 물건으로도 보이지 않아요.”

요란법석을 떠는 실새삼과 달리 차분히 돌들을 관찰하던 메스키트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훨씬 안심이 되긴 했다.

애초에 공작선인장이 내게 해가 될 물건을 선물로 줄 것 같진 않기도 하고.

“그걸 제대로 쓸 수 있는 자는 만들어 낸 드라이어드밖에 없겠죠.”

“난 이걸 쓸 줄 몰라.”

메스키트의 말에 공작선인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 손을 바라보았다.

“흐음… 실새삼의 말처럼 네 꽃말이라도 안다면 유추라도 해 볼 텐데.”

“저… 실례지만… 공작선인장의 꽃말이라면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때 네이처 키퍼의 사람이 불쑥 끼어들었다.

학생들이 영어 단어를 외우듯 꽃말 사전을 외우는 게 취미라는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우연찮게 공작선인장 꽃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순히 이름과 꽃말만 외우고 있던 터라, 공작선인장을 보고도 모습과 이름을 전혀 연관 짓지 못했던 것이다.

“꽃말은 아마 ‘정열’일 겁니다.”

감정과 관련된 꽃말이었다. 그리고 그 꽃말이 묘하게 공작선인장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고 싶은 갈망 때문에 화려한 겉모습을 뽐내며 노력했던 공작선인장은 타인의 정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꽃말이라…. 그렇다면 비슷한 꽃말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의 능력들로 말미암아 유추 가능하겠어. 매혹이란 꽃말을 가진 지원형 드라이어드들이 떠오르는군. 그 꽃말 역시 정열에 기반했다고도 볼 수 있으니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실새삼은 상대의 능력을 봉인하는 드라이어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매혹의 꽃말을 가진 드라이어드는 상대가 특정 능력을 사용하려고 할 때 자신에 대한 생각이 들어차게 만들어 능력을 봉인한다.

“하지만 애초에 종이 같은 드라이어드라면 모를까, 완전히 다른 드라이어드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끌어내는 것은 어렵지. 인간들이 느끼는 그런 열렬한 마음 말이다. 그렇다고 드루이드를 향한 감정을 흉내 내는 것도 어렵고.”

드라이어드들끼리 씨앗도 만든다고 했으니까…. 서로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싹트기도 하겠지?

아니… 드라이어드끼리도 인간처럼 사랑을 하긴 할까?

“꽃말에서 비롯된 능력은 절대성을 가진다.”

면역력이 없는 이상 반드시 꽃말에 해당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고 한다.

히아신스의 꽃말이 유희이기 때문에 드라이어드들이 유희의 감정을 느껴 전투 의지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나, 월계수의 꽃말이 불신과 배반이기 때문에 아군이라 할지라도 적대감을 끌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 때문에 매혹이란 꽃말 역시 힘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위해 상대를 착각이란 감정으로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종이 같은 드라이어드는 매혹의 힘을 이끌어 내기 용이하니 더 잘 통하고 종이 다를 경우 페널티를 받는다.

봉인시킬 수 있는 스킬의 수가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공작선인장이 사용한 기술도 능력 봉인의 일종이라 보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저 돌들은 봉인시킨 능력들을 담고 있는 거지. 돌에서 드라이어드의 힘이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 좀 사기적인데…. 공작선인장이 들고 있는 돌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

공작선인장 역시 헬 드라이어드처럼 수많은 종을 합쳐 개량시켰기 때문에 알고 보니 만만찮게 오버 밸런스 캐릭터였던 건가?

“일단 본인이 자각하고 능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위력이 미진하기도 할 테고…. 돌의 크기도 작고 보잘것없잖아?”

공작선인장의 손에서 돌들이 부딪히며 잘그락, 하고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애초에 저건 공작선인장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아. 진짜 공작선인장에겐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위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다.”

대놓고 모조품이라 평가하는 실새삼의 어투에 경악했다.

여태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그 역시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즉, 이것저것 어중이떠중이로 섞인 꽃이 줏대가 명확한 모체를 가진 꽃을 향해 능력을 발휘해 봤자 그만큼 위력이 조각난 결과만 나올 뿐이란 거다. 아예 통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나마 제대로 통하려면 똑같은 모조품을 상대로나 가능하겠지.”

사기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공작선인장과 완벽하게 종이 같다고 볼 수 있는 상대가 없으니 보너스는 없고, 전부 종이 다르다는 판정이니 페널티만 갖는 애매한 캐릭터였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의 메인이 공작선인장이라 할지라도 몇 퍼센트로 메인을 차지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헬 드라이어드에겐 능력이 통했고… 꽤 많이 봉인시킨 거 같은데?”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하나뿐이겠지.”

공작선인장과 헬 드라이어드에 서로 섞여 있는 종이 다수 겹치기 때문.

헬 드라이어드는 겉모습만 봐도 공작선인장과 달랐기에 똑같은 이름으로 부를 순 없었다.

서로 차지하는 메인이 다르기 때문에 겉모습이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메인만 다를 뿐 섞여 들어간 종들이 비슷하다면… 어쩌면 둘은 유사한 종이란 판정이 날 수도 있었다.

한쪽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꽃이 되기 위해, 한쪽은 세상에서 가장 불에 강한 꽃이 되기 위해 수많은 종을 결합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럼에도 둘이 비슷하기에 공작선인장이 능력 봉인에 성공했다.

운명은 참 기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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