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저 드라이어드의 종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없나요?”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다.
“그럼 드라이어드들은 어때? 필드라도 알아볼 수 있겠어?”
“애초에 저건… 같은 드라이어드라 보기도 힘들 정도지.”
아무런 정보도 없다라….
그렇다면 눈앞의 적이 공격형인지 지원형인지 특성조차 모를뿐더러 어떠한 최소한의 대비책도 준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무슨 타입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직접 부딪혀 보며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높은 존재가 뭐야?”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다.”
“세계수 같은 거야?”
“세계수?”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공작선인장의 천진난만함이 헬 드라이어드의 충동을 조금씩 저하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터지기 일보 직전에서 물을 한 번 뿌려 잠깐 열기를 잠재우고, 다시 타오르는 열기에 또다시금 물을 끼얹고.
물론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겠지만 곧잘 헬 드라이어드의 정신을 분산시켰다.
“모든 드라이어드는 세계수로부터 태어났다고 했어. 그리고 드라이어드가 죽으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대.”
공작선인장은 내게 들은 짤막한 지식을 아낌없이 뽐내고 있었다.
그 상황은 이제 막 글을 배운 아이들이 신이 나 이것저것 낙서해 보는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그 세계수는 왜 내가 이렇게 태어나도록 만든 거지? 왜 다른 녀석들은 나와 같이 고통받지 않는 건데?”
“어디 아파? 난 아프지 않아.”
“아아… 그래. 세계수가 가장 위대한 존재란 말이지. 그런데 그런 위대한 존재도 불안정하여 나 같은 드라이어드가 생겨났나 보군. 그렇다면 그런 불안정한 존재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 따위 내가 차지하면 될 일 아닌가?”
타오르는 불길이 뿜어내는 열기로 인해 헬 드라이어드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공중에 나풀나풀 휘날렸는데, 색채도 그렇고 그 모습이 꼭 불이 드라이어드로 형상화한 모양새 같았다.
헬 드라이어드의 바크는 구속하고 있는 발화선 때문에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나 공작선인장만큼이나 화려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붉은 색감은 그 드라이어드의 고유 색상이라기보단 그녀가 지금 느끼는 분노를 색으로 표출한 것처럼 보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어떤 녀석들은 세계수를 만든다고 하질 않나, 이젠 드라이어드가 세계수가 되겠다고?”
엘더가 기가 차단 목소리로 말했다.
“너흰 내가 왜 저 벽 너머로 나갈 수 없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가?”
헬 드라이어드가 가리키는 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경계선이었다.
내부 드라이어드들이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거란 말은 들었지만, 헬 드라이어드의 말에 따르면 아예 강제적인 힘이 막고 있나 보다.
“위대한 존재가 되겠다며? 여길 빠져나갈 수 없어? 그게 딱 네 뿌리의 역량인가 보지.”
공작선인장이 완화제 역할이라면 엘더는 자극제 역할이었다.
비꼬는 엘더의 말이 헬 드라이어드의 속을 제대로 긁어 놨는지 단번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건방지구나.”
“네 녀석이야말로 허세는 필드의 가디언 저리가라인데.”
엘더가 실새삼을 곁눈질하며 주둥이로 더블 킬을 노렸다.
“대체 왜 쟤를 자극하는 거야?”
산만한 마거리트마저 가만히 있는데 대체 무엇이 엘더의 버튼을 누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질질 끌던 전투 전의 대기 상태는 박살이 났다.
헬 드라이어드는 학습한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거해 내 드라이어드들을 힘으로 찍어 누르기 위해 덤볐다.
데이지가 먼저 공격에 나서기 전, 정석대로 메스키트가 헬 드라이어드의 공격을 막았다.
그녀의 방어 결과에 따라 전투의 난이도가 판가름 난다.
웬만큼 상향 표준화된 메스키트가 조금이라도 애매한 반응을 보인다면 긴장을 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거대한 방패를 위협적인 주먹이 강하게 후려쳤다.
쇠끼리 부딪히면서 쩡, 하고 사방에 크게 울려 퍼지는 매서운 소리만으로도 위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근접 공격 타입인가?”
헬 드라이어드의 양손엔 어느새 격투가들이 쓸 법한 장갑형 너클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리한 여러 겹의 날이 층층이 손목부터 팔까지 감싸고 주먹이 부딪히는 곳엔 날카로운 징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상의 동물인 드래곤의 비늘처럼 견고하고 위협적인 무기였다.
“강하네, 너.”
헬 드라이어드는 훌쩍 뛰어 메스키트와 자리를 벌리곤 호기롭게 건들거렸다.
메스키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니 여간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 아닌 걸로 보였다.
아마 헬 드라이어드가 무릎 꿇린 대부분의 이들이 저 공격 한 방에 나가떨어졌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드루이드와의 영혼의 연결 없이 이 정도로 힘을 낼 수 있다는 게 놀랍군요.”
그건 메스키트의 경고였다.
여태 야생 상태의 드라이어드 중 가장 전투가 힘들었던 드라이어드는 실새삼이었다.
“쟤보다?”
내가 실새삼을 가리키며 묻자 메스키트는 쉽사리 답을 하지 않았다.
“글쎄요. 아직 능력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강한 힘인데.”
헬 드라이어드는 방금 전의 공격이 겨우 메스키트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 질러 본 양인 것처럼 목과 다리를 풀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손뿐만 아니라 다리로도 공격할 수 있겠어.”
내 추측이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헬 드라이어드의 다리에 팔을 감싼 너클과 같은 형태의 부츠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여태 휘두르는 무기를 사용하거나 원거리 공격을 하던 드라이어드들과는 다른 전투 방식을 사용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형태의 전투는 잔뜩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화르륵.
갑자기 헬 드라이어드를 휘감고 있는 발화선이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이 무기를 장착한 팔과 다리까지 휘감는 것이 보였다.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꾸물거렸는데, 꼭 저주라도 걸린 모양새였다.
꽤 괴로운지 이를 악물면서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었다.
다시 한번 헬 드라이어드가 메스키트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번엔 날을 잔뜩 두른 다리가 회전 가속도를 이용해 강하게 방패와 맞붙었다.
쾅! 콰쾅!
팔과 다리를 자유로이 사용하는 공격이 방패에 연이어 꽂혔다.
그런데 공격이 중첩될수록 메스키트의 방패에 기이한 변화가 생겼다.
치이이익.
메스키트의 방패가 열기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불을 사용하는 식물이라니!
위기를 느낀 메스키트가 랜스를 크게 휘저어 헬 드라이어드를 멀리 떨어뜨렸다.
어느새 헬 드라이어드의 팔과 다리를 완전히 휘감은 발화선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뿜어 대고 있었다.
“마치 불을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군요.”
그건 꽤나 절망적인 판단이었다.
데이지의 간단한 공격에 쉽게 스러지는 불을 말하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드라이어드를 삼키고 진화한 불을 의미하는 뜻일 테지.
그런 불은 일전에 상대하며 크게 화를 치른 만큼 위험도에 대해서는 이미 학습이 되어 있었다.
불의 파괴적인 능력에 드라이어드의 특수한 능력까지 합쳐진 상태.
“…….”
꽤나 회심의 공격을 몰아쳤겠지만 모두 막힌 탓인지 헬 드라이어드의 여유가 사라진 것이 보였다.
공작선인장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헬 드라이어드의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질감을 가졌을 텐데 눈앞의 드라이어드가 동족에게도 거침없이 공격을 퍼붓는 위험 요소 중 하나라니 배신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바곳, 네가 나서 보자.”
내가 바곳을 부르며 네이처 키퍼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휘젓자 뜻을 알아차린 그들이 멀찍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근방은 헬 드라이어드의 등장 때문인지 조용했다.
운이 좋다면 같은 물리 공격 타입인 데이지를 내보내기 전에 바곳의 중독 공격 선에서 정리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곳이 공격형으로 턴 오버 하며 대지를 독으로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단숨에 발목까지 잠식해 오는 새까만 독의 늪을 보고도 헬 드라이어드는 멀뚱히 서 있었다.
“내성이 있네요.”
“인공 개량이니 예상은 했지만…. 독에 내성을 갖는 식물의 유전자까지 섞여 들어갔구나.”
하긴 여태 마주쳤던 위험 드라이어드들 중에도 바곳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드라이어드들이 꽤 있었다.
“데이지, 드라이어드를 삼킨 불과의 전투는 겪어 봤지? 상대할 때 조심해.”
“열심히 할게요!”
급으로 따지자면 유니크 등급의 드라이어드를 삼킨 불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
공격력이 센 만큼 방어는 약하기를 바라며 데이지를 출전시켰다.
헬 드라이어드는 사뿐히 날아서 땅에 착지한 데이지를 보고 흥미롭다는 눈을 했다.
“엘더, 데이지를 아낌없이 지원해 줘.”
데이지는 헬 드라이어드의 공격뿐만 아니라 보조 효과처럼 따라오는 불길까지 조심해야 했다.
드라이어드가 불에 강하긴 해도 불에 닿은 바크가 금방 망가지기 때문에 엘더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데이지가 단도를 세우고 달려들자 반사적으로 헬 드라이어드도 움직였다.
“공격 반경이 문제야….”
헬 드라이어드를 휘감은 불은 드라이어드의 투지에 반응이라도 하듯 기세를 높여 타올랐다.
그래서 데이지가 타격을 입히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불길에 손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는 구도가 되었다.
다행히 데이지의 날렵한 움직임이 불 속에 머무는 시간을 줄였다.
헬 드라이어드도 만만찮게 민첩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데이지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치솟는 불길로 인해 그 자신도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으니 고통 때문에 잠깐이나마 주춤거림이 생겼다. 부자연스러운 몸놀림은 빠른 데이지에겐 고정된 다트 판이나 다름없었다.
“엇!”
붕!
메스키트가 방패를 휘둘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까스로 헬 드라이어드의 발차기를 피한 데이지가 훌쩍 멀어졌다.
방금 공격을 데이지가 정통으로 맞았으면 꽤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상한데. 더 강해진 것 같은데?”
공격을 계속 받으면 체력이 떨어져 공격의 강도도 줄어들 법도 한데, 어쩐지 헬 드라이어드의 공격은 갈수록 매서워지는 기분이었다.
공격을 받을수록 강해진다고?
난 반사적으로 바곳을 바라봤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꽃은 더욱 강하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