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4화 (344/604)

이제 막 새로운 세상으로 나온 드라이어드에겐 너무 자극이 큰 광경이었던 듯싶다.

드라이어드들의 격돌에 공작선인장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같은 드라이어드들끼리 잔인하게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패배하면 열매로 화해 사라진다.

휘말린 네이처 키퍼의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할 즘엔 공작선인장의 눈에 얼핏 후회가 어린 듯도 했다. 괜히 자신의 보금자리를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후회.

하지만 그녀를 진정시키고 다독이기엔 상황이 많이 급박했다.

습격에 가담한 드라이어드들은 막무가내로 공격을 난무하던 이전의 드라이어드들과는 다르게 제법 그럴싸한 협동 전투를 구현할 줄 알았다.

방어형이 앞에 서고 지원형과 회복형이 후방에서 보조를 하는 등, 꽤 상대하기 까다롭게 굴었다.

또 현재 전투는 주둔하고 있던 무리를 해치우면 끝났던 이전과 양상이 달랐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위험 드라이어드들의 지원군이 나타나고 있었다.

어떤 게임들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콘텐츠에 웨이브란 시스템이 존재했다.

한 차례 소통이 끝나면 바로 다음 차례의 몬스터들이 대거 등장해 쉴 틈을 주지 않는 방식이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 몬스터 웨이브를 상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경우는 대개 지정된 웨이브 수가 존재하거나 지속 시간이 있어 해당 시간까지만 버티면 클리어가 됐는데, 우리는 둘 중 어느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문제였다.

머리 위에 남은 시간이 표시되기를 해, 몇 번까지만 공격 올 거라고 약속이 되어 있기를 해?

“왜 갑자기 이런 양상을 보이는 거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위험 드라이어드들은 어딘가 집요한 구석이 있었는데, 마치 무슨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발을 묶기 위해서나 힘을 빼기 위해서라든지.

무턱대고 수 싸움으로 밀어붙이는 느낌은 아니라서 머릿속 한구석에 싸한 기운이 돌았다.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무슨 계획이 있는 건가?

솔직히 수로 밀어붙이고 있는 데다 특성을 잘 나눠 협동 전투를 구사해 내긴 해도 목숨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 전투는 아니었다.

이쪽도 바곳과 가막살나무를 동원하니 높아진 전투 난이도를 무리 없이 커버가 가능했고, 해치우는 데 시간이 이전보다 더 들긴 했으나 여전히 우리 드라이어드들의 공격은 파죽지세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는 다른 방식으로 급박해졌다.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네이처 키퍼 쪽 사람들을 집요하게 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애석하게도 드루이드는 없었고, 그렇다고 인페르노와 두각을 드러내며 공방을 주고받았던 실력파도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드라이어드와의 전투를 꺼리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곧 죽어도 자연 보호라는 신념을 지키겠다는 건지, 원.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노리면 노리는 족족 그들에겐 생과 사를 오가는 순간이 찾아왔다.

인연이 있는 윈터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저히 매정하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우린 전투와 동시에 그들을 보호하는 수고스러운 일을 행해야만 했다.

우리에게 약점이라고 할 법한 건 그들뿐임을,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투를 질질 끌고 우리의 발을 묶으려면 네이처 키퍼의 사람들을 노려야 한다는 걸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알아차린 것이다.

멍하니 서 있는 공작선인장 역시 그들의 타깃이 되었다.

“피해!”

큰 가시를 형상화한 날카로운 창이 공작선인장을 향해 쇄도했다.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를 구해 낸 것은 윈터였다.

몸을 던져 그녀를 밀어낸 덕에 가까스로 공격 반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방어력으로 따지자면 본인이 훨씬 위험하면서 드라이어드를 지키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공작선인장은 나와 영혼의 연결로 묶인 드라이어드가 아니다 보니 애초에 내 지휘로 즉각 반응시키는 게 어려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공작선인장을 포함한 네이처 키퍼 사람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페널티나 다름없었다.

날 따라오지 않고 네이처 키퍼의 아지트로 향했다면 이런 일을 조우하지 않아도 됐었을 텐데.

“차라리 전력을 분산시켜서라도 대피를 시킬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근거리에 둬야 했는데 이 경우는 바곳이 맘껏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제약이 되기도 했다. 바곳의 공격은 아군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무자비했다.

잠깐 전력이 분산되는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바곳의 범위 공격의 제한이 풀려 버린다면 마이너스는 없지 않을까? 물론 바곳의 독이 통하지 않는 드라이어드들도 있겠지만.

가막살나무와 엘더로 페어를 짜서 보낸다면….

머리를 맹렬히 굴리며 대비책을 강구하던 와중 우연찮게 위험 드라이어드들의 이변을 발견했다.

“웃고 있어?”

그들이 우리를 습격한 소기의 목적이 달성하기라도 한 듯 꽤나 만족스러워 보이는 수상한 웃음을 짓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지?

화르륵.

바람맞은 불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일제히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말살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쫓아가진 않았다.

“아… 아니! 저건…!”

우리와 함께 있던 네이처 키퍼 중 한 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뭔가 오는군.”

메스키트와 실새삼이 단번에 문제의 방향을 집어내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저게… 설마 드라이어드인가요? 말도 안 돼.”

“정말 드라이어드라고?”

나 역시 주변에 내리깔린 혼란에 동참했다.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모두 도망간 자리에 새로운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드라이어드의 몸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빨간 드라이어드의 몸은 기이한 줄로 칭칭 감겨 있었는데, 그 줄이 발화의 원인이었다.

아무리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바크를 가진 드라이어드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새빨간 드라이어드를 칭칭 감고 있는 그 줄이 드라이어드의 바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아이러니했다.

그건 수갑과 같은 구속구에 가까웠다.

“끄으으….”

드라이어드는 괴로운지 기괴한 신음을 내며 형형한 눈으로 우릴 바라봤다.

“드루이드님, 제발 설명 좀 해 주세요. 저희 눈앞의 저것도 정말 드라이어드가 맞습니까?”

드라이어드의 상징인 꽃이 존재하고 있긴 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불로 타오르는 식물을 정말 식물이라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드라이어드는 맞다.”

실새삼이 측은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더불어 같은 드라이어드가 그 정체를 인정하니 빼도 박도 못했다.

내가 부정이라도 해 주길 바라며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던 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답을 돌려주니 얼굴에 절망이 깔렸다.

“왜 드라이어드가 저런 꼴을 하고 있는 겁니까?”

“서… 설마….”

충격에 얼어붙어 하염없이 불타는 드라이어드를 바라만 보고 있던 윈터가 잔뜩 잠긴 목소리를 내뱉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엔… 절대 불에 타지 않는 드라이어드가 있다고 했습니다…. 보통의 불이 아닌 특수한 불에 태워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는 관람 쇼를 운영한다고 했었죠….”

그 이야기만으로도 눈앞의 불타는 드라이어드의 정체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저 드라이어드는 정말로 활활 타오르는 불에 조그만 화상도 입지 않고 있었다.

바크도 비교적 멀쩡해서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단순한 이펙트라고 치부할 뻔했다.

“끄으윽….”

“괴… 괴로워하는 거 같은데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누가 누굴 도와?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으니 섣불리 움직이지 마세요.”

차라리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온 드라이어드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이밍이 절묘했다.

모든 웨이브가 끝나고 비로소 마지막 보스 웨이브가 등장할 타이밍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온 힘을 다해 우리의 발을 묶고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피한 이유, 아무래도 저 불타는 드라이어드와 우리를 조우시키기 위해서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순수한 목적으로 야기한 조우는 아닐 테지.

불타는 드라이어드는 화르르 타오르는 소리 속에 간간이 기괴한 신음을 섞어낼 뿐,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우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건 기다리는 모습이라기보단 우리를 살피며 파악하는 움직임으로 보였다.

불타는 드라이어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에 대한 파악을 끝낸 후 전투를 시작하겠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귀찮게 굴던 녀석들이 일제히 뿌리를 말고 도망간 걸 보니 저건 꽤나 무서운가 보지?”

“공포의 대상. 그렇다면 저 녀석이 어쩌면 이 일대를 지배하며 왕 노릇을 하고 있는 드라이어드인가 보군요.”

“아! 그러고 보니….”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왕이라 떠받드는 드라이어드가 하나 있더랬다.

정식으로 선별된 왕이 아닌, 공포에 지배당해 왕이라 착각하는 존재라고 했지.

“결국 보스의 등장이었네….”

하염없이 타오르는 불의 로프에 구속된 채 지속 피해를 입는 페널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시간에 수많은 난폭한 드라이어드들의 정상에 군림한 존재이다.

절대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겠지.

“저기… 안녕?”

칼날 같은 서슬 퍼런 분위기 속에서 모난 돌 같은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톡 튀어나왔다.

공작선인장은 좀 전에 봤던 난폭한 드라이어드들과 다르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드라이어드에게서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모든 것이 새롭고 경험이 없기에 무지한 그녀에게, 대놓고 외관상으로 보이는 기괴함과 위태로움을 감별해 낼 지식 따윈 없었다.

“넌 누구야?”

“난….”

놀랍게도 불타는 드라이어드는 공작선인장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난… 누구지?”

처음부터 메스키트에게 유독 강한 시선을 보내던 불타는 드라이어드의 시선이 단번에 공작선인장에게로 넘어갔다.

“넌 뭘 할 수 있어? 뭘 하고 싶어?”

“아이고….”

하필이면 공작선인장은 불타는 드라이어드에게 유대감을 느껴 버린 걸로 보였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 판단한 모양인데 대상이 잘못됐다.

그녀가 불타는 드라이어드의 두 눈에 가득한 살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난감할 따름이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나보다 약하다.”

“약해? 그건 어떤 의미야?”

“내가 풀려났을 때 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박살 냈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날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장 높은 존재로 군림하고 이곳을 지배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날 부르는 이름은 알고 있다. 난 헬(hell) 드라이어드다.”

쇼에서 지어 준 별명이 한 드라이어드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몸소 깨달아 버렸군.”

실새삼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선고를 내렸다.

저 드라이어드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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