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자신에게 뜻이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음성 소통을 보내왔다.
그건 가슴 한쪽이 간질거릴 만큼 설레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드라이어드는 그에 맞춰 어떠한 답도 할 수 없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아무런 학습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이어드가 보고 겪은 수많은 사람들도 소리를 내긴 했으나 그건 드라이어드에게 동물의 울음과 동일하게 느껴졌다.
이따금 하늘을 날다 유리로 만들어진 천장에 부딪혀 아파하는 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드라이어드는 그 울음소리와 사람들이 입으로 내는 소리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드라이어드를 만든 이가 부여한 제 삶의 의미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며 관상용 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누구와 소통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고 드라이어드의 의사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날마다 모습이 달라졌고, 보살펴 주는 사람들 또한 공연이 없는 시간엔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둔 채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으니 벽 바깥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드라이어드는 한 번도 벽 너머를 궁금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이건 강제된 순응이었다.
이 공간만이 자신에게 허락된 곳임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곳임을 묘목일 때부터 옮겨 심어져 학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드라이어드는 자신을 발끝부터 미약하게 잠식해 오는 벽 너머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처음으로 얕게 희열했다. 그건 일종의 깨닫지 못한 공포가 될 수도 있었다.
드라이어드는 충분히 벽 안의 공간에 만족했고, 벽 너머를 엿보게 되어 버리면 현재 안정적인 공간의 존속 여부가 불안정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벽 너머를 알게 된다는 것은… 견고한 벽에 금이 갔다는 뜻이니까.
벽은 단순히 공연장을 지탱하는 건축물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 벽엔 여태 드라이어드를 감싸고 있던 가치관, 사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틈새로 스며드는 계절감을 머금은 바람처럼, 오늘 처음 만난 이는 아주 조심스럽게 드라이어드 주위를 둘러싼 벽을 침투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드라이어드는 이를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도 하지 못한 채, 형태가 없어 쥘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변화가 당황스러웠지만 늘 하던 것처럼 행동했다.
수많은 이들을 만족시켰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몸짓으로, 또는 표정과 자세로.
눈앞의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나 늘 해 왔던 대로 행동하면 예정된 결과가 펼쳐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결국 드라이어드는 실패했다.
눈앞의 인간은 자신의 수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시종일관 알 수 없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양방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이어 주는 다리는 한쪽만 연결된 채로는 존재할 수 없었다.
단순한 줄 하나라도 양쪽 모두에게 이어져야 다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드라이어드는 오늘 처음 느끼게 된 모든 것이 단순한 해프닝을 오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대로 또다시 시간이 흐른다면 반드시 어제와 같아질 것이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좌절감이 잠식해 올 즘.
“예쁜 꽃이네. 날 기쁘게 해 주고 싶은 거 맞지?”
드라이어드는 손에서 무기를 놓칠 만큼 크게 놀랐다.
“다른 드라이어들과 마찬가지로 너 역시 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구나. 넌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면 그걸 본 내가 감탄하고 기뻐할 거라 생각한 거야. 드라이어드들은 저마다 잘하는 특기와 목적이 다른데 넌 뽐내기를 잘하고 단시간에 남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특징이 있는 드라이어드였네. 날 환영해 줘서 고마워.”
서로의 마음을 오갈 수 있는 교감의 다리를 상대 쪽에서 천천히 이으려 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형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다리의 모양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어떤 다리는 틈이 좁아 줄만 이어도 무리 없이 통행이 가능할 수도 있고, 어떤 다리는 높고 견고한 교각을 촘촘히 세워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할 수도 있다.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어?”
놀랍게도 드라이어드는 길게 이어졌던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이 점을 알아차리게 되어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기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귀로… 소리로 듣는 게 아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사람의 울음소리였지만 달랐다. 의중을 묻는 음성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언제나 드라이어드의 영혼은 인간에게 공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드려야 울려 퍼지는 악기처럼 자극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 누구도 진정으로 드라이어드에게 깊이 교감하려 하지 않았기에 갈수록 둔해지고 무감각해졌던 것이다.
드라이어드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본 상대는 무언의 신호를 읽어냈다.
“여기 이 드라이어드는 엘더 플라워인데 얘도 내게 예뻐 보이는 걸 좋아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노력하지 않아도 항상 예뻐.”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는 하얀 드라이어드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러자 드라이어드는 어쩐지 따라 웃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얘는 예쁜 거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자기 잘난 맛이 너무 강해서 인성에 모가 났다고 볼 수도 있는데.”
“왜 갑자기 저 드라이어드 앞에서 날 흉보는 거야?”
“사실은 굉장히 강한 회복형 드라이어드거든. 다른 드라이어드들을 치유해 줄 수 있어. 덕분에 수많은 어려움도 많이 헤쳐 나갔다니까?”
투덜대던 엘더 플라워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이 됐다.
“그리고 여기 이 드라이어드는 굉장히 크지? 이 드라이어드는 벨벳 메스키트야. 입고 있는 갑옷이나 랜스, 방패가 네 드레스처럼 엄청 무거운데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벌처럼 전장을 종횡무진해. 우리 팀을 보호하는 방어형 드라이어드야.”
드라이어드는 어쩐지 보기만 해도 두 어깨가 무거워질 정도로 위압감을 풍기는 벨벳 메스키트의 모습에 두 눈만 끔벅일 수밖에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드라이어드를 보살펴 주는 인간들에게서도 많이 본 얼굴이었다.
벨벳 메스키트가 화가 나 있거나 자신에게 불만이 있는 게 아닐까 하던 찰나에 눈치챘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자신에게 조잘조잘 입을 열고 있는 인간을 향한 눈빛이 마치 무대 위의 조명처럼 따뜻했다.
두 눈이 이토록 따스함이 느껴지는 생경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이 또한 소리를 내지 않아도 상대에게 의중을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새로 알게 된 사실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자 드라이어드의 기분이 한껏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 드라이어드는 말야….”
인간은 자신의 곁에 있는 드라이어드들을 하나씩 소개해 주었다.
‘왜 내게 그러는 걸까?’
하지만 소개를 해 주는 목적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너도 분명 다른 특징이 있을 거야. 내가 보기엔 넌 여기에 항상 머무르며 남을 기쁘게 해 주려고 힘쓰는 것보다 더 잘하는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 어쩌면 우리 데이지보다 날렵하게 행동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일지도 모르겠네. 넌 어떤 드라이어드니?”
드라이어드는 그 말에 숨 쉬는 것도 잊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 말에 따르면 자신은 어쩌면 다른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더 플라워처럼 회복의 능력을 사용할 수도, 벨벳 메스키트처럼 누군가를 보호할 수도, 레드 데이지처럼 나쁜 의도를 가진 누군가를 공격할 수도, 마거리트라는 드라이어드처럼 누군가를 지원해 줄 수도 있었다.
‘왜 내가 어떤 드라이어드냐고 묻는 걸까? 정말 난 어떤 드라이어드인 걸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을 기쁘게 만드는 능력은 지원형인 걸까? 아니, 난… 어쩌면 다른 능력이 또 있는 게 아닐까?’
언제나 굳건할 것같이 단단한 벽에 생긴 균열은 빠르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세상 밖은 어쩌면 네가 있는 이 공간보다 위험할 수도 있어. 불이라는 괴물이 있는데 말야….”
고민하는 드라이어드에게 상대는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의 자생 필드가 트로피컬 필드일 거라고 하던데, 사실 난 아직 그 필드에 가보지 못한 거 같아. 아, 우리 길드원 중에 트로피컬 필드를 영역 선포로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어쨌든 여기서 흉내 낸 것보다 훨씬 굉장한 곳일 거야. 직접 가 보고 싶지 않니? 트로피컬 필드 말고도 노멀 필드나 데저트 필드도 있는데….”
드라이어드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벽 너머의 공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드라이어드는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환상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이건 어떠한 특수 능력 따위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가 보고 싶다는 드라이어드의 희망이 불러온 상상이었다.
이젠 알 것 같았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노랗고 붉은 땅 위에 차곡차곡 낙엽이 덮인 곳, 키 높은 상록수가 빼곡히 하늘을 가리고 이따금 끈적한 습기를 동반하는 비가 쏟아지는 곳.
그 안에 붉은 꽃을 피운 자신이 보였다.
“저기… 안녕?”
마침내 드라이어드의 입이 열렸다.
건네진 인사가 다시 되돌아갔다.
천천히 차분하게 이어지던 다리가 비로소 연결된 것이다.
다리는 두 줄과 판자를 이어 만든 흔들 다리도 아니었고 돌로 만든 굵은 교각을 촘촘히 세워 만든 돌다리도 아니었다.
모든 식물에게 가장 근원적인 동경으로 익숙할, 작은 세계수가 가지를 뻗어 만들어 영혼과 영혼을 엮은 나무다리였다.
“만나서 반가워.”
“나도… 반가워.”
“난 아마도 공작선인장이야. 트로피컬 필드에서 자생하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꽃이야.”
“그래, 넌 정말 화려해.”
“내겐 가시가 있어. 너를 아프게 할 수도 있어. 그래서 모두에게 뾰족한 가시는 숨기고 화려한 꽃만 보여 주고 싶었어. 모두가 날 열렬히 사랑했으면 좋겠고 친절했으면 좋겠어.”
“누구나 그런 걸 바랄 거야. 하지만 가시가 너에겐 흠이 되지 않아. 내가 아는 어떤 선인장은 오히려 가시가 달린 몽둥이를 휘두르며 적을 다 박살 내고 다니는걸.”
“내게 가시가 있지만 난 누군가를 공격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난 누군가를 응원하고 지원해 주는 게 좋아. 그리고 그걸 잘할 거 같아.”
“그래? 그럼 넌 어쩌면 지원형 드라이어드일 수도 있겠구나.”
드라이어드가 처음 만난 벽 너머의 공간은 너무나 상냥해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