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9화 (339/604)

“어… 이 길이라면 공연을 보러 가는 길이네요?”

팸플릿을 보고 윈터가 안내하는 길과 대조해 보니 목적지가 B구역의 공연장이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꽃의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곳이었다.

샐스트의 설명에 의하면 보는 순간 마음을 뺏겨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꽃이라고 했지.

하지만 난 배포용 초대장으로 왔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었다.

“정말이지…. 이곳은 너무나 타락했고 역겨울 정도입니다. 관람한다고요? 모체가 관상수인 것들이 있으나 엄연히 식물과 움직일 수 있는 드라이어드는 다릅니다. 드라이어드들에겐 자연을 수호할 사명이 있다고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재롱이나 부리는 삶을 그들이 진정 원할 것 같습니까?”

윈터는 울분을 토했다.

그는 내가 들고 있는 팸플릿을 당장이라도 찢어 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좀 더 드라이어드들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어요. 우리가 사는 삶이 얼마나 많은 자연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데.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교감하는 자세를 가져야지, 인간에 맞춰 자연을 바꾸려 하다니.”

확실히 오랜만에 만난 그는 성격이 많이 바뀐 느낌이 들었다.

공연이란 말이 그의 도화선을 건든 것인지 한참을 설교에 가까운 불평을 토해 냈다.

“금은화의 영혼 역시 이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그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곳을 말끔하게 정화해 놓을 것입니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마치 그 속에 영혼이 말을 걸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 모습에 차마 모든 드라이어드들은 수명을 다하면 열매로 화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이치를 언급할 수가 없었다.

그가 금은화의 영혼과 함께한다는 말은 단순 비유가 아니라, 정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 혼란이 발생하기 전 당신과 같은 단체 소속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같이 있었어요. 아마 직원으로 위장했던 것 같은데.”

어쩐지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어 주제를 돌렸다.

드라이어드 대탈출 소란이 발생하기 전, 내게 기묘하게 굴었던 샐스트를 떠올리면 그의 대략적인 정체가 추정 가능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실치 않으니 궁금하긴 했다.

“세계 각지에 네이처 키퍼들이 퍼져 있습니다. 자연을 수호하겠다는 한마음 한뜻으로 모인 이들이지요.”

자연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들.

“드루이드님처럼 드라이어드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불을 해치우고 세계수를 수호하는 것을 떠나 저흰 좀 더 원초적인 목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드루이드가 아닌 일반인일지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자연을 수호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부터 노인, 평범한 직장인부터 더 나아가 테라리움의 고위직을 겸한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단체에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단체처럼 들리는데.

게다가 인페르노처럼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단체가 아닌 듯했다. 누구나 살면서 기부를 하고 자선 단체에 소속될 수 있는 것처럼 대중적인 단체인 걸까?

“자연을 수호하는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작은 풀꽃 한 송이를 사랑하는 마음 역시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일 역시 누구나 할 수 있죠. 하지만.”

그의 목소리 고저가 달라졌다.

“단순 쓰레기를 줍고 황폐지에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일 정도로 이와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를 막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희처럼 앞서서 행동하는 이들이 모여 규탄하고자 한 것입니다.”

듣기론 배포용 초대장은 수중에 다이아만 많다면 꽤 손에 넣기 쉬운 아이템이라고 한다.

앞 번호에 거주할수록 그리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수록 인페르노의 표적이 되는 격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렇게 다이아가 많은 사람들을 홀려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으로 데려가 권력과 지배 욕구를 자극해 사업 자금을 벌어들이는 방식을 써 왔던 것이다.

하지만 타깃에서 드루이드는 최대한 배제되기 때문에 아마 나는 정상적인 경로로는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배포용 초대장이 단체 소속 인물의 수중에 들어간 게 화근이란 것이죠?”

“이런 곳이 이토록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나마 발견이라도 해서 다행인 것입니다.”

윈터의 단체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공을 들여 직원으로 위장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근무해 왔다.

샐스트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예상외로 직원 전체가 인페르노는 아니었으며 또한 그가 표현하길 조직 내부엔 소수의 아주 높은 특권층이 따로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들이 베스탈리스이자 인페르노인 것이 분명했다.

위험 드라이어드들의 소란이 그토록 진정되지 않는 이유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머물고 있던 베스탈리스들의 수가 소수인 게 한몫했을 것이다.

네이처 키퍼의 목적은 갇힌 드라이어드들의 해방과 이곳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을 수집해 세상에 고발하려는 것이었는데, 드라이어드들의 난동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이미 단체 내에서도 상당한 피해자가 발생해 수습이 어려울 지경입니다. 우리 모두 연대 책임으로 자연이 주는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최대한 전투 의지가 없는 드라이어드들은 구출하려고 했는데….”

하나같이 자유를 달가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도망 의지 자체도 없어서 아무리 단체 사람들이 애를 쓰고 빌어도 꼼짝 않고 있다가 위험 드라이어드들에게 습격당해 버렸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직원이 말하길… 내부 드라이어드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드라이어드들을 구출하겠다고 했는데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구출이 성립되지 않을 것 같 같은데….

“여깁니다. 이곳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드라이어드가 있는데 도통 떠나지 않으려고 해서 말입니다. 이곳 역시 언제 습격을 받을지 몰라 위험하니 얼른 피신해야 합니다. 아마 자유를 포기한 대다수의 드라이어드들은 항상 좁은 곳에, 그것도 인공적인 자연에 갇혀 살며 더 넓은 세상을 접하지 못했기에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드루이드님께서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말고 단체에 다른 드루이드도 있었을 텐데….”

“이런 말씀을 드리기 애매하나… 듣기론 드루이드와 말이 통하지 않는 드라이어드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놀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일반인들과 소통할 순 없어도 그들이 말하는 것을 온 감각을 동원해 알아들을 수 있는 드라이어드들 역시 깜짝 놀랐다.

드루이드와 말이 통하지 않는 드라이어드라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어떻게….”

“처음에 드루이드님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드루이드님은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엄청난 일을 해내신 분. 그러니 당신이라면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부디 가련한 꽃을 도와주세요.”

공연장은 네이처 키퍼의 사람들이 입구부터 철통 방어를 펼치고 있었다.

상당수의 약한 드라이어드들이 습격을 당한 탓인지 그들은 남은 드라이어드들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했다.

그들의 목적은 드라이어드들의 해방이라고 했으나 밖에서 미쳐 날뛰는 드라이어드들의 해방만으론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지켜 보기 위해 저렇게 필사적이겠지.

“도움을 주실 분을 데려왔습니다. 아주 대단한 드루이드님이시니 어쩌면 그 꽃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윈터와 함께 등장한 나를 보고 잔뜩 경계하던 이들이 단숨에 문을 열어 주었다.

그들은 나와 대동한 드라이어드들을 아주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 호의가 내게 전염되어 무척이나 기꺼운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건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라이어드도 덩달아 사랑한다는 시선이라기보단… 좋아하는 연예인을 바라보는 광적인 팬의 시선처럼 열렬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공연장 내부는 많은 관람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인지 규모가 상당했다.

콜로세움 방식의 객석 아래로 보이는 무대는 아주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무대는 정원을 테마로 하는지 인조 잔디와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중앙 넓고 거대한 그루터기를 중심으로 붉은 꽃이 해당 꽃의 군락지 안에 들어선 것처럼 잔뜩 장식되어 있었다.

보석도 아낌없이 사용했기에 공연장 문을 열고 따라 들어온 빛이 무대에 닿자 눈이 현란할 정도로 사방이 반짝거렸다.

아마 누군가 중앙의 그루터기 위에 올라서기만 해도 스타가 된 기분이 들 것 같은 호화롭고 다채로운 무대였다.

“정말 구역질이 나네요.”

감탄하는 나와 다르게 윈터는 무대를 보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래서 난 일부러 무덤덤한 얼굴로 무대에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저렇게 아름답게 꾸며 놓은 이유는 쇼를 돋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일 텐데.

무대 뒤편의 공간으로 넘어가 복도를 지나자 천장이 가려진 숲이 펼쳐졌다.

건물 내부에 숲을 구성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벽이 위로 둥글게 꺾이는 철창 모양인 것이 신경 쓰였다.

“이곳이 그 가련한 꽃이 기거하는 장소입니다. 왜 이런 환경을 구성해 놓았는지 아시나요? 이마저도 관람객들을 위한 서비스라고 합니다.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활하는 드라이어드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라고 하죠. 이런 만들어진 자연 따위 역한 냄새가 풍겨 올 뿐 끔찍할 따름입니다.”

윈터는 이 장소에 오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괴롭다는 듯 가슴께를 꾹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만나게 된 꽃은… 내가 여태 봤던 드라이어드들과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세상에….”

거대한 공간 가득 드라이어드가 입은 붉은 드레스가 둥글게 펼쳐져 있었다.

주름이 잔뜩 들어간 데다 꽃잎처럼 겹겹이 쌓인 드레스는 굉장히 풍성하게 보였다.

허공에서 본다면 그 모양이 하나의 거대한 붉은 꽃처럼 보일 터였다.

그 중심에 손을 포갠 채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드라이어드는 마치 인형처럼 보였다.

“이런 바크를 가진 드라이어드라니…. 움직일 수는 있을까?”

드레스는 드라이어드 몸집의 몇십 배나 될 정도로 거대했다.

더구나 화려하긴 해도 상당히 거추장스러워 무게 때문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드라이어드 정도나 되니 이런 옷을 입고도 무대까지 걸어 나갈 수 있었겠지만… 보통 사람에겐 족쇄나 다름없을 터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가까이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 보고 싶은데… 사방에 드레스가 깔려 있어서 밟지 않으려면 멀찍이 떨어져서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이 거리가 꼭 저 드라이어드와 우리들의 마음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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