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광경은 쉽사리 발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당장 나 자신도 드라이어드들의 보호가 없으면 무력하게 바닥을 뒹굴고 있을 텐데, 변덕을 부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난 일부러 시간을 들여 건물 출구에서 빙 돌아 의도적으로 위험 드라이어드들과 마주쳤다.
마주칠 때마다 번번이 전투가 발생해서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므로 잡몹 젠을 요구하는 반복 노가다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내 한 몸 지키기도 급급했던 시절이 오래지 않은데,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얼마나 간절히 기적을 바랐는지 알기에 도저히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강의실에서 만났던 직원은 합류한 직후부터 빨리 건물 밖으로 나가자고 날 재촉하고 싶어 안달 난 눈치였으나 어떠한 발언권도 없었기에 잠자코 내 행동을 따라야만 했다.
드라이어드들은 그런 나의 의도를 알면서도 묵묵히 따라 주었다.
처음에 마주했던 거대한 드라이어드처럼 모체의 위험도가 짐작되는 성난 드라이어드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가득 찬 분노를 표출할 곳을 애타게 찾아다니고 있었다.
게임 몬스터로 치면 사정거리에만 들어가도 다짜고짜 선공을 날리는 몹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드라이어드는 전투에 패해 쓰러지자 거대한 망태기 안에서 수액에 절어 익사한 시체를 후드득 토해 내기도 했다. 곧바로 메스키트가 내 두 눈을 가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몇 날 며칠 아무것도 먹지 못할 뻔했다.
백 번 양보해 모체의 특성을 따라 먹이를 사냥하는 행동의 일면이었다 하더라도 과했다.
결국 그저 분노 표출을 위한 공격 감행 수단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건물을 침입한 위험 드라이어드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메스키트가 감지하고 데이지가 뛰어다니며 빈틈없이 살피니 주변은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아마 이 정도라면 건물 내에 간신히 숨어 있는 사람들의 안전도 확보되었을 테니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 구조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생존자를 여럿 마주치기도 했으나 이미 잔뜩 겁먹은 그들은 내가 데리고 다니는 드라이어드들에게도 화들짝 놀라 그대로 쭉 숨어 있는 것을 택했다.
간신히 상황을 정리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들어선 인공 숲은 사방이 고요했다.
바람을 따라 스산하게 흔들리며 부딪히는 나뭇잎들의 소리가 귀곡성처럼 들려왔다.
숨죽인 채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영역에 들어선 것처럼 날이 선 살기들이 은밀하게 느껴졌다.
살기는 촘촘한 거미줄처럼 사방에서 번들거리며 희생양이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닥!
“으악!”
나뭇가지 밟는 소리에도 지레 겁먹고 새된 비명을 지르는 직원은 착실히 사냥꾼들의 본능을 자극하고 스스로를 표적으로 만들었다.
휘이잉!
메스키트가 거대한 랜스를 한 손으로 들고 크게 반원으로 휘젓자 위협적인 바람 소리와 금빛 모래 이펙트가 퍼졌다.
무리의 약자를 파악한 맹수들이 때를 기다리며 혀를 날름거리는 시선을 눈치채고 경고를 보낸 것이다.
건물에서 마주친 드라이어드들은 하나같이 내 드라이어드들을 보고 단번에 이질감을 눈치챘다.
세계수에서 태어나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맺고 정형적으로 성장 중인 드라이어드들은, 그들에게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느껴지는 것이 분명했다.
눈빛만 봐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 온 것이 티가 났다.
메스키트의 위협이 성공적이었는지 주변을 옥죄는 살기가 한층 꺾였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금방 달려들 거야. 밖의 놈들은 그래도 안의 놈들과 다르게 생각이란 걸 하는가 보군. 무리를 짓고 있다. 뭐, 그래 봤자 어쩌다 엉켜서 뭉텅이로 물에 떠다니는 유목 같은 녀석들일 뿐이지.”
실새삼에게 유목(流木)은 비속어와 같은 단어가 분명했다.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죽은 나무를 뜻하는 단어를, 그는 위험 드라이어드들을 업신여길 때마다 내뱉었다.
“넌 대체 부르지도 않았는데 아티팩트 밖으로 왜 나온 거야?”
실새삼은 나와 마찬가지로 구경하는 역할이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적을 해치울 동안 동네 마실 나온 아저씨처럼 팔짱을 끼고 참견과 훈수는 걸어도 결코 전투에 참가하진 않았다.
“그가 필요하긴 할 거랍니다, 제이.”
생각지도 못한 자가 실새삼을 두둔했다.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실새삼은 항상 나와 떨어진다면 내 드라이어드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겁냈다.
그만큼 녀석은 환영받지 못한 존재라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사이가 꽤 안 좋은 편이었지.
그중에서도 중추라고 볼 수 있는 메스키트가 그를 두둔하다니.
“꼴은 저 모양이지만.”
“내 꼴이 뭐가 어때서.”
“그래도 한 필드의 가디언이니 본분을 다하겠죠.”
“한참이나 늦게 태어난 것들이 이 몸에게 훈수라니, 이르다.”
크기가 서로 몇 배나 차이 나는 두 존재가 대등하게 설전을 주고받는 모습이 참 묘했다.
“혹시 이번 사건에 필드의 가디언이란 역할이 뭔가 도움이 되는 거야?”
“근본도 모르는 녀석들이 날뛰고 있으니 필드의 규율이 빚어 준 정체성이라도 일깨워 잠재워 보려는 거지.”
“하지만 너무 오래 공허한 역사가 흘렀기에 저와 저자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거랍니다. 너무 오래… 방치했어요.”
실새삼의 말에 문득 16번째 연금탑에서 메스키트와 파피루스가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비슷한 주제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실새삼은 메스키트의 말에 동의하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필드의 가디언들이 직무 유기를 했다는 투의 말은 상당히 여러 번 들어 왔기에 궁금해졌다.
대체 그들이 말하는 필드의 규율이란 정확히 뭘 의미하는 것인가?
하지만 명색이 현 필드의 가디언이란 두 드라이어드에게 물어봐도 내가 이해할 만큼 자세히 설명해 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결국은 알게 될….
“히이익!”
직원이 안내하던 대로 한참을 걸었을까.
비록 드라이어드들과 내가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평정을 잃지 않고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모습을 그려 내기 위한 기 싸움에 불과했다.
이 전략이 잘 먹힌 덕인지 걷는 내내 기습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긴장감이 일순 깨지고 팽팽한 줄다리기의 우세권이 상대에게 살짝 넘어가는 순간이 나타났는데.
“여… 여기가 어떻게 이렇게….”
직원이 선택한 안전 경로는 나와 샐스트가 지나온 드라이어드 전시장 부근이었다.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위험 식물 전시장과 가깝거나 습격의 피해가 심했기에 그가 신중하게 골랐던 루트였는데.
“설마 같은 드라이어드들까지 공격을 받은 거야?”
내가 지나왔던 드라이어드 전시장 역시 차폐막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드라이어드들 대부분은 그 자리를 고수했던 것 같았다.
무기력하게 온실 속 화초로 가만히 앉아만 있던 그들은 마치 날개가 망가진 나비처럼 혹은 날갯짓하는 법을 잊어버린 새처럼, 밖을 향한 문을 열어 줘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부동을 선택했기에 얻은 결과는 참혹했다.
난동을 부리는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이미 이 전시장까지 침범한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곳곳에 그들과 맞서기 위해 베스탈리스들이 사용했을 법한 불의 그을림 자국이 가득했는데, 덩달아 애처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던, 혹은 죽어 버린 눈을 하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의 잔해 역시 가득했다.
죽은 드라이어드는 열매로 화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잔해만 남긴 채 하나도 빠짐없이 텅 비어 버린, 주인 잃은 유리창 속의 인공 정원이 으스스했다.
여타 봐 왔던 참상들에 비하면 해당 전시장의 피해 범위는 국지적이자 타격 흔적 또한 말끔하고 좁았는데, 이는 아무런 저항 없이 외부의 공격을 그대로 얻어맞은 모습을 연상케 했다.
여태 드라이어드들끼리 주인 되는 드루이드의 의지로 전투를 벌이긴 했어도, 영혼의 연결로부터 자유로운 드라이어드들이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듣기론 본디 드라이어드들은 세계수에서 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과 같아서 동족끼리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의 참상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내의 드라이어드들은 서로에 대한 유대감이 불안정하고 희미할 뿐만 아니라 동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우리가 지나왔던 숲에서 진을 치고 있던 드라이어드들은… 그나마 무리를 이루지 않았어? 그런데 어째서 여긴….”
왜 두 양상이 다른 걸까?
어째서 무리 짓는 드라이어드가 따로 있고 이토록 처참하게 사냥당하는 드라이어드가 따로 있는 걸까?
“꼭 짐승 같네.”
“어린 것이 제법 정확하게 짚었구나.”
엘더가 환멸에 찬 어조로 읊조리자 그의 말을 실새삼이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자연의 이치나 필드의 규율이 없는 유목들이 선택한 것이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논리였군. 이를 보고 어찌 그들이 우리와 같이 이성과 지성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나? 차라리 제 자리에 붙박인 식물들이 낫겠군.”
약육강식의 논리.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힌다.
“무리를 짓던 녀석들은 서로의 세가 비슷해 보이니 휴전 상태였을 것이고.”
“여기 드라이어드들은 싸울 의지가 없으니… 당하고 만 거구나….”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미 한 차례 혈전이 휩쓸고 갔기에 전시장에 남은 것은 우리뿐이었다.
아마 위험 드라이어드들은 새로운 희생양을 찾기 위해 다른 곳을 누비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슬피 울부짖는 소리, 고통에 찬 비명들이 파고들어 속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떠나지 못한 사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밀물처럼 덤벼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너무 늦었다는 죄책감이었다.
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참상을 당할 때도 치밀어오르지 않았던 눈물이 드라이어드들의 무력한 죽음 앞에서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아이러니했다.
“후우…. 어서 가자.”
살짝 물기 젖은 목소리에 황급히 마음을 추스르고 직원을 재촉해 걸음을 움직였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앞만 보고 달리기를 선택했듯, 죄책감을 떨쳐 내기 위해 나 역시 움직이는 것을 선택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선택지라도 있을지 모를 앞을 향해 걷는 행위였을 뿐이다.따뜻한 온기가 슬그머니 내 손끝을 잡았다가 떨어졌다. 엘더였다.
그는 내 감정을 오롯이 공유하듯 똑같이 물기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작게 위로했다.
그러나 불안정한 마음 탓에 나는 그 맑은 녹색 눈을 보고도 평화로운 숲을 떠올리며 안도를 찾을 수 없었다.
“제법 움직임이 집단적이지?”
“동의해요. 한둘은 무리에서 이탈해 마주했을 수도 있는데 갈수록 집단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군요.”
“그렇다면 역시나 의심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군.”
메스키트와 실새삼이 심각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왕을 뽑았군요. 그들만의 이치대로.”
“맞아.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그들을 지배하에 둔 드라이어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무지성의 것들을 단숨에 휘어잡는 것을 보면 여간 거칠고 강한 뿌리가 아니겠지. 어쩌면 여태 봐 왔던 것들보다 제법 그럴싸한 녀석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왕을 뽑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