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숲의 중앙엔 숲의 풍경과 동떨어진 3층의 새하얗고 거대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산을 씌워 놓은 듯한 지붕과 벽의 전면이 유리로 되어 깔끔하고 모던한 내부 공간이 훤히 보이는 건물이었다.
새하얀 조명이 눈부시게 대리석 바닥을 밝히고 오피스 룩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곳에 스포츠카 몇 대만 전시해 둔다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변과 전혀 융화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건물의 디자인은, 마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단면적으로 보여 주는 예시 같았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자리한 굉장히 인위적인 건물.
마치 인간이 자연을 지배했노라 선언하는 모양새였다.
난 샐스트가 보지 않는 틈을 타 열심히 심호흡을 했다.
차라리 귀신이나 유령 따위가 등장하는 무서운 장면들을 보는 편이 나았다. 그건 두렵다는 한 가지 감정만을 다스리면 되니까.
하지만 인륜을 저버리거나 약자를 괴롭히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참으로 못 볼 꼴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일어나는 행태들은 내 멘탈의 한계를 계속 시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드라이어드와 영혼으로 맺어진 드루이드들이 어떻게 그런 장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넘길 수 있을까?
인간처럼 사고하고 대화가 통하는 드라이어드를 인간과 다르게 볼 수 있는 게 가능한가?
“고객님 마음도 다 이해합니다.”
샐스트가 마치 내 속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곱게 보기 힘드시겠지요. 그런 분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
“역시 자기 다이아가 투자가 되어야 보는 맛이 날 것 아닙니까? 지금은 그저 남의 떡인데 말이죠. 얼마나 아니꼬우시겠습니까? 안달이 나기도 하시겠죠?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고객님의 경우는 먼저 비즈니스 쪽으로 다가갔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렇죠? 회원 관련 이야기를 꺼낼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전 아직 멀었네요. 이번엔 정말 제가 제대로 가이드 해 보겠습니다.”
차라리 그가 멋대로 오해하는 편이 나았다.
마케팅 홀로 향하는 우리의 주위로 한 무리의 직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지나가며 샐스트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샐스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함께 걷는 내게 눈빛 한번 주지 않고 빠르게 사라졌다.
마케팅 홀의 입구는 백화점에서나 볼법한 회전문이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미약하게 풍기는 시트러스 향과 은은하게 흐르는 클래식한 음악이 반겼다.
“이쪽으로.”
안엔 샐스트와 같은 가이드들이 곁에 둘 이상의 사람들을 대동하고 무언가 열심히 설명 중이었다.
안내 데스크로 보이는 곳에 다가가 무언가를 살피던 샐스트가 화색을 띠며 말했다.
“음, 마침 시간을 잘 맞춰 왔네요! 지금 들어가면 바로 설명회에 참석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명회요?”
“네, 투자 설명회입니다. 하루에 세 번밖에 안 하는데 고객님은 정말 운이 좋으시네요. 바로 이동하실까요?”
“네…. 그러죠.”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강의실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강의실의 절반 정도를 채운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 있었고 제일 앞에 있는 적당한 높이의 강단 위에 누군가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아주 잠깐의 시선이 몰렸지만 이내 금방 관심을 잃는 것이 보였다.
샐스트가 환한 얼굴로 강단에 선 자에게 손 인사를 하자, 그는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진 자리에 대충 앉으니 강단에 선 자가 박수를 두 번 치고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그럼 설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칠판 위 거대한 두루마리가 펼쳐지며 넓은 종이에 가득 찬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조감도가 나타났다.
아나운서와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주저 없이 발표를 시작했다.
“지상 최대의 낙원,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앞으로 세계 최고의 휴양지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처럼 선택받은 분들만이 앞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선택받았다라…. 그 말에 여럿이 긍지에 찬 얼굴을 했다.
팸플릿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각각의 구역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다음 프레젠테이션으로 넘어가면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놓은 듯한 자료들이 잔뜩 나타났다.
발표자는 그래프 하나를 지휘봉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해마다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로 인한 인명 피해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좋지 않았다.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는 시기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태어납니다. 식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태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인간을 웃도는 힘과 위험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드루이드가 아니고선 통제가 불가능하죠. 그들은 그나마 드루이드들에겐 우호적일지는 몰라도 일반인들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위험 인자들이 세상을 활개 치고 다니는데 일반인들은 적절한 방비책도 없습니다.”
나를 제외한 강의실에 앉아 있는 모두가 작게 웅성거릴 뿐 놀랍게도 발표자의 말에 동의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떤 드라이어드는 곁에 있기만 해도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으며 인체에 해로운 병을 옮기기도 합니다. 또한 씨앗을 발화시켜 주변 농지를 불바다로 만드는 드라이어드가 있는가 하면 불운을 몰고 오고 수명을 뺏고 깨어날 수 없는 긴 잠에 빠뜨리거나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객사하게 만드는 드라이어드도 있죠. 이런 드라이어드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불’ 외엔 전무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불’마저도 인간이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드라이어드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극단적인 시각에 할 말을 잃었다.
“만약 그런 드라이어드들이 인간들에게 악감정을 갖고 군대를 만들어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대항하실 겁니까? 만약 근처에 드루이드가 단 한 명도 없다면요? 보통의 무기로 맞서 싸운들 저희 같은 일반인들이 상대가 되겠습니까? 분명 우리의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피해를 입겠지요.”
단조로운 스크랩 기사와 그래프 종이들이 모두 뜯어지고 드라이어드들이 사람들을 핍박하는 픽토그램이 자리를 대신했다.
그런데 난 저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인간에게 공격적인 드라이어드는 바곳을 비롯해 은둔자의 정원에서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상황 모두 원인이 드라이어드의 사회화에 달려 있었기에 변호는 해 줄 수 있었다.
엘더와 메스키트가 말하길, 흙에서 자연스럽게 나고 자란 드라이어드들은 자연으로부터 사회를 배운다고 했었다.
“모든 식물은 세계수의 축복이 닿는 땅에서 태어나 자라며 자연의 순리를 배워야 해. 그건 자연이 가르쳐 주는 드라이어드들의 사회화나 다름없어.”
“흙에서 나고 자라 터득한 사회성이 아니면 같은 드라이어드들끼리 포레스트를 이루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도 있어요.”
바곳은 인공 개량으로 태어나 급작스럽게 외따로 드라이어드가 된 경우였고 은둔자의 정원은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된 폐쇄적인 공간이라 드라이어드들이 정상적인 사회화를 겪지 못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먼저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드라이어드가 공격성을 띠며 피해를 준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았다.
“실제로 한 군락지와 인접한 목재소가 군락지를 침범하려 했다는 오해로 완전히 파괴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한동안 목수 연합 소식지를 뜨겁게 달구었으니 아시는 분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누구나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에게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곳에 있는 사람 중 한 번이라도 그러한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 발표자의 말에 과하게 공감할 것이고, 겪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프레젠테이션의 기사나 증거 사진을 들먹이며 두려움을 심기 위해 작정한 발표자의 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고 봤다.
“이 세상 인구의 어느 정도가 드루이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고 답을 했다.
“한 100명 중에 한 명은 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많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모두 앞 번호대 테라리움의 상황만 보신 거겠죠. 저희가 조사한 바론 드루이드는 만 명 중에 한 명이 채 될까 말까 합니다. 아주 희귀한 종족들이지요.”
드루이드 수가 그렇게 적었어? 내가 드루이드이기 때문에 주변에 드루이드들만 보인 건가…?
“그렇게 희소한 드루이드 하나가 포섭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의 수도 정해져 있습니다. 즉, 세상의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 대부분은 사실상 목줄이 없는 완전 야생 짐승들이나 다름없다는 거죠.”
“짐승….”
“아주 오래전, 한 개의 테라리움과 그 주변 일대를 괴멸 직전까지 몰고 간 병해충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농지를 소유한 분이 계신다면 분명 들어 봤을 병해충입니다. 백목마름병해충이죠. 식물 전체를 하얗게 목질화시켜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그 병해충의 최초의 근원지가 드라이어드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인간보다 웃도는 힘을 가진 주제에 정작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맺지 못하면 병해충에 취약하다니요. 하지만 일반 식물들보다 생명력은 높아서 바로 죽지도 않고 식물에 발이 달린 격이니 걸어 다니며 온갖 군데에 병을 퍼뜨려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백목마름병해충!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있었던 일들과 윈터 그리고 인동덩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병해충의 최초 근원지가 드라이어드였다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백목마름병해충의 악명은 대단한지 상당수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아도 드루이드와 영혼의 연결을 맺지 않는다면 이처럼 인간들에게 해로운 병을 몰고 오는 위험 인자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매 순간 드라이어드가 우리의 인생을 망치지 않을까 걱정하며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답을 찾았습니다.”
두루마리가 돌아가며 다음 프레젠테이션으로 넘어갔다.
“인간이 지배하는 자연, 인간의 통제 속에서 인간들에게 안전한 낙원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희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목표입니다. 본래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을 만끽하고 위험인자들을 인간들의 지휘하에 두는 것이지요.”
이곳에 오기 전 샐스트에게 안내받았던 구역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저희는 먼저 식물들 중 자생력이 강한 표본을 모아 독자적인 기술로 인공적인 자연 환경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곳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불에 의해 괴멸하여 세계수 가지조차 말라 버렸던 땅이란 것을 모르시겠죠. 지도에서조차 지워진 곳에서 저희는 가능성을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정말로 이곳이 불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는 뒤 번대 테라리움 중 하나였단 말이야?
발표자의 말에 강의실에 앉은 모두가 놀란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또한 이 완전한 자연 속에서 저희는 순화된 드라이어드들을 선별하고 선별하여 철저하게 학습시켜서 보존할 예정입니다. 목표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의 드라이어드들을 수집하는 것이지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안의 드라이어드들은 절대로 인간들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루이드가 아니라도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죠.”
친구라….
듣는 내내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인페르노는 단순히 불을 숭배하는 사이비 집단이 아니라 그냥 사이비 집단 그 자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