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벽의 두께는 돌담보다 얇았다.
보통의 드라이어드라면, 아니 묘목일지라도 가볍게 부술 수 있을 정도의 두께였다.
인간의 힘을 훨씬 웃도는 드라이어드들을 인공적인 시설로 가둔다는 것은 솔직히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드라이어드들은 유리 우리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선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의 저항도 없는, 절망적인 현실에 순응해 버린 패배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같은 종에 따라 나눠 놓은 것인지 유리 칸마다 생김새가 똑같은 드라이어드들이 몰려 있었다.
“대체… 이게 뭐죠?”
“아름답지 않습니까?”
“왜 드라이어드들을 이렇게 전시해 놓은 거예요?”
뒤섞인 감정이 목소리를 가늘게 떨게 만들었다.
“그냥 드라이어드가 아닙니다. 우수한 드라이어드지요. 또한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녀석들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안전하다는 거지요. 밖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병충해로부터 깨끗하고 인간의 손에 길들여졌으니 흉폭함이 없지요. 그들에게 인간은 부모이자 스승이라 절대 공격하지 않는….”
온실 속의 화초.
토악질이 밀려왔다.
입을 틀어막자 샐스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 이런. 불쾌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과의 주체가 내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그것이 아니었다.
“환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나 봅니다. 오늘처럼 관람객이 몰리는 날엔 더 신경 써야 하는데.”
샐스트가 유리창을 두드리자 드라이어드와 함께 있던 누군가가 이쪽으로 가까이 왔다.
그자 역시 곡물색 옷을 입은 이곳의 직원이었다.
샐스트는 그자를 보더니 천장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 지시를 알아들은 것인지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우리를 빠져나갔다.
“어…. 하늘이 아니었네요?”
뻥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던 하늘은, 알고 보니 거울 같은 판이 돔 형태로 빼곡히 차서 푸른 하늘 영상을 재생하고 있는 환상이었다.
“인공 기상 시스템으로 사시사철 맑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으며, 식물들에게 일정한 광량을 제공해 주지요. 아, 물론 특정 계절에 잘 자라는 종을 위해선 기후와 온도를 변화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맑은 하늘 아래 푸른 잔디 그리고 아름다운 꽃들. 언제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찾아 주는 관람객분들께 최상의 작품을 보여 줘야 하는 것이 저희의 의무니까요.”
지금 내가 보는 이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공기마저…?
“…….”
“굉장하지 않습니까? 식물들에겐 최상의 생육 환경을 제공함과 더불어 관람객들에겐 항상 최고의 서비스를. 저흰 지극히 인도적으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거짓된 지상의 낙원.
“제 눈엔 저 드라이어드들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음, 밥때를 놓쳤나 보군요.”
“전 그런 뜻이….”
샐스트가 환기 시스템을 조정하고 있던 직원에게 다가가 다시금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끔찍하게도… 내가 바라보고 있던 우리 안의 천장에서 스프링클러가 터졌다.
인공 비를 내린 것이다.
드라이어드를 철저히 식물원의 식물로 관리하는 모습에 넌더리가 났다.
난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하는 걸까? 저 드라이어드들을 구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걸까?
언젠가 내 꿈에 찾아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이름 모를 드라이어드들….
그 꿈은 내게 이 참상을 고발하려 했던 것일까? 반드시 내가 구해 줄 테다.
체념한 채 땅만 바라보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억수 같은 물줄기를 뚝뚝 맞고만 있는 드라이어드들을 의지를 담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시선을 느꼈는지 드라이어드들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죽어 버린 생선 같은 텅 비어 버린 눈들과 마주했다.
그리고 퍼뜩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받은 느낌을 들었다.
“어…. 저 드라이어드들, 그러니까 모체는 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내 말에 샐스트가 무슨 소릴 하냐는 얼굴로 되받아쳤다.
“그럴 리 없습니다. 저들의 교… 아니 유전자 정보에 의하면 물을 좋아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 됐어요. 이곳에 다른 드루이드는 없어요? 다른 드루이드도 분명 같은….”
“핫, 이 인공 비는 보통 비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꽃들의 잎이 더 화사해지지 않았습니까?”
샐스트는 의도적으로 내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처럼 드라이어드들에게 장식된 꽃잎들이 더욱 선명해지긴 했다.
물론 얼굴들은 여전히 감정 없는 인형 같은 얼굴이지만.
“특수 색소가 포함되어 있어 꽃들이 더욱 선명하게 색을 발하게 만들죠. 자, 이만하면 다시 최상의 컨디션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색소요…?”
“단순히 감미료 같은 겁니다. 자, 이곳에 계속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다음 코스로 안내해 드리죠.”
충격적인 광경에 이미 멘탈이 다 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적을 알아야만 했다.
샅샅이 살펴서 내가 훼방이라도 놓을 수 있는 틈을 발견해야만 했다.
이젠 단순히 인페르노의 자금줄을 끊는 것이 문제가 아닌, 이곳에 갇혀 물건처럼 전시되고 있는 드라이어드들을 구해야만 했다.
인공 하늘이 뒤덮고 있는 복도는 꽤 길었다.
양옆으로 상당한 수의 다양한 드라이어드들이 휙휙 지나쳐 갔다.
샐스트는 내가 편히 관람할 수 있도록 걸음 속도를 늦췄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한 내가 앞질러 걸었다.
“아, 희망의 정원은 취향에 맞지 않으신가 보군요.”
희망? 희망의 정원은 개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안에 있는 모든 관람객분들께 안내드립니다.”
도망치듯 긴 복도를 빠져나왔을 때, 사방에서 안내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체 방송 시스템은 여태 내가 다녀간 테라리움에서도 못 봤던 것이었다.
“잠시 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꽃의 무대가 시작됩니다. 공연을 관람하실 분들은 B-2 구역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꽃?”
“네, 보는 순간 마음을 뺏겨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꽃입니다. 꽃잎이 층층이 회전하며 춤추는 모습이 이곳의 명물이죠. 하지만 배포용 초대장으로 오신 탓에 관람을 하실 순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꽃의 정체가 궁금하기보단 차라리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아, 저기 기념품 상점이 있군요. 하나 구매하시겠습니까?”
샐스트는 말릴 새도 없이 중앙에 둥글게 자리 잡은 점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저대로 그냥 가게 내버려 둬?
“빨리 오십시오! 그렇게 멍하니 계시다간 길을 잃습니다.”
내가 끔찍하단 표정으로 꾸역꾸역 걸어가든 말든 샐스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워 보였다.
기념품 상점이란 곳도 가관이었다.
그곳을 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꽃을 꽂거나 화관을 썼고 꽃나무 가지를 들었다.
놀이공원에서 파는 동물 머리띠와 같은 류였다.
“관심 없어요.”
기념품을 사서 치장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드라이어드를 흉내 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까다로우시네요. 그럼 바로 체험 학습장으로 갈까요?”
“체험 학습장?”
이미 드라이어드 전시장으로 인해 오만 정이 떨어졌는데 여기서 더 떨어질 수 있을까?
구역의 경계에 진입하자 다시금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산책로가 사라지고 신발 밑창까지밖에 오지 않는 낮은 잔디밭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또한 무릎 높이의 X자형 나무 울타리가 반듯하게 구역을 나눠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오만 정은 내핵을 뚫고 떨어져 버렸다.
“순해서 아이들이 가까이에서 만지고 체험할 수 있지요. 원래 아이들을 위한 코스이지만 간혹 이런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기에 한번 모셔 봤습니다.”
낮은 울타리 안엔… 드라이어드 묘목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손길을 받아 내고 있었다.
기념품 상점에서 샀던 나뭇가지가 한 묘목의 눈 옆을 위태롭게 스쳐 지나갔다.
“여기 좀 봐!”
“에이, 날 안 봐. 아빠, 여기 좀 보게 해 봐요.”
“와 귀엽다. 머리도 부드러워. 이거 꽃 뜯을 수 있는 건가?”
곁에 직원들이 있었으나 아이들의 행동을 저지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묘목들은 유리 안의 드라이어드들보단 움직임이 활발했다.
손길을 피해 고개를 돌리거나 몸을 트는 등 명백히 싫어하는 몸짓을 했다.
“체험 학습장이… 묘목 드라이어드들을… 전시하는 곳이었나요?”
“아이들이 사나운 드라이어드들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내부에서 태어나서 순한 데다 말도 잘 듣습니다.”
“너무 과한데요? 묘목들이 다치고 있잖아요.”
“크면서 상처는 다 사라집니다. 아, 기본적으로 체험 학습장에 투입되는 묘목들은 전시 가치가 떨어지는 등급들이라 저 정도는 큰 손해가 아닙니다.”
혹시 나 또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것이 아닐까?
대체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다 뭐냔 말이다….
충격으로 인해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린 날 샐스트가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여긴 너무 아이들 놀이터지요? 그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파라다이스는 얼어 죽을… 여긴 헬이었다.
“정신 나간 꽃 하나가 난동을 부리고 있어요!”
“쯧, 분갈이시켜. 햇빛도 없는 추운 곳에서 반성 좀 해 보라지.”
지나가다 들은 직원들의 대화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저들은 C구역 담당인데 초대장 입장 가능 구역이 아니라 마주칠 일도 없습니다. 그나저나 정신 나간 꽃이라니. 좋지 않은 유전자가 흘러 들어갔나.”
샐스트는 그 충격적인 대화에 덤을 얹으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여긴 전체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대체 왜 모두가 이런 미친 곳을 좋다고 구경하고 내버려 두는 거지? 대체 왜?
다음 구역은 울창한 숲이었다.
샐스트는 이마저도 인공적으로 구현한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난 단번에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을 떠올렸다.
그곳 역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드라이어드들은 전부 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게 맞는 거죠?”
“하하, 말씀이 조금 위험하십니다. 내부에서 태어났다고 해야지…. 저희가 어떻게 신의 영역에 도전을 하겠습니까?”
역시나 샐스트 역시 단순한 직원이 아닌 인페르노의 일원이 분명했다.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으나 내겐 진실이 보였다.
이곳의 드라이어드들은, 어쩌면 전부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일 것이다.
“그래서…. 다음은 어디죠?”
“이번엔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아무래도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듯하여 저희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후원 상품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마케팅 홀에서 투자 가치가 높은 아이템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또 내게 무슨 지옥을 보여 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