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6화 (326/604)

시들링이 길드 수배범이라는 사실은 여태껏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긴 해도 공포에 질리는 수준이지, 우리에게 어떠한 페널티가 붙은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당연히 대비하고 있었어야 할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수배지가 돌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도 지금 이렇게 맞붙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아스키아 길드가 시들링을 찾기 위해 온 걸까요?”

“굳이 이렇게 뒤 번대 테라리움까지 내려올 만한 일이라곤….”

이리스가 긍정의 의미로, 하지만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것처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시들링은 전투 장비를 점검하곤 곧바로 검을 빼어 들었다.

마주치기만 해도 즉시 전투에 돌입할 모양새였다.

“테라리움 내에서 전투는 금지되어 있어. 아무리 대형 길드라 해도 한 테라리움과 척을 지는 것을 원치는 않을 테니 시들링을 밖으로 유인하려 할 거야.”

이리스가 시들링을 막아서며 말했다.

즉, 우리가 테라리움 안에서 잠자코 있는 한 세이프존의 혜택을 맘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계속 이곳에 있을 순 없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으로 안내받을 수 있는 날짜가 당장 내일이었다.

그것도 자정이 지나면 바로일지, 아니면 내일 지금 이 시간일지 정확하지 않았다.

이를 놓치면 다시 한 달을 기다려야만 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동행할 사람을 고를 때 시들링을 제외해야겠지…. 하지만 그는 우리 길드원인데.

동료가 위험에 처했는데 이대로 두고 가도 되는 걸까?

그때 잠자코 있던 노토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만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아스키아가 수배 중인 사람이 44번째 테라리움에 또 있다는 거야?”

노토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은 후 이리스의 말에 답했다.

“시들링과 동행 중인 사람들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밖에 진을 치고 있다고 했지? 그들의 타깃은 우리까지 포함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단숨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들 역시 당장 내일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일정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듣고 보니 이상해. 왜 하필 44번째 테라리움에 있을 때를 노린 거지? 시들링은… 28번째 테라리움에 더 오래 머물렀잖아.”

이리스의 의문대로 우린 28번째 테라리움에서 한 달 이상을 머물렀다.

위치가 노출된다면 가장 적절한 시기는 28번째 테라리움이 되어야 했다.

“어쩌면… 16번째 테라리움에서의 상황과 같을 수도 있겠어요.”

시들링은 비록 16번째 테라리움의 전속은 아니었으나 그를 다른 곳에 뺏기기 싫은 파필리온이 치밀하게 관리하며 거의 직속 용병처럼 굴려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들링이 가이아 길드원이 되기 전의 주둔지는 16번째 테라리움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상당 시간을 보냈음에도 아스키아 길드가 직접적으로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어쩌면 이유는 하나, 주둔하는 테라리움이, 그것도 행정 관리원이 호의적으로 시들링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 분명하다.

16번째 테라리움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시들링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분명 사방에 깔린 수배지를 보고 그의 정체를 알아챈 이들이 무수히 아스키아 길드에 제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키아 길드는 행동하지 않았다.

“시들링이 28번째 테라리움에 있었을 때 역시 잠잠했다는 건, 그가 28번째 테라리움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임이 틀림없어요. 지금으로선 그것 외에 이유를 유추하기 어렵네요.”

그런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내가 길드원의 정보를 대외로 공표한 적도 없는데 어째서 시들링과 28번째 테라리움의 관계가 호의적이란 걸 알아차린 걸까?

그리고 그가 28번째 테라리움을 떠나자마자 어떻게 바로….

더구나… 우리의 행적이 어쩌다 이리도 쉽게 추적당한 거지?

“노토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봐. 이리스는 바로 공격당하지 않았잖아. 아스키아의 문양을 제대로 확인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이리스가 있었는데 그들이 못 알아챘을 리도 없고. 시들링을 밖으로 끌어낼 생각이었다면 충분히 이리스를 인질로 삼을 수도 있었어.”

제퍼가 이리스를 살피며 심각한 소리로 말했다.

“즉, 시들링에게 동료가 있다는 정보는 그들에게 있지만 동료 전체의 정보는 없는 게 분명해. 그 없는 정보는 어쩌면 이렇게.”

제퍼의 손이 우리를 향해 움직였다.

휙휙 젓는 손은 우리의 인원을 반으로 나누었다.

나와 시들링, 로웰라 그리고 이리스 파티 4명이 나뉘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들은 우릴 시들링의 동료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반면에….”

“나랑 로웰라는 알아볼 수도 있다는 거구나.”

“어쨌든 아스키아 길드가 친히 행차했으니 제보자가 존재할 겁니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나 분명 우리와 그쪽 세 명이 따로 행동했을 때일 것 같은데….”

하필이면 내가 걸려 있다니.

“시들링만 노린다면 다행인데, 그렇다기엔 길드원들을 많이 끌고 온 게 걸리고. 마스터, 어쩌시겠습니까?”

“음…. 나도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나 혼자 44번째 테라리움 밖으로 나가는 건 좋지 않다는 건데.”

상황이 너무 복잡하게 흘러갔다.

똑똑.

그때 누군가 우리가 있는 병실 문을 두드렸다.

잔뜩 긴장한 채 문을 노려보기가 무색하게, 방문한 자는 글로리아의 하인이었다.

글로리아는 44번째 테라리움 전체에 눈을 두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 역시 이 테라리움에 일어난 이변을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글로리아 님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글로리아는 고맙게도 병실에만 처박혀 머리를 굴리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선사해 주었다.

“5번째 테라리움에 스톤헨지를 둔 대형 길드 아스키아가 아무래도 제이 님의 일행인 시들링을 찾기 위해 방문한 것 같다고 전해 드립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테라리움 밖을 나가는 즉시 접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이니 가급적 테라리움을 떠나지 말 것을 권고드립니다. 또한 그들은 시들링 외에도 다른 이들을 함께 찾고 있는 것으로 보여 글로리아 님께서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테라리움 측과 함께 아스키아 길드와 협력하는 척 추가 정보를 캐고 있으며 곧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인의 말은 우리의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글로리아 님께선 내일 있을 제이 님의 중요한 일정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계십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협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44번째 테라리움이 우리의 우방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그들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전이었다면 아스키아 길드가 들이닥치자마자 좋다고 우리를 그쪽에 내다 던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 역시 대형 길드와의 충돌은 피하고 싶을 텐데, 껄끄러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를 숨겨주고 있는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리아의 하인은 그들이 시들링과 더불어 찾고 있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엘더 플라워를 데리고 다니는 머리가 긴 여자 드루이드?”

“이거….”

“아무래도 제이 님을 특정해서 말하는 것 같지 않아요?”

“왜 로웰라는 제쳐 두고 나를 콕 집어서? 그것도… 엘더 플라워라니?”

하인은 주저하며 글로리아가 가졌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아스키아 길드와 함께하는 것으론 보이나 길드 문양을 달지 않았고, 행동은 묘하게 달리 하는 무리가 또 있는데 그쪽이 제이 님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무리였다.

하인은 또 정보가 업데이트 되면 방문하겠다며 병실을 떠났다.

그가 떠나자마자 이리스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설마…! 인페르노?”

“인페르노가 아스키아와 손을 잡았다는 건가요?”

“제이 님을 특정해서 노릴 쪽은 그곳뿐인데.”

“이렇게 되면 계속 44번째 테라리움에만 있을 순 없어요. 이곳은 모두가 우리 편인 것은 아니니 안전하지 않아요. 차라리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대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내가 인페르노 말고 척을 진 무리가 있나? 아무리 고민해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데?

“인페르노가 그렇게 대놓고 활동할 리가 없어요. 그것도 5번째 테라리움과 연계된 길드와 함께라니. 억측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조심하지 않을 필요는 없으니…. 잠깐… 저를 특정할 때 엘더 플라워를 데리고 있는 드루이드라고 했죠?”

이러면 짐작가는 곳이 하나 있긴 했다.

3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플라멘이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엘더 플라워를 부리는 드루이드는 죄다 수소문하고 있다고 했었지.

“이를 좋지 않게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악용되면 그만큼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무려 이곳의 생태계를 바꿀 정도로 큰 힘이니까요.”

누군가 해안에서 그래프트를 펼친 인물과 나를 동일시하는 데 성공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의심한다면 그쪽이었다.

이제는 결단해야만 했다.

나는 예정대로 말벌을 보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안내원과 접선해야만 한다.

시들링은 물론 길드원들은 44번째 테라리움을 떠나 28번째 테라리움, 혹은 16번째 테라리움으로 몸을 숨긴다.

“당분간 우린 따로 행동해요.”

단독 행동 선언에 예상했던 대로 다들 반발이 심했다.

“혼자는 위험해요!”

“당분간만이에요.”

난 폰을 꺼내 화면을 두드리며 설명을 이었다.

“다 같이 움직이는 것보다 저 혼자 움직이는 게 도망 다니는 건 쉬울 거예요. 타토르가 그랬죠?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르고 안내원에 의해 아주 비밀스럽게 이동되었다고. 만약 그쪽과 접선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전 쥐도 새도 모르게 몸을 빼낼 수 있을 거예요.”

다들 내 계획을 조용히 경청했다.

“일단 44번째 테라리움을 빠져나가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몸을 숨기고 아스키아 길드를 따돌려요. 그리고 전 안내원과 접선할게요. 잠잠해지면 절 찾으러 와요.”

내 폰은 현재 검은 말벌집이 빠지고 본래의 루프의 기생충이 심어진 말벌집이 장착된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이 만능 기생충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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