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4화 (324/604)

상당히 많은 코스 요리가 준비되어 있는 듯했으나 채 다 맛보기도 전에 글로리아가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났다.

조금은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말을 통해 어쩐지 44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환멸이 느껴졌다.

타토르도 함께 따라가려고 했으나 자신을 대신해 손님들을 대접해 달라는 글로리아의 당부에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녀가 떠난 후 그는 어떻게든 글로리아를 변호함과 동시에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애를 썼다.

수다에 참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글로리아로 인해 봉인되어 있던 입이 터진 봇물처럼 열렸다.

“글로리아가 참 열심히 살았는데….”

그 과정에서 글로리아가 고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가 글로리아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오해했고 노예 문서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맡긴 만큼 그녀에 대한 과거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글로리아의 부모들은 내가 봤던 노예 문서에 나열된 이름들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연금술이 가미된 문서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들이 아이를 버리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거라 판단했다.

글로리아란 이름도 신분에 얽매이지 말고 크게 자라라는 뜻을 담아 지었을 정도로 사랑했거늘.

하지만 무정하게도 그들이 글로리아에게 이름을 짓는 순간, 종이는 그녀의 이름을 낙인처럼 제 몸에 찍어 버렸다.

글로리아가 그토록 악착같이 성장한 이유는 자신의 부모를 찾기 위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버리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44번째 테라리움을 떠난 탓에 끝내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정이었다.

글로리아는 행정 관리원이란 권력을 무시할 정도로 비선 실세인 이미지이나, 그녀는 상당히 44번째 테라리움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고 주민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저택에서는 물론 그녀 아래서 일하는 수많은 고용인들이 전부 테라리움의 주민들이었으며, 그들은 어떻게든 시궁창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지를 가지고 악착같이 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환경이 너무 좋지 않지요.”

주변에 유혹이 너무 많았다.

도박을 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주변에 도박장이 가득하고, 페이크 로열들이 잔뜩 올려놓은 물가와 아무리 일해도 가장에게 빌붙어 사는 가족들로 인해 성실하게 살아도 여전히 궁핍했다.

조금이라도 잘되면 가족을 떠나 친인척의 빚쟁이들까지 몰려와 못살게 구니, 글로리아의 고용인들 중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퇴사율도 높다고 했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찾아가는 곳은 뻔하게도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다는 도박장이었다.

일의 난이도와 보수를 떠나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도 글로리아는 언제든지 기회를 주고 있지요.”

떠난 이들이 다시 돌아와도 일자리를 내주고 아무 질책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한 과거의 원인이 된 44번째 테라리움에서 행정 관리원처럼 테라리움을 보살펴 주고 있었다.

한참 글로리아를 칭찬하던 타토르는 그녀가 걱정됐는지 후식이 나오기도 전에 자리를 떴고 결국 길드원들만 남게 되었다.

난 타인이 있기에 숨겼던 장비 강화에 대한 이야기를 뒤늦게 길드원들과 나눈 후 자리를 파했다.

***

다음 날, 글로리아는 곧바로 44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과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글로리아는 어제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 다르게 다시 고고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그러했다.

행정 관리원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상당히 부패한 테라리움을 운영하는 사람이니 마피아나 조폭 같은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순하고 유약해 보이는 남성이 자리에 있었다.

곧바로 필라가 떠오를 만큼 그는 연금탑의 연구원직에 어울려 보였다.

음, 그래도 사람을 무조건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순 없겠지?

“몸이 많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멀쩡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그는 내 팔을 유심히 보았다.

난 날이 밝자마자 의사를 불러 깁스를 풀었다.

팔은 나날이 아주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고 통증도 없는 데다 뼈는 다 붙은 느낌이 들어, 솔직히 그다지 깁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이를 갈며 세계수에게 기도했다.

더 이상 양팔을 못 쓴다는 이유로 민폐 끼치거나 도움받기 싫으니까 회복 속도에 가속도 버프나 붙여 달라고.

로웰라가 짜 놓은 판이 조금만 더 흘러가면 이리스와 제퍼가 이젠 나와 시들링을 주제로 한 연애 소설까지 쓰게 생겼으니 가만 놔둘 수 없었다.

이왕 내 몸을 챙겨 주기로 마음먹었으면 끝장을 봐라.

너희 가지가 뽑아 먹는 다이아가 얼만데, 이게 유료 서비스였으면 내가 버프로 떡칠을 했을 거라며 팔을 노려보고 으름장을 놓은 덕인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양팔이 꽤나 가벼웠다.

의사는 너무 이르게 깁스를 푸는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내 주장 역시 완고했다.

“정말… 길드원이 길드 마스터를 닮아 고집불통인 것이군요.”

한숨을 담은 그 말의 진위를 알게 되자 좀 어이가 없었다.

시들링이 내가 물어뜯은 상처를 감싼 붕대를 제멋대로 풀어 버리고 이후론 치료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걔는 나랑 달리 세계수 버프도 없어서 오히려 팔이 박살 난 나보다 회복 속도가 더딘 편이었다.

설마 근근이 보이던 그 잇자국이 내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쨌든 내 팔은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움직이기엔 조금 불편했으나, 그렇다고 남의 손을 빌릴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이젠 느릿하게나마 찻잔도 내 손으로 들고.

“부상이 좀 과장되어 있었어요.”

내 말에 글로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럼 어떻게 설명해? 세계수가 밥값하고 있다고?

“그나저나… 제게 보상이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제이 님 덕분에 행방불명됐던 테라리움 주민들이 가족들의 품으로 되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잠정적 위험 지역으로 취급받던 지역이 안전지대로 돌아오게 되어 테라리움의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보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뒤이어 핸드폰에서 알람음이 들렸다.

핸드폰 화면 속엔 세계수의 문양이 양각으로 파인 초록 실링 왁스가 찍힌 하얀 편지 봉투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44번째 테라리움의 은인에게.

드루이드 네임: 제이

사고를 당한 테라리움의 주민들을 보금자리로 돌려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민들의 테라리움 충성도가 상승했습니다.

테라리움 주변의 안전도가 상승했습니다.

달성 조건: 44번째 테라리움 주변의 위험 지역을 정리.

★마을 주민들이 더 이상 당신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세계수의 44번째 테라리움 내 당신의 지위: 5급 가드너

(4급 이상부터 해당 테라리움의 일정 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9급 미만부터 해당 테라리움과 적대 관계가 되어 입장이 불가해집니다.)

귀하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혜택을 드립니다.

- 세계수 44번째 테라리움 내 상점 이용 가능

- 세계수 44번째 테라리움 내 지정 여관 이용 시 20% 할인

- 1년에 한 번 세계수의 열매 구매가 50% 할인

- 40번대 테라리움 방문 시 44번째 테라리움이 당신의 신분을 보장합니다.

세계수의 44번째 행정 관리원 및 과수원이 본 증명서를 인증합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