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1화 (321/604)

마거리트를 달래느라 진이 쭉 빠진 사이,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되었는지 글로리아의 하인이 날 찾으러 왔다.

옆방을 꾸미겠다고 하더니 여러 제약이 있어 같은 층의 식당 겸 휴게실을 개조했다고 한다.

급조한 티가 나지만 레스토랑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노력한 점들이 보였다.

여럿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식탁에 깔린 포도주색 테이블보 위로 하얀 레이스로 만든 테이블 러너가 중앙을 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삼지창을 닮은 촛대에 오렌지빛 촛불이 일렁거리고 금테를 두른 고급 식기와 목이 긴 잔들이 사람 수에 맞춰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이미 길드원들은 반들거리는 건포도색 식탁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반가운 얼굴로 날 맞이했다.

글로리아는 아직인가?

그녀를 찾기 위해 주변을 좀 더 둘러보니 그 짧은 시간 내에 꾸미느라 고생 좀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색 물감을 한껏 발라 보는 것만으로도 묵직함이 느껴지는 그림 액자들을 우중충한 벽을 가리기 위해 잔뜩 걸어 놓은 걸 구경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빈 의자에 앉았다.

“글로리아는?”

“손님을 데리러 간다던데.”

손님? 이 자리는 글로리아와 우리 길드원들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나?

오래 지나지 않아 기다렸던 글로리아가 웬 남자와 팔짱을 낀 채 나타났다.

그녀는 불만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는지 표정이 말도 못 하게 죽상이었다.

“옆엔 누구지?”

“글쎄… 처음 보는데. 혹시 여기 행정 관리원 아닐까?”

44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고?

글로리아 옆의 남자는 그녀와 반대로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반되는 표정 때문에 서로가 아무리 다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도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남자는 30대쯤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외모에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이었다.

우리가 44번째 테라리움에서 숱하게 마주쳤던 페이크 로열들처럼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옷차림도 혀를 차게 만들었지만, 더욱 심각한 건 코밑에 갈매기 날개처럼 비죽 솟은 콧수염이었다. 가짜 수염을 달아 놓은 것처럼 심각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얇은 감자칩이 담긴 통에 그려진 브랜드 로고가 떠오르는 수염이었다.

“아, 다들 오셨군요. 늦어서 죄송해요.”

글로리아는 피곤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우리에게 인사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남자는 자연스레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글로리아는 서버가 따라 준 물을 천천히 마시더니 이내 가볍게 숨을 내쉬고 날 바라보았다.

“제 무리한 의뢰로 인해 심신을 크게 다치신 데에 깊은 사죄의 말씀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완수하신 점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려요. 덕분에 제 염원하던 목표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글로리아는 말하다 앞의 남자를 힐끔 곁눈질했다.

“오랫동안 가족의 품을 떠나 행방불명이 됐던 이들도 대부분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이는 개인의 의뢰를 떠나 44번째 테라리움 전체의 안녕과 평화에 관련되어 큰 업적을 이루셨으므로 제 개인적인 보상과 더불어 행정 관리원님께서도 따로 테라리움 차원에서 보상하실 예정이에요.”

동굴에 걸린 뒤틀린 시간의 저주가 깨지고 원 상태로 돌아왔을 때, 쓰러져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모두 동굴 안에서 행방불명된 사람들이었구나.

“오, 그곳을 정리해 주신 드루이드님이셨습니까? 이런, 대단한 분이신 걸 미처 몰라뵈었군요.”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조금은 방정맞은 목소리가 움찔거리는 콧수염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예를 갖출….”

“그만하면 됐어요.”

글로리아의 말에 그는 뚝 입을 다물었다.

가만 놔뒀으면 몇십 분을 혼자 떠들 수 있을 것처럼 가벼운 입술이 콧수염을 따라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저분은 누구신가요?”

내 물음에 글로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꼭 오지 않기를 빌었던 순간이 다가온 것처럼 눈꺼풀이 내리 떨어지는 장막 같았다.

“음… 이전에 간단히 이야기는 드렸었죠. 이분의 이름은 타토르, 44번째 테라리움에서 저와 경쟁 관계에 있으셨던 분이시고….”

“그건 다 옛날 일이지, 암.”

“지금은 저의 약혼자입니다.”

“네?”

“헉! 약혼자요?”

왜 갑자기 이야기가 저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글로리아의 저택에서 들었던 바에 의하면 타토르란 인물은 그녀의 오래된 숙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약혼이라니?

적어도 식당에 들어섰을 때부터 봐온 글로리아의 표정으로 유추하건대, 그녀는 조금도 이 관계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자존심이 강하고 44번째 테라리움 안에서라면 무서울 것 하나 없어 보였던 그녀가 어째서?

“글로리아, 어떻게 된 연유인지 자세히 듣고 싶네요. 혹 원치 않는….”

“원치 않다뇨, 가당치도 않아요. 이 약혼은 제가 먼저 주선했어요. 이 좁은 테라리움에서 세를 갈라 싸우기엔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타협하기로 한 거죠.”

뚫어져라 그녀를 살폈는데, 지쳐 보였던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반듯해지더니 이내 처음 만났을 때의 고고한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연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옆에서 로웰라가 소곤소곤 귓속말했다.

그에 동조하여 나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자리는 저와 연이 깊은 여러분들께 제 약혼자를 소개해 드리기 위한 자리이기도 해요.”

“참으로 긴 시간이었지. 이리도 마음이 잘 맞을 줄 알았으면 그토록 빙 둘러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을. 글로리아가 귀히 여기는 분들은 제게도 귀인이랍니다. 여러분들께서 44번째 테라리움에 머무는 동안 불편함 하나 없도록 제가 각별히….”

“그만. 당신까지 나선다면 저분들께 부담이 될 거예요.”

글로리아의 말에 바람 빠진 풍선 입구처럼 푸들거리던 입술이 단번에 다물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관계의 우위는 기이하게도 전적으로 글로리아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말인데. 이 자리에서 우리가 결혼 후 가게 될 신혼여행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게 어때요? 지상의 낙원이라고 했던가요?”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설마!

“세상의 온갖 진귀한 꽃이 몰려 있다고 했죠? 어서 자세히 이야기해 줘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얼마나 황홀하고 낭만적인 신혼여행을 보내게 될지,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 수 있도록 당신이 가 봤던 그곳에 대해 이야기해 줘요.”

“글로리아.”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눈만 도르륵 굴려 날 노려보았다.

아마 이대로 일이 잠자코 진행되도록 내게 침묵을 강요하는 거겠지.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어요.”

“난 약속했어요.”

글로리아는 자신의 노예 문서를 찾아 준 의뢰의 보상을 갚으려는 계획이었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쉽사리 단서를 찾을 수 없었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그러나 이 자리에 무려 그곳에 직접 방문까지 했던 사람이 있었다.

“저는 당신이 그런 방식으로 보상을 하려 해 봤자 하나도 고맙지 않아요. 그냥 초대장만 주세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찾을게요.”

“아뇨, 그건 값이 맞지 않아요. 당신은 목숨을 걸고 그걸 찾아와 줬어요. 그러니 나도 맞는 보상을 해야만 해요.”

우린 서로를 노려보며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민한 로웰라가 지금 대화의 흐름 속에서 사건의 진위를 알아차린 것인지 양 입을 틀어막고 발을 동동 굴렀다.

글로리아가 약혼까지 해 가면서 이토록 강경하게 나서는 건 비밀리에 타토르에게서 정보를 입수하는 것에 결국 실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비장의 수를 쓴 거겠지.

차라리 타토르의 플레이스 안에 소속되어 정당하게 정보를 공유받으려는 것이었다.

“어허, 설마….”

우리의 침묵을 깬 것은 콧수염을 문지르며 글로리아를 보고 곤란하단 표정을 지은 타토르였다.

“조용히.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아요. 우리의 약혼은 예정대로 진행될 터이니.”

하지만 그의 반응으로 보건대 글로리아는 뭔가 잘못 짚은 것처럼 보였다.

“설마, 글로리아. 그 문서를 찾으러 저들을 동굴로 보냈던 것인가?”

“당신…!”

“왜 그렇게까지 했는가. 내게 말했다면 그냥 주었을 텐데. 엄한 사람들만 죽어 나갈 뻔했군. 그래도 당신이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라네.”

뭔가 이상한 이야기의 흐름에 나는 한발 물러나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글로리아가 설명했던 그의 이미지에 따르면 지금 타토르의 대답은 상당히 의외였다.

둘은 44번째 테라리움에서 둘도 없는 앙숙 관계, 이권을 놓고 다투는 치열한 라이벌.

글로리아의 노예 문서를 손에 넣어 숨긴 것도 그녀의 약점을 쥐기 위해 그러했음이 타당했다.

그런데 달라고 했으면 그냥 줬을 거라고?

“그 문서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소리야?”

“아니까 내가 숨겼지 않는가? 만약 그게 돼지 같은 놈들 손에 들어갔다면 게걸스럽게 자넬 뜯어먹었을 걸세. 테라리움엔 자네를 노리는 자들이 아주 많지 않은가? 절대 남의 손에 들어가는 꼴은 못 보지.”

“바로 너 같은 놈들을 말하는 거 아냐?”

“섭섭하구먼. 그래, 그런 것이었어. 이 약혼도 뭔가 있나 보군…. 난 그것도 모르고 글로리아, 자네가 드디어 내게 마음을 열어 준 줄 알았다네.”

갑자기 목이 타는 느낌이 들어 찬물이 가득 채워진 잔을 노려보았다.

손이 이 꼴이라 잔을 들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네?

내 손을 움직일 수가 없는데 어쩌자고 만찬에 참여한 거야?

그때, 큰 손이 불쑥 내가 노려보는 잔에 닿았다.

그리고 가볍게 잔을 쥔 채 느린 속도로 입술 가까이 가져왔다.

“어? 언니, 물 마시고 싶었어? 말하지….”

아쉬운 말과 다르게 로웰라의 목소리는 팝핑 캔디처럼 즐겁게 통통 튀었다.

그녀의 곱게 휜 눈이 나와 시들링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언니만 쳐다보고 있는데….’

로웰라에게 즐거움을 안겨 준 원인인 시들링은 아무 말도 않고 내가 편히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잔을 기울여 주고 있었다.

욕실에서 했던 로웰라의 말 때문인지 갑자기 그의 모든 행동이 의식이 되어 볼에 미약하게 열이 올랐다.

“목이 말랐던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게….”

갑자기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했더니 한껏 열이 뻗친 글로리아를 상대하던 타토르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우리 쪽을 뚫어져라 보던 그는 이내 시들링을 따라 테이블 위의 물잔을 쥐었다.

“목이 마르지 않은가? 일단 물을 좀 마시고 말하게나. 자네가 흥분해서 유리잔을 깰 수도 있으니 이 내가….”

“저리 치워요!”

글로리아의 서슬 퍼런 외침에 잔뜩 풀이 죽은 콧수염이 날개를 접었다.

그녀가 큰 소리를 낸 덕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황급히 시들링이 들고 있는 잔의 물을 쭉 들이켜고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글로리아, 제3자가 듣기론 두 분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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