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0화 (320/604)

동굴 안에서 나 홀로 동떨어졌을 때 겪었던 일은 글로리아가 마련한 자리에서 다 같이 모였을 때 이야기하기로 했다.

글로리아가 이 일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앞으로의 일에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의 텀이 있었기에 잠시나마 길드원들을 모두 물리고 오롯이 내 드라이어드와의 시간을 보내겠노라 선언했다.

물론 침대에 묶여 있던 시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내 드라이어드들의 걱정과 보살핌 세례를 받았지만, 그들은 현재의 내 상황만을 신경 쓰는 티를 냈을 뿐 은연중에 과거의 일을 언급하지 않으려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었다.

드라이어드들 역시 궁금하고 걱정되어도 동굴에서의 경험이 내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까 봐 일부러 자극하지 않으려 물음을 회피했던 것이다.

어린 바곳마저도 분위기를 읽고 조용히 있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다른 이들도 아닌 실새삼이 먼저 나섰다.

“음… 가만히 누워만 있을 땐 몰랐는데, 너 좀 큰 것 같다?”

작은 체구와 내 좁은 시야각으로 인해 눈치채는 것이 늦었지만, 실새삼의 모습이 어딘가 달랐다.

한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체구에서 팔다리가 좀 더 길쭉해지고 키도 자라서 유치원에 갓 입학한 아이 정도의 크기처럼 보였다. 즉, 이젠 안고 다니기엔 좀 힘들 정도의 사이즈가 되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자신의 성장을 반겨야 할 실새삼의 표정엔 불만이 가득 차 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성장한 거지?”

내가 그사이에 레벨 업이라도 한 걸까? 물론 인삼 군락지에서의 일은 처음으로 솔로 플레이를 통해 완수해 냈으니 레벨 업을 할 법도 한데….

하지만 현재 실새삼이 자란 것은 이전의 데이지나 바곳처럼 경험이 축적되어 자연스럽게 성장한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본래 실새삼의 성장은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막연하게 느껴져 길드원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성장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려 했었다.

어쩐지 특별한 조건이 필요할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야 좋지만… 뭔가 영 찝찝한 기분이 드는걸.

“너… 만물을 보는 눈을 스스로 틔워 버렸구나.”

더구나 실새삼은 자신의 성장에 대한 의문을 회피하듯 주제를 돌려 버렸다.

“어…. 어라? 너 이제 눈 잘 보여?”

“하아….”

제 딴에는 단단히 심기가 틀어진 것을 표현하려는 듯, 짤따란 팔로 팔짱을 끼고 홱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모습이 그러하니 귀엽기만 할 뿐 영 긴장감이 없었다.

“그 힘을 어째서 다시 찾아 가 버린 것이냐, 아둔한 것아.”

모습과 정반대인 애늙은이 말투는 기묘하면서도 은근히 실새삼에게 잘 어울렸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갑자기 되돌아오긴 했는데…. 잘 써먹긴 했어. 그나저나 되찾아 가 버렸다니? 설마, 정말로 네 눈이 안 보였던 게 이와 관련이 있었던 거야?”

실새삼은 무거운 침묵으로 내 말에 대해 강한 긍정을 내비쳤다.

그러자 오래된 의문에 대한 퍼즐이 맞춰졌다.

내게 의료 드라이어드들의 진정 능력이 잘 통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실새삼의 능력 때문이었다.

드루이드인 나를 숙주로 여기기 때문에 내게 해로운 힘을 자신이 대신 흡수하는 능력.

그런 능력으로 비추어 볼 때, 실새삼은 세계수가 내게 내린 만물을 보는 눈을 해로운 능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세계수가 예전에 내게 큰 피해를 줬을지언정… 세계를 수호하는 신은 ‘해롭다’라는 규정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데.

“이젠 숨길 줄도 알고.”

“숨기다니?”

실새삼이 손가락으로 내 눈을 가리켰다.

곧바로 알아차리진 못했으나 문득 욕실에서 거울을 통해 봤던 내 모습을 떠올리자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거울 속의 내 눈은 금안이 아니었다.

더불어 실새삼의 눈이 보이지 않는 페널티도 없으니 여전히 난 만물을 보는 눈을 비활성화 상태로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전처럼 아예 사용하지 못하던 것과 달리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된 상태라는 뜻이다.

즉 만물을 보는 눈은 패시브 스킬에서 액티브 스킬로 변환되었다.

“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못마땅한 얼굴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더가 끼어들었다.

그래, 용케 오래 참고 있다 했다.

“은둔자의 정원에서 내 눈이 금색으로 변했던 것 기억하지?”

난 실새삼이 내 눈을 만물을 보는 눈이라 일컬음과 동시에 이를 세계수의 능력이라고 그가 확신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가 어째서인지 이 힘을 내게 해롭다 여겨 자신의 시야를 포기하면서까지 봉인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여기 있던 그 누구도 내 금색 눈이 갖는 힘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실새삼만이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실새삼의 견해가 주가 되다 보니 한편으론 그가 세계수를 해로운 존재라 돌려 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게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로 세계수에 대한 신뢰를 조금 잃었겠지만 여전히 드라이어드들에게 세계수는 위대한 존재였다.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은 그 힘이 내 주인, 제이에게 해로운 것이라 확신하는가?”

그런데 메스키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실새삼의 판단을 재확인했다.

만약 실새삼이 그렇다고 하면 곧바로 세계수를 적으로 돌려 버릴 수 있는 강단이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왜 전지전능한 존재가 한 인간에게 과할 정도로 축복을 쏟아붓고 있겠는가? 정말 바라는 것 없이 무조건적으로 그녀에게 베풀고 있다고 보는가? 세계수의 정확한 목적은 모르지만 경계해야 된다고 보는 중이다.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고 오랜 시간을 안고 다녔다간 결국 걷는 법도 잊어버리게 되는 격이지.”

실새삼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세계수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얻은 세계수의 힘은 좀 치트 키에 가까울 정도로 사기적이긴 했다.

아직까지 그 쓸모를 다 모르는 만물을 보는 눈은 물론, 불구가 될 뻔한 팔을 일주일 만에 되돌려 놓을 정도로 강한 회복력이 깃든 신체까지.

난 이것이 내 막대한 다이아와 세계수의 힘을 등가 교환한다고 어림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 혼자 드루이드 수천 명분의 다이아를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는 격이니 세계수 입장에선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귀히 여기며 상생하려 들 거라 보는 입장이었다.

혹시 실새삼은 내 무한 다이아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생각을 바꾸지 않을까?

세계수가 내게 해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드라이어드들은 극도로 경계하는 표정이 되었다.

“제이는 세계수 대리인의 길을 걷는 순례자라서 그런 거 아냐?”

엘더의 말에 실새삼은 짐짓 어린아이를 보듯 그를 업신여기는 목소리로 답했다.

“세상에 순례자를 자처하고 나온 이가 어디 한둘이었겠느냐. 그리고 그들이 모두 나의 드루이드와 같은 축복을 받았느냐면 그건 또 아니지. 그 덜 자란 머리론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나 본데.”

한참 어린 묘목의 모습으로 되레 덜 자랐다고 비방하니, 실새삼을 바라보는 엘더의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그래, 드라이어드들이 주인 되는 드루이드에게 느끼는 감정과 태도가 어떻지? 소중하다 여기고 항상 보호하고 싶지 않더냐? 모든 능력을 쏟아부어서라도 내 드루이드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지. 이건 드루이드가 우리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작은 세계수임과 동시에 영혼이 이어진 생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 말에 공감을 표하며 바곳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루이드는 드라이어드에게, 드라이어드는 드루이드에게, 서로가 안정과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 관계라는 것이지. 그런데 세계수와 제이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보이니 문제란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고받는 관계가 아닌 한쪽에 과하게 치우쳐진 관계. 그렇다면 양쪽의 저울을 맞추기 위해 제이가 대체 무엇을 세계수에게 주어야 하는가, 이것을 답할 수 있겠느냐?”

나도 모르게 다이아라고 외칠 뻔했다.

하지만 분위기상 실새삼이 생각하는 답은 다이아처럼 단순한 답이 아닌 듯했다.

난 무의식의 공간, 그가 표현하길 생사의 갈림길에서 정신만으로 실새삼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실새삼은 세계수가 내게 기생하고 있다는 표현을 쓸 만큼, 나도 모르는 나와 세계수의 긴밀한 연결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나 역시 실새삼이 툭툭 던진 단서들을 주워 담다 세계수와 나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세계수의 가지와 연계하여 쓰는 능력들이 묘하게 드라이어드와 쓰는 그래프트와 닮아 있다는 것이었지.

“세계수는 세계를 수호하는 신, 그런 신이 한낱 인간의 경애를 받자고 무한한 사랑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세계수는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 존재가 존재인 만큼 원하는 것의 스케일도 아주 클 것이다.

단순히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아 필드의 규율을 바로잡는 순례자의 의무뿐만 아니라….

신의 힘을 빌려야만 내가 닿을 수 있는 어떠한 궁극적인 목표.

“실새삼의 말을 듣다 보니… 꼭 세계수가 내 드라이어드 행세라도 한다는 것처럼 들리네.”

조금은 가벼운 농담이 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말 거라.”

하지만 실새삼에게서 곧바로 벼린 칼날 같은 꾸짖음이 쏘아져 나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메스키트가 무언가 깨달은 듯 크게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안 돼요, 제이. 다시는 그런 소릴 하지 마세요.”

그 바람에 우리의 분위기는 극저온의 심해 속에 빠진 것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

암담한 고요 속에서 난 내가 한 말실수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맹렬히 굴려야만 했다.

내가 한 말이 세계수를 모독해서? 아니, 그런 방향이 아니었다.

그들의 걱정은 세계수가 아닌 날 향해 있었다.

둘이 정색한 이유는 그보다 좀 더 근원적인…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관계에 있는 듯했다.

…드루이드가 죽으면 드라이어드는 죽는다.

만약 세계수가 정말 내 드라이어드처럼 구는 거라면 이 명제가 성립해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세계수가 내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 그것을 파헤치려다 차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심연을 건들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내가 선택한 거야….”

오래 지속될 것만 같았던 침전된 분위기는 의외로 갑작스레 낮게 속삭이는 마거리트의 혼잣말 때문에 깨졌다.

“난 내가 선택해서 제이에게 온 거야. 세계수가 목적을 가지고 날 보낸 게 아니야. 난 아무런 의도 없어. 난 그저 내 진리를 곁에서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야. 정말이야. 난 세계수가 보낸 꽃이 아니야….”

마거리트는 다짜고짜 항변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곤 서럽게 울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내 드라이어드들 중 마거리트는 태생이 가장 기이한 꽃이었다.

바곳의 경우도 세계수가 내 꿈속에서 직접 설익은 열매를 내려 준 케이스다 보니 기이하다 볼 수 있겠지만, 야생의 꽃을 내가 거둬 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거리트는 세계수의 가지에서 결실 시기를 떠나 외따로 맺힌 열매에서 태어났다.

더불어 다른 드라이어드였다면 불가할 일을 벌였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를 주인으로 점지한 것이었다.

마거리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예상이 갔다.

그러잖아도 이 자리에서 논하는 세계수의 향방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그 누가 봐도 세계수의 개입이 직관적으로 보이는 결과물인 마거리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만 것이다.

그녀가 죄를 지어 벌 받기 직전인 사람처럼 엉엉 울어 대는 통에 결국 우리의 논의는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모두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다들 저마다의 해석으로 머릿속에, 가슴속에 의문의 씨앗을 심은 채로 간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곤… 앞으로 세계수를 의심하겠지.

이게 정말 옳은 방향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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