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생각해 보니 시들링의 손에 붕대가 매어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난 그걸 보고 단순히 동굴에서 얻어 온 상처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몰랐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드는 미안한 마음에 그를 향해 퉁명스레 굴었던 것이 후회됐다.
“그런데 웃긴 건 언니 팔 낫는 상처보다 그 사람 손가락 상처 낫는 게 더 오래 걸린다? 언니 대체 회복력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언니처럼 유니크 등급 회복형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어?”
“그런 게 있어. 어쨌든 나가면 사과해야겠네.”
“언니, 그렇게 끝날 게 아니잖아. 시들링이 언니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니까?”
“걔가 나한테 잘해 주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난 지금의 시들링이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얼마나 나아졌는지 로웰라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가 회양목 드라이어드에게 아기 때부터 길러진 일은 로웰라도 들어 알고 있으니, 그를 감싸는 드라이어드들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버린 사회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을 드라이어드처럼 대하다니.”
“첫인상이 완전 구리긴 했지. 나한테 말도 꺼내지 말라 했었거든. 음… 지금 보면 정말 시들링은 많이 나아졌어.”
나름대로 길드도 들고 번듯하게 잘 생활… 하고 있는 것 맞겠지?
내 말을 듣던 로웰라가 팔짱을 낀 채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냐, 언니. 그래도 달라. 난 언니도 눈치챘을 줄 알았어. 하루 종일 언니만 쳐다보고 있는데, 이건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답게 대하며 대화해 준 사람에 대한 친근함이라기보단… 완전 맹목적인 무언가가 있다니까?”
“에이, 걔는 보통 사람들이랑 사고방식이 조금 다르다니까? 그저… 나랑 같이 다니고 싶어서 내 심기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그러니까 왜 언니랑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데?”
“너랑 같은 이유지, 뭐.”
“아냐! 아, 언니!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니잖아? 난 언니랑 같이 다니는 게 좋은 이유가 언니를 롤 모델로 삼아 곁에서 배우고 싶고 나보다 훨씬 훌륭한 드루이드들이 다니는 여행은 어떤지 궁금해서야. 그리고 함께 가면 더욱 위험한 뒤 번대 테라리움까지 내려가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그냥 언니 자체가 좋아서 붙어 있는 거라니까? 난 아마 이리스 언니가 자신들과 함께하자고 하면… 같이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리스 파티는 고렙 파티인데다 사람 수도 많으니 안정적인 여행을 위해서라면 그쪽이 낫기도 하겠지.
“흠…. 그래서 나에게 이상형을 이것저것 물어봤던 거야? 내가 시들링을 어떻게 생각하나?”
난 또 로웰라가 시들링을 좋아하는 줄 알았지.
둘이 연애하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아서 어떻게 조언을 해 줘야 할지 걱정했는데.
“시들링이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고…. 곁에서 계속 지켜보니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서 둘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엄마가 잘해 주는 남자 만나랬거든. 그런데 언니 이상형이….”
“시들링과는 거리가 멀지?”
“아냐, 따지고 보면 그렇게 멀지도 않아. 그 엘더 플라워 급의 화려한 외모는 아니더라도… 다른 건 다 괜찮지 않아?”
로웰라… 여행이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이상한 데다 재미를 들려 버렸네.
가끔 주위에 다른 사람들을 엮어 주며 재미를 찾는 부류가 있었다.
“어휴, 됐어. 어쨌든 시들링과는 그런 관계 아니야. 걔는 나 말고도 걔를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똑같이 행동할 거야.”
그리고 이 말이 도화선이 되어 버렸는지, 로웰라 안에 있던 무언가를 자극해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눈에 얼핏 불꽃 같은 것이 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보인 듯했다.
“두고 봐, 언니. 내가 증명해 보이겠어.”
“뭘 증명까지야. 괜한 일 하지 마.”
이때 확실히 로웰라를 말렸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로웰라는 심호흡을 하더니 무언가를 개시하기 시작했다.
“저기, 손은 좀 어떠세요?”
비장한 표정으로 시들링에게 다가간 로웰라가 사근사근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평소의 말투보다 몇 배나 친절한 말투였다.
시들링은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오히려 주변 그의 드라이어드들이 더욱 난리였다.
병실 침대에 걸쳐 앉자 메스키트가 다가와 수건으로 내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짧게 잘린 내 머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묘해서 일부러 모른 척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시들링네 드라이어드들에게 밉보인 건 아닌가 몰라. 제 주인 손을 그렇게 깨물었다는데. 내가 환자가 아니었다면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저 역시 가만있지는 않았겠죠. 안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요.”
“일부러 말 안 해 줬구나. 난 전혀 기억이 안 나.”
“기억해 봤자 좋은 일도 아닌걸요. 차라리 영영 몰랐어도 괜찮은데 말이죠.”
“그렇게 민폐를 끼쳤는데 확실히 사과해야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제이는 무척 힘들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알고 있답니다.”
메스키트의 다정한 목소리가 내 심려를 달래기 위해 명향했다.
말이 나온 김에 시들링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그가 있는 곳을 바라봤는데, 로웰라가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보여 멈칫했다.
“검은 언제부터 쓴 거예요? 체력 단련은 어떻게 하세요? 우와, 나도 저렇게 큰 검을 휘두르고 싶다.”
원래 성격이 활발하고 명랑한 아이다 보니 저리 수다를 떠는 게 이상한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과하게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되는 대로 말을 막 꺼내는 느낌?
그런데 웃기게도 대화의 방향이 일방적이었다.
로웰라의 질문은 분명 시들링을 향했지만 주변의 드라이어드들이 신나서 대신 답을 해 주고 있었다.
시들링은 도통 그녀의 페이스를 맞추기 힘든지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하… 나 말고도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생기면 시들링이 그 사람을 똑같이 대할 거란 내 말에 반박해 보이겠다는 거였구나.
그때 별안간 시들링과 눈이 마주쳤다.
“날 불렀나?”
그의 이름은 아직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다.
부르기 전에 로웰라의 행동이 웃겨서 말하다 말고 멈췄으니까.
오히려 줄기차게 그를 불러 대는 것은 로웰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들링은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뒤로 로웰라가 기가 차단 눈을 하다, 거봐라는 식으로 콧대를 세웠다.
“나 참…. 시들링, 이야기 들었어. 저기… 내가 정신없는 와중에 너 손을 물어뜯었다고 들었는데….”
붕대가 감긴 손은 오른손이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쓰렸다.
어휴… 짐승도 아니고, 물어뜯긴 왜 물어뜯어.
내가 알기론 시들링은 오른손잡이였다.
더구나 그는 검을 무기로 쓰는 자였다.
손에 부상을 입었으니 검을 쓰기도 힘들 터, 그런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하고 제 손을 내 입에 재갈로 물리다니.
내 시선을 따라 자신의 손을 바라본 시들링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없다.”
“아니. 상관없지는 않지. 많이 아팠을 텐데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물론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네 손을 쓰진 마.”
“아프지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그때 살이 다 파여서 피가 얼마나…. 읍!”
오히려 분기탱천하여 새된 소리를 내는 것은 그의 드라이어드인 칼미아였다.
로웰라가 잽싸게 그녀의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질린 얼굴을 했다.
“진짜 과보호가 심하다고 듣긴 했지만 심하긴 심해. 저기요. 저 10분 내내 시들링한테 말 걸었는데 답변은 그쪽이 다 했거든요?”
하지만 로웰라가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기긴 역부족이었다.
이에 질세라 로웰라의 드라이어드인 레몬밤이 황급히 그녀에게 가세했다.
“아니, 할 말은 해야! 이것 좀….”
소란스럽다는 것은 좋았다.
지난 병실의 분위기는 내 부상으로 인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난 그것도 모르고 네게 퉁명스레 굴었던 것도 미안해. 팔이 다 나으면 너에게 사과와 답례의 의미로 뭔가를 해 주고 싶은데.”
“입 안은 괜찮나?”
“신경 쓰이긴 해도 아프진 않아. 이미 시간도 많이 흘렀고. 아니 그것보다 뭔가 바라는 건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난 다이아가 많으니까 원하는 건 다 사줄 수 있는데.”
“바라는 게 없는 눈치인데 굳이 그럴 필요 있어?”
이번엔 내 드라이어드가 난리였다.
엘더가 새초롬하게 내 옆자리를 파고들며 시들링을 쏘아봤다.
아니, 날 도와준 애한테 다이아를 쓴다는 것도 그렇게 아깝니?
“언니! 이 테라리움에 페이크 로열이 운영하는 공연장이 있는데 엄청 재밌대. 같이 가면 되겠다!”
난데없이 로웰라가 끼어들었다.
“티켓 가격이 엄청 비싸서 아무나 못 간다는데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
“공연? 무슨 공연을 하는데?”
“연극도 하고 마술도 하고 서커스도 하고. 날마다 바뀐다고 했어.”
“글쎄…. 겨우 그걸로 답례를 하기엔….”
“그걸로 하겠다.”
그런데 시들링은 로웰라의 말에 고민도 없이 대뜸 답을 했다.
“응? 그걸로 되겠어? 모처럼 얻은 백지 수표의 기회를 겨우 공연에 쓰다니. 그런데 꼭 나도 같이 가야 해?”
“힘든 일을 겪었으니까 공연 보면서 기분 전환하면 언니도 좋으니까 둘이 갔다 와.”
“그럼 로웰라, 너도 갈래?”
“나 바쁜 일 있어.”
“바쁜 일? 그럼 이리스나….”
“이리스 언니도 바쁘고 제퍼도 바쁘고 다 바쁠 거야.”
이게 어디서 수작을…. ‘바쁠 거야.’라니.
로웰라가 굴리는 잔머리가 훤히 보여 실소가 나왔다.
증명해 보이겠다더니, 이건 누가 봐도 둘이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는 것처럼 등 떠미는 것이 분명하잖아?
“네가 가지 않겠다면 나도 가지 않겠다.”
그리고 시들링의 말이 쐐기가 되어 로웰라의 망상에 제대로 박혀 버렸다.
이걸 어떻게 할까? 로웰라의 계획에 어울려 줘야 할까?
“뭐, 그래.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잠깐 휴식을 즐기는 것도 괜찮겠지.”
내 말에 로웰라가 실실 웃으며 시들링을 바라보았다.
저 나이 때는… 저런 게 재밌을 나이니까.
계획에 조금 어울려 준다고 시들링과 나 사이에 관계 변화가 생길 리는 없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똑똑.
우리의 대화는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끝났다.
“제이 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자신을 글로리아의 하인이라 소개한 자가 그녀의 말을 내게 전했다.
“의사의 진단을 전해 들은 글로리아 님께서 이젠 충분히 안정을 취하신 것 같아 의뢰의 보상을 전달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녁때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멀리 나오실 필요 없이 병실 바로 옆방을 꾸밀 예정이니 기다리고 계시면 된다고 하십니다.”
내가 동굴 안에서 찾은 그녀의 노예 문서는 잘 전달됐구나.
의뢰의 보상이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관한 정보겠지?
그녀는 정보를 잘 얻었을까?
하인을 통해 그러겠노라 답을 하고 돌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