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팔을 살피던 의사의 표정이 기묘했다.
“엄청난 회복력이군요…. 환자분께선 적어도 한 달은 넘게 요양하셔야 할 수준이었는데.”
현재 내 팔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히 타박상만 입은 것처럼 멀쩡했다. 깁스를 하고 있긴 해도 팔이 무겁고 감각이 둔해 운신이 조금 불편한 정도였다.
하기야 보자마자 내 팔은 완전히 박살 났다고 진단했는데 일주일 만에 멀쩡해진 것을 보면 신기함을 넘어 괴상할 정도였을 거다.
초반엔 정신을 잃었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양팔의 고통이 엄청나 자꾸만 깨어났다.
가물거리던 시야로 여러 번 장소와 날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이 바뀌었던 기억이 남았다.
체면을 잊고 제발 살려 달라고 울부짖거나 어린아이처럼 엄마 아빠를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남겨진 이들이 얼마나 날 걱정했는지 알면서도 차라리 모든 고통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잃길 바라기도 했다.
그것이 설혹 한 달이 된다 하더라도.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순간을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그 순간을 고를 것이다.
내 영혼에 워낙 유능한 힐러가 붙어 있다 보니 진통제도 잘 듣지 않아 결국 의료 목적으로 통증을 경감시켜 주거나 수면 유도 효과가 있는 드라이어드들이 잔뜩 내게 달라붙어야 했다.
하루 꼬박 겨우 깊은 잠에 들고 난 후에는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이 많이 잦아들었었다.
“어쨌든 이런 회복 경과로 본다면 곧 깁스를 풀어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의사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내 팔을 보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병실을 나갔다.
그는 무려 20번대 테라리움에서 출장 온 의사였다.
44번째 테라리움엔 내 상태를 돌볼 수 있는 의료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게 내가 동굴을 빠져나와 병실로 옮겨진 후 이틀 정도를 내내 고통에 시달리며 울부짖었던 이유였다.
길드원들이 밤새 마차를 몰아 의료진들과 드라이어드들을 데려와 주었고 그제야 줄줄 흘렸던 눈물을 멈출 수 있었다.
고맙게도 주변인들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던 꼴사나운 내 모습을 본 적 없었던 것처럼 대해 주었다.
침대 지박령이 된 것처럼 일주일을 꼬박 침대에 붙어살다가 드디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변신 로봇의 팔처럼 두꺼운 깁스를 양팔에 단 상태였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욕실로 향하는 내 뒤로 로웰라가 따라붙었다.
“언니, 내가 도와줄게.”
“그래 주면 고맙지. 아, 드라이어드들은 됐어.”
내 말에 어미 오리를 쫓는 새끼 오리처럼 졸졸 날 따라오던 드라이어드들이 당황한 얼굴로 욕실 문 앞에 멈춰 섰다.
전투를 치르러 가는 것도 아닌데 드라이어드들을 죄다 끌고 욕실로 갈 순 없지.
인간과는 다르다고 해도 남성형인 드라이어드들도 신경 쓰이고.
평소라면 그냥 밖에서 대기했을 텐데 내 팔의 상태가 썩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입원하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고통과 더불어 흙바닥을 구른 몸을 제대로 씻지 못했던 것이었다.
위생 때문에 도움을 받아 물수건으로 닦긴 했으나 그 찝찝함은 여전했다.
내 세계에 있을 때만 해도 난 하루에 두 번은 꼬박꼬박 샤워했었다.
일어나서 한 번, 외출 후 집에 돌아와서 한 번.
“언니, 부끄러우면 말해. 눈 가리고 있을게.”
“괜찮아. 계속 눈을 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학생 때만 해도 찜질방을 자주 드나들어 봤으니 상관없었다.
로웰라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을 수 있었다. 겨우 물만 끼얹은 수준에 그쳤지만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향료를 푼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앉으니 살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샤워 타월에 거품을 내서 벅벅 문지르고 싶었지만, 양팔에 엄청난 무게 추를 달고 있는 데다 이것까지 로웰라에게 부탁하기엔 너무 민망했다.
고맙게도 손수 내 머리를 감겨 주던 로웰라는 엉망으로 잘려 나간 내 머리카락을 보고 안타까워하더니 가위를 가져왔다. 그러곤 자기가 다듬어 주겠다길래 욕조에 등을 기댄 채 머리를 맡겼다.
누군가 머리를 만지고 있으니 묘하게 진정되고 편안한 기분이 든다.
“이젠 머리 못 묶겠다….”
로웰라는 마치 자신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간 것처럼 마음을 쓰고 있었다.
본래 내 머리카락은 풀면 가슴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을 유인할 먹이로 삼기 위해 기와 조각으로 대충 손에 잡힌 머리를 끊어 냈더니 어느새 등에 닿는 것이 없어 허전해질 정도였다.
거칠게 끊어 낸 탓에 끝도 많이 상했고 길이도 중구난방이라 로웰라의 말처럼 예전처럼 머리를 틀어 묶을 순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언제부터, 왜 머리를 길렀더라? 확실한 건 머리를 말리는 시간 때문에 번번이 아침 시간이 부족한 바람에 다 잘라 버리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는 점이다.
여태 길러 온 것이 아깝다기보단… 어느 정도 길이가 되어야 머리를 둘둘 감아 묶는 똥 머리가 가능해 편히 지낼 수 있었던 이유가 컸다.
“언니 머리 묶은 거 예뻤는데…. 아, 물론 지금은 안 예쁘다는 건 아냐. 그냥 좋았다구….”
로웰라는 정말로 아쉬워하는 목소리였다.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가 어깨 바로 위 높이에서 들려왔다.
중구난방인 길이를 맞추기 위해 잘라 내다 보니 거기까지 왔단 말이야?
다시금 그날의 급박했던 상황이 상기되었다.
인삼들의 군락지에서 돌아왔을 때의 난… 대체 얼마나 거지꼴이었을까?
“다 됐다! 나 친구들 머리도 여러 번 다듬어 준 적 있어서 믿어도 좋아! 거울 보여 줄까?”
로웰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거울을 들고 왔다.
길었던 머리가 뭉텅 잘려 나가 있었다.
어깨를 살짝 덮을 정도의 길이는 교복을 입고 다녔을 때 이후로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와… 엄청 짧아졌네.”
내 말에 로웰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묶고자 하면 묶을 수 있겠으나 조금이라도 묶는 높이가 올라가면 밑의 머리가 끈을 벗어나 전부 튀어나올 길이.
“로웰라, 솜씨 좋네. 다듬어줘서 고마워. 짧아져서 어색하긴 한데 머리 말리긴 편하겠다.”
거울 보기를 멈추고 욕조에 등을 기대니 로웰라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다 이내 거울을 제 자리에 가져다 두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촤악.
로웰라는 욕실 바닥을 난잡하게 만든 머리카락을 치우기 위해 물을 뿌렸다.
물에 맞은 까만 머리카락 더미들이 경사를 따라 흘러 낮은 곳으로 몰리는 것이 보였다.
여러 번 물을 뿌려 대충 바닥 청소를 끝낸 로웰라는 낮은 의자를 끌어와 내 욕조 옆에 두고 앉았다.
이젠 밖에서 기다려도 될 텐데,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는 걸까?
“언니, 있잖아.”
무슨 말을 꺼내려나.
동굴에서의 일을 묻는 걸까?
“그날의 일은 나중에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말….”
“언니는 이상형이 뭐야?”
“응?”
“응?”
나와 로웰라의 의문을 담은 눈이 서로 마주했다.
“갑자기 이상형?”
“뭘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말한다는 거야? 아, 동굴 안에서 언니 홀로 떨어져서 있었던 일 말이지?”
어리둥절하던 로웰라는 금방 알겠다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이참… 사실 그날의 일은…. 쓰러진 언니의 몰골을 보고 다들 충격을 받아서 언니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다들 먼저 묻지 않기로 했어. 아주 혹독하게 힘든 일을 치르다 온 것이 분명하게 보였거든…. 언니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언니 팔…. 너무 상태가 심각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영영 잘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했으니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어. 그래서 일부러 다른 이야기 좀 해 보려고 했던 건데.”
엘더와 그래프트를 펼쳐 해일을 막아 낸 내가 한 달간 쓰러진 일이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쓰러진 나 때문에 길드원들은 내 드라이어드들만큼이나 크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드루이드라고 할지라도 어쩌면 평생에 한두 번 겪기도 힘든, 생명이 위중한 부상을 난 연달아 입었으니.
모종의 힘을 통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몸이 멀쩡할지언정 정신마저 멀쩡한 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이를테면 충격의 누적이겠지.
그들은 그날의 경험으로 인해 내가 트라우마를 갖게 될까 봐 걱정했다.
사실 난 그런 걱정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다들 정이 많고 친절한 사람들이니까.
로웰라의 예상은 아주 조금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운신이 가능해졌을 때 당장 길드원들과 내 드라이어드들에게 그날의 일을 설명해 줄 수 있었지만… 난 그 시간을 샤워를 핑계로 조금 유보하고 있었다.
그날 인삼 드라이어드들과 있었던 일은 많이 힘들긴 했고 분명 평생을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아 떠올릴 때마다 아릿한 고통을 줄 테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은 괜찮다는 것이다.
날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괴롭히던 팔의 통증이 오히려 기폭제가 되어 한순간에 고달픔을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가 전부 승화시켜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금은 치닫던 감정이 모두 리셋되어 평온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난 괜찮지만 다른 이들에게 내가 괜찮음을 확인시켜 줄 일은 꽤 힘들 것만 같았다.
함께해 온 시간이 묶은 우리들의 유대감은 타인을 자신처럼 진정으로 걱정하고 공감해 줄 만큼 끈끈해져 버렸으니까.
어쩌면 내가 자신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괜찮은 척한다고 생각할까 봐, 조용한 공간에서 몸을 데우며 생각이라도 정리해 볼 심산이었다.
“내가 동굴 안에서 얼마나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 이걸 어떻게 비밀로 할 수 있겠어. 나중에 다들 모이면 이야기해 줄게. 완전 동화… 그 자체였지.”
정말로 어떤 동화 속 이야기를 유사하게 경험하고 왔지.
“괜찮아 보여서 정말 다행이야.”
로웰라는 진심으로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어쩐지 마음속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다.
많은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날 걱정하고 위해 주니 마음까지 따뜻한 욕조 물에 데워진 것처럼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이상형 이야기야? 갑자기 이상형은 왜?”
“음…. 그냥 궁금해서.”
무언가 속셈이 있는 눈치가 분명해 보이는데.
로웰라는 우리 길드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다른 이들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아마 이리스와 제퍼는 나와 비슷한 또래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넷 다 고향 친구라고 밝힌 적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헤르마와 노토스는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나눌 법한 대화 주제에 어쩐지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수능 공부로 바쁜 와중에도 다들 대학에 입학하면 펼쳐질 어른들의 세계를 꿈꾸며 수다를 떨어 댔었는데.
“이상형이라… 뭐 단순하고 직관적이지. 난 얼굴을 많이 봐.”
내가 끔찍한 기억이라도 떠올릴까 봐 애써 화제를 돌리려고 노력한 로웰라가 기특해 어울려 주기로 했다.
욕조 물에 푼 은은한 꽃향기의 향료가 기분을 느긋하게 만들어 주었다.
“얼굴?”
내 직관적인 대답에 놀란 것인지 로웰라의 목소리의 끝이 조금 갈라졌다.
“응. 잘생겨야지. 그런데 그냥 잘생긴 것보다 좀 화사하고 화려한 얼굴이 취향이야.”
화가 나도 얼굴만 보고 사르르 풀릴 그런 외모!
필라와 루프 그리고 이리스와 제퍼를 이어 이젠 로웰라까지.
동네방네 내 단순한 이상형이 소문날 판이었다.
이젠 굳이 누가 안 물어봐도 사람들이 나만 보면 ‘저 사람 남자 얼굴을 그렇게 밝힌다던데.’라고 속닥거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난 당당하다.
우리 엄마는 자신도 아빠가 잘생겨서 결혼했으니 너도 그러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지지를 했다.
문득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 부모님이 심하게 부부 싸움을 하지 않는 이유엔… 아빠의 외모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화려한… 하긴 잘생겼다는 기준은 다들 다르니까. 그런데 화려한 얼굴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어. 예를 들자면?”
답은 쉬웠다.
“엘더.”
내 말에 로웰라는 단번에 수긍하는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