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거 진짜 못 깨겠다. 사람이 깨라고 만든 게임 맞아?”
“뭔데요? 아, 혜리 누나도 그거 해요? 와… 요즘 내 주변 사람 다 그 게임 하네. 유행인가?”
“순위권에 드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클리어라도 해 봤으면. 개발자들은 지들이 플레이는 해 보고 내나 몰라.”
공과 대학 건물의 복도 끝, 화장실과 가까운 학회실에선 볼륨을 한껏 키운 모바일 게임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공강인 학생들이 모여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이었다.
게임 소리가 시끄러울 법도 한데 불평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루한 시간을 달래 주는, 한 번쯤 들어 본 익숙한 게임 소리.
저마다 플레이 타임은 달라도 같은 아이콘의 게임이 대기 화면에 깔려 있었다.
한창 게임을 조작하는 사람이 깨고 있는 스테이지는 다들 욕하면서 거쳐 가 본, 혹은 그 스테이지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사람도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고 익히 들어 온 곳이었다.
소음을 내버려 두는 이유는 같은 게임을 하는 이에게 느끼는 동질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동변상련 때문인 것도 있었다.
그녀가 깨지 못하고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이미 깬 사람은 자부심을 느꼈고 깨지 못한 사람은 미약하게나마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
그리고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기분파인 그녀가 클리어 후에 기쁜 마음으로 뿌릴 간식과 음료수를 기대했다.
“제희 누나한테 깨 달라고 하세요. 저번에 조교님 것도 제희 누나가 깨 줬다던데.”
“아, 그거 들었어. 그래서 질문 면제권 받았다며.”
한창 메신저에 열중하던 이가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말을 보탰다.
“제희도 이거 해? 걘 폰 게임보단 PC 게임파 아니야?”
“제희 누나 폰 화면 본 적 없죠? 우리 학과에서 폰 게임 제일 많이 깔린 사람이 제희 누나일 걸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화제의 주인공인 사람이 마침 학회실을 찾았다.
“어? 혜리 있었네. 너 공학 수학 2분반이지? 나 책 좀 빌려줘. 너 강의 들어가기 전에 가져다줄게. 과제 한다고 집에 두고 왔나 봐.”
“오, 꽁제! 그럼 책 빌려줄 테니 이것 좀 깨 줘!”
“뭔데?”
폰을 받아 든 제희는 익숙한 게임 화면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너도 이거 해? 그냥 깨 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응, 랭킹에 드는 건 필요 없고 일단 깨기만 해 줘. 나 똥손이라 도저히 못 넘어가겠어. 과금하면 된다는데 난 게임에 돈 안 쓰잖아.”
“그냥 월정액 얼마 안 하는데 그거 질러서 첫 충전 상품으로 주는 아이템 끼기만 해도 깨긴 깰 텐데.”
제희가 폰을 넘겨받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슬쩍 시선을 던졌다.
학과 축제 때 열린 게임 대회에서 우승한 그녀의 이야기는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군대 간 학번들이 종종 건 전화에서도 이름이 자주 언급이 됐고, 술자리가 파하고 2차로 피시방을 갈 때도 누구나 1순위로 찾는 존재가 공제희였다.
게임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죄다 섭렵했으며, 피시방 점유율과 모바일 마켓 순위에서 상위권에 알박기한 국민 게임은 두루두루 손대 본 그녀는 하루에 한 번 이상씩은 화두에 오르는 게임 이야기 속에서 단연 인기 스타였다.
졸업하면 프로 게이머로 데뷔한다는 둥, 분명 이름을 숨기고 방송하는 종합 게임 스트리머일 거라는 둥 제희를 향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제희 본인은 그런 소문에서 초연했다.
제희는 게임을 프로급으로 잘한다기보단 그저 잔머리가 빚어낸 센스가 좋은 편이었다.
그녀가 굳이 학과에서 도는 소문을 정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뒷배경이 학과 내에서 나눠진 어느 집단에서나 무리 없이 어울리는 데 유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희는 의외의 곳에서 게임을 빌미로 과제나 족보, 과외 자리 소개 등의 호의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제희가 몇 번의 터치로 혜리가 애먹던 스테이지에 진입하자 다들 기대하기 시작했다.
‘게임을 진짜 잘한다던데 어떤 플레이를 보여 줄까? 손가락이 막 날아다니나?’
게임을 못하는 사람의 플레이를 볼 땐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허당기로 인해 지어지는 웃음과 고구마 같은 답답함 속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달콤함을 기대하지만, 게임을 잘하는 사람의 플레이를 본다는 건 기대치를 충족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기대한다.
평범한 사람들 손에선 빚어낼 수 없는 고도의 컨트롤과 비상한 머리가 자아내는 이해 능력,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공략법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학과실에 있는 이들은 제희가 그런 플레이를 보여 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제희는 평범하게 화면을 터치하며 게임을 플레이하다 돌연 일시 정지를 눌렀다.
“어? 왜 잘하다 멈춰?”
“곧 죽을 것 같아서 잠깐 멈춰 놓고 공략 좀 보려고. 아, 다음 공격이 저 방향에서 오네.”
제희는 게임 화면과 멀티로 띄운 인터넷 창을 돌아가며 살피다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그러다 위기가 닥치면 일시 정지를 누르고 돌파구를 찾았다.
“손가락이 꼬여서 위험할 뻔했네.”
“아, 남은 시간이 애매하네. 미리 다음 구간 예상 좀 해 두고….”
“원트에 깨려다 보니 이해 좀 해 줘. 죽으면 코인 날리는데 너도 그건 싫잖아?”
“나도 잘하는 게임이 아니라 손에 익지가 않아. 이거 바로 다음 페이즈가 좀 어려우니까 좀 쉬고….”
여러 번의 일시 정지 끝에 제희는 혜리가 애먹던 게임을 결국 한 번의 트라이로 클리어해 냈다.
“와, 일시 정지 계속 누르면서도 깨긴 깨네요? 저라면 흐름 끊겨서 못할 것 같은데.”
“혜리 폰이 성능이 좋아서 할 만했어. 어떨 땐 일시 정지 후에 재개하면 싱크가 안 맞아서 망할 때도 있거든. 그리고 일시 정지도 써먹으라고 만든 기능인데 써먹을 수 있으면 써먹어야지.”
제희는 보상은 직접 고르라며 화면을 일시 정지 해 둔 채로 혜리에게 폰을 넘겼다.
“어떻게 한 거야? 나도 알려 줘.”
여태 애먹던 스테이지를 단번에 깬 것이 신기한지 혜리가 보상을 신중하게 골라서 수령 후 다시 깼던 스테이지로 들어가 제희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그냥 편법 같은 거야. 봐 봐. 어떤 게임은 일시 정지하면 화면이 아예 까맣게 되는데 이 게임은 이렇게 일시 정지 창만 뜨잖아? 그럼 대비를 할 수 있거든.”
제희는 혜리가 플레이하는 화면을 바라보다 특정 구간에서 일시 정지를 눌렀다.
“여기 보면 피할 수 있는 구간이 여기 좁은 구간 하나뿐인데, 너 그대로 진행했으면 죽었잖아? 그니까 재시작 버튼 누르자마자 방향키 연타해.”
잠깐의 일시 정지는 유일한 안전 길을 찾았고.
“방금 또 죽을 뻔했네, 그렇지? 그런데 체력 바가 한 번에 훅 지워지는 게 아니라 살짝 딜레이를 두고 떨어지거든? 그러니까 재시작하면 바로 포션 키 연타하거나 힐링 스킬 연타하면 운 좋으면 살 거야.”
또한 죽기 직전의 순간을 넘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여기 좀 헷갈리는데. 하다가 다음 패턴이 기억 안 나잖아? 그럼 일단 일시 정지 해 놓고 찾아봐. 이거 아마 빨간 원으로 가면 곧바로 낙사해서 죽는 패턴이었던 것 같은데, 죽어서 다시 여기까지 오느니 그냥 정지시켜 놓고 찾는 게 나을 거야.”
일시 정지는 단순히 시스템적인 기능을 넘어서 제희의 손에서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는 기능으로 재탄생되었다.
혜리는 제희의 가르침 속에서 몇 번의 시도만에 제 손으로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게 되었다.
“오, 대박. 진짜 네 말대로 하니까 깼어.”
“컨트롤 손에 안 익으면 그냥 그렇게 편법 써서 깨면 돼. 물론 랭킹에 들려면 연습해야겠지만.”
“땡큐땡큐! 저기 사물함에 책 있어. 기분이다, 내가 오늘 음료수 쏜다!”
혜리의 말에 학회실에 있는 모두가 건물 1층의 자판기에서 파는 음료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그러면서 다들 생각했다.
제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편법이라곤 했지만 다들 일시 정지 기능을 게임에 써먹는 방법을 떠올린 건 아니었다.
비록 손가락이 춤을 추는 화려한 플레이는 보지 못했지만, 잔머리가 빚어낸 독특한 공략법은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이런 식으로 플레이해 본 게 한두 번이 아닌가 봐요?”
“뭐, 대부분 세이브 포인트가 있어서 한 번 죽는다고 영영 게임이 끝나는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안 죽고 플레이할 수 있으면 더 좋잖아? 그리고 많은 시간 투자해서 반복하기 싫을 땐 종종 쓰긴 해. 물론 되는 게임이 있고 안 되는 게임이 있긴 하지만.”
제희는 그렇게 말하며 생각보다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할 때 일시 정지 기능에 꽤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문득 현실에도 게임처럼 일시 정지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움직일 수 있거나 하다못해 사고할 수 있는 상태에서 시간이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고민만 하다 시간이 허비되는 일을 줄일 수 있을 텐데.’
그때 학회실이 문이 별안간 벌컥 열리며 한껏 짜증이 난 얼굴의 남자가 들어왔다.
“학회실이 아주 쓰레기장이 따로 없네. 책상이 이게 뭐야? 먹고 나면 쓰레기 치우라고 안 했어?”
“이거 저희 오기 전부터 있었는데….”
“그래도 봤으면 치워야 할 거 아냐? 다 같이 쓰는 학회실인데 더럽게 계속 내버려 둘 거야? 뭐야, 공제희, 너도 있었어? 과대가 모범을 보여야 할 거 아냐?”
“저 과대 아닌데요….”
“다음 예비 과대 너잖아? 되기 전부터라도 열심히 해야지!”
제희는 차마 과 대표에 입후보할 생각이 없는 데다 제안이 와도 거절할 거란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대꾸를 하든 그에게 반박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학회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잔소리를 일발 장전하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냥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저 선배는 스트레스를 저보다 낮은 후배들에게 기합을 줘서 푸는 타입이고, 자신이 잘한다고 자부하던 게임에서 제희가 등급이 훨씬 더 높았던 데다 일대일로 대결한 것까지 진 이후로 특히 제희에게 행패가 심했다.
‘일시 정지 기능이 있었다면 저 문이 열리는 거 보자마자 문 뒤로 숨었다가 튀었을 텐데.’
처음엔 재미로 했던 상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기능이 꽤나 간절하다고 제희는 생각했다.
‘현실도 게임 같았다면 참 살기 편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