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2화 (312/604)

“면목이 없군…. 난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졌던 게야. 이미 내 사명은 세상이 멸망했던 시점에서 완수할 수 없는 유명무실한 거였는데 집착을 하고 말았던 게지.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거라 계속 믿어 버린 것이네. 사실… 그건 사명을 전하기 위해 언제까지고 기다리는 우리의 역할과 모습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나 싶네.”

마치 인삼의 꽃말처럼.

“그건 결국 참된 인내가 아니었어. 그동안 내가 해 왔던 건 회피라네. 나와 군락지의 모두가 사명을 다하는 것을 실패했다고 인정해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고 우리의 오랜 인내는 결국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결론이 나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네.”

세상이 멸망하며 동굴 속의 시간이 멈추자 사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절박했던 왕은 결국 그것을 기회로 여겨 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기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픈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는 법. 나의 잘못된 판단이 우리의 새로운 세대가 시작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 진작에 손을 놓았으면 이 지경까진 오지 않았을 것을.”

왕은 내가 안고 있는 도끼를 두 손으로 쥐고 내가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 손은 이제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살짝만 스쳐도 수십 개의 칼날이 파고드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러나 도끼 자루를 놓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쥐었다.

“집중하게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각오를 다져야 한다네. 당신이 베어야 할 것은 한 생명에서 시작된 세대가 수십 수백은 뻗어 나갔을 시간을 살아온 고목일세. 덕목은 허울만 남고 그 안에 미련하게도 삶에 대한 집착과 통한, 원념이 채워져 쉽사리 베이지 않는 단단한 망령 덩어리지.”

도끼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흉흉해서 난 애써 긴장을 풀기 위해 침을 꿀꺽 삼켰다.

“꺾이고 싶지 않아서 못난 마음에 당신에게 탈을 낼 수도 있다네. 존재가 본질을 잊는다는 것은 이리도 무섭지. 삿된 본능이 바른 의지를 누르고 이성의 주인인 양 행동하는 걸세.”

지금은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언제 돌변해서 날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만큼… 나는 망가져 버렸다네. 그러니 자, 자네의 손으로 이 뒤틀린 이야기의 끝을 내게나.”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마지막이었다.

웃으며 떠나던 인삼 드라이어드들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면 이 인삼 드라이어들과 모험을 떠났을 수도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제때에 도착했다면 이곳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내 모험의 시작은 어쩌면 26번째 테라리움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

“전… 앞서 이곳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던 인간들과 다르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이건 손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보고 겪은 수많은 기억들이 슬픔으로 응어리져 목소리를 틀어막고 있었다.

“전 비록 이 근방 마을… 아니 테라리움은 아니지만, 멀리 떨어진 두 개의 테라리움을 관리하고 있는 행정 관리원이에요. 모르실 수도 있어서 말씀드리는데 행정 관리원은 왕과 비슷해요.”

“나무들에겐 나무들의 왕이 있듯이 인간들에게도 인간들의 왕이 있도다.”

노파가 있던 자리엔 어느새 그녀가 사라지고 그녀를 대신해 거대하고 검은 나무의 형체가 아지랑이처럼 흐물흐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제대로 관할 테라리움의 관리를 받지 못한 데다 오래전 행정 관리원의 직책을 내세워 잔인한 짓을 벌인 사람들 때문에 행정 관리원을 신뢰하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제 관할로 만들고 다른 행보를 걸을 거예요. 반드시 다른 이들의 손에 더 망가지지 않도록 보호할 거예요.”

“이 땅은 인간들의 왕이 지배하는 땅이니 인간들의 법도로 처리해야 한다.”

내 말에 망령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미련이 남았다는 뜻이다.

본인 스스로가 자신을 다시 돌아볼 시야를 가졌다 하더라도 끝내 초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착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쾅!

온 힘을 다해 도끼를 들어 올리고 힘 있게 내려찍었다.

무딘 도끼날에 나무 허상의 허리가 움푹 패었다.

나무는 정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이곳에 어린아이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도록 만들게요…. 과거 이곳의 모두가 바랐던 것처럼 미래의 이곳은 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에게 쉼터가 될 거예요. 이곳에 활기를 되찾고 멈춘 시간을 흐르게 만들어서 오랜 역사 속에 고립되어 잊히지 않도록 할 거예요. 인삼 드라이어드들에게도… 제게도 이곳은 아주 특별한 곳이니까.”

“그러니 왕은 약속하노라.”

머리에 뜨거운 피가 돌며 손의 고통이 잠시나마 무디게 느껴졌다.

쾅! 쾅!

연거푸 도끼질을 하자 비로소 나무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어쩌면 모습이 달라졌겠지만… 전… 제 영혼은 결국 여기 도착했어요. 그리고 절 맞이해 주셨잖아요? 당신들의 사명은 완수하지 못한 게 아니에요. 제게 전해졌어요. 비록 계획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제게 전해 주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듣기 힘들었을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생의 내가 이 세계로 왔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 게임 속 세상으로 넘어오게 된 이유를 짧게나마 고찰해 볼 수 있었다.

이건… 어쩌면 앞으로의 수많은 여정과 선택 속에서 영향을 줄 것이다.

쾅!

다시금 도끼를 내려치자 나무는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러니 오랫동안 절 기다려 준 당신들께 이젠 제가 보답할 차례예요. 제가 했던 말은 제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지킬게요.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으로서, 드루이드로서 그리고… 세계수의 대리자의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약속할게요.”

내 모든 명예를 걸고.

“어명이오!”

쾅!

마침내 마지막 도끼질에 거대한 검은 나무가 완전히 넘어갔다.

와장창!

무언가 박살 나는 엄청난 파열음이 공간 안을 가득 채웠다.

“언제 들어도 달콤한 유혹이도다…. 그러니 내 어찌 또 한 번 내 목숨을 넘기지 않을 수가 있으랴….”

왕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쩐지 후련함이 가득 담겨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기둥이 완전히 부러진 검은 나무의 환영도 재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투둑, 툭, 툭.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굴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동굴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나 정확히는 이 공간을 덧씌우고 있던 거대한 환영의 파편 조각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파편은 마치 별 가루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던 곳이지만 그 최후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난 마치 은하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완전히 무(無)로 화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잘못 맞춰진 그림 조각이 뒤엎어져 와르르 빠지고 새로 맞춰질 준비가 되었다.

팔랑.

떨어지는 파편 사이로 하얗거나 누런 종이들이 흩날렸다.

그중 하나가 보란 듯이 내 시야를 가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젠 굳어 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팔을 애써 들어 종이를 잡았다.

“찾았다….”

글로리아가 찾는 서류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을 테니 한눈에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종이엔 확실히 글로리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 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이름이 몇 개 더 있었다.

서류의 정체는… 내용만 번지르르할 뿐 실상 노예 문서였다.

그곳엔 노예라는 말 대신 44번째 테라리움 소유의 인적 재산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개인이 재산을 축적할 수 없으며, 모은 재산은 반드시 테라리움에 환원하고, 주거지 또한 가질 수 없으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 소유권자가 요구하면 무상으로 헌신해야 된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테라리움의 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니 어떠한 보호도 받을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선 생명을 바치는 일 역시 소유권자가 원하는 때에 헌신하는 범위에 속한다고 했다.

서류 말미엔 글로리아가 대를 이어 노예 신분을 물려받은 것처럼 그녀가 자식을 낳을 시 그 신분이 대물림된다고도 적혀 있었다.

이를 지키지 않을 시, 같은 신분의 다른 이가 불이익을 받을 거란 조건까지 붙은 개쓰레기 문서였다.

하단에 찍힌 세계수 문양의 도장은 확실히 진품이었다.

이건 내가 행정 관리원이니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본 글로리아는 44번째 테라리움의 비선실세였다.

그런 그녀를 얽매는 이런 악독한 노예 문서가 존재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기를 쓰고 이 문서를 손에 넣으려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이!”

“제이 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무척이나 반가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어느새 내가 입고 입던 한복은 온데간데없고 내 차림은 본래의 장비로 돌아왔다.

테라리움 아티팩트까지 왼쪽 손목에 곱게 채워져 있었다.

“이게 대체….”

거대한 누군가가 나를 힘 있게 끌어안았다.

매운 스모크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그 포옹만으로도 그녀가 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만 따로 떨어져 이상한 공간에 갇혔을 때 다들 어떻게 된 걸까?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니 길드원들 말고도 많은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끔찍하게도 옷에 감싸인 백골도 있었으나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자가 더 많았다.

어쩐지 그들이 동굴에서 숱하게 행방불명된 사람들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메스키트… 나도 정말 반가운데… 좀 놓아주면 안 될까?”

아티팩트가 사라졌을 때 나와 동떨어진 드라이어드들은 어쩌고 있었을까?

잔뜩 걱정하는 얼굴들을 보고 있으니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 팔 부러진 거 같아…. 팔에 이제 감각이 없어.”

“제이! 팔이….”

양팔은 이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솔직히 부러진 건지 아니면 완전히 박살 난 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감각 자체가 둔해지고 있었다.

퉁퉁 부었는지 소매가 팔을 옥죄는 것처럼 꽉 끼었다.

장비 강화로 인해 엄청난 사기 능력인 ‘시간 정지’를 얻었지만 밸런스 조절 때문인지 반동이 장난 아니었다.

피격 당시의 시간을 계속 정지시킬 수 있지만 착실히 대미지는 누적됐다.

그리고 시간 정지가 풀렸을 때… 그 여파가 한 번에 몰려오는 것이었다.

그건 어쩐지… 정지되었던 인삼들의 태초의 군락지가 지금처럼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 특수 능력 영리하게 쓰지 않으면 내 몸만 축나겠는데….

“나 너무 고생해서 피곤해 죽을 거 같아…. 그러니까 조금만 잘게.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해 줄게. 내가 쥐고 있는 종이는 꼭 잘 챙겨 줘.”

혹사당한 몸이 경고등을 울리는지 졸음이 밀려왔다.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로 비틀비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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