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둔하게 만들 정도로 온몸을 잠식한 불쾌한 감정을 떨쳐 내는 것은 꽤 힘이 들었다.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려 문지르니 손에 까칠하고 버석한 감촉이 느껴졌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는 귀신처럼 봉두난발이고 처음엔 제법 고왔던 한복도 여기저기 찢기고 더러워져 걸레짝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꾀죄죄한 몰골이 기분 나쁘기보단 어쩐지 뿌듯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홀로 버티고 해냈다.
이건 나의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불쾌한 기억에 옴짝달싹도 못한 채 날 노리는 망령에게 가만히 목을 내어 줄 순 없었다.
망령을 드라이어드라고 착각한 불의 어그로가 튀어서 아주 잠깐의 시간이 생겼다.
내게 허락된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야 했다.
제발, 발동해라! 만물을 보는 눈아!
망령을 설득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내가 호의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태초의 군락지에서 가호의 힘을 이용해, 이곳에 묶였던 드라이어드들과 아이들의 영혼을 해방해 주었던 장면을 보여 주어야 했다.
특정 장면을 골라서 보여 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귀찮게 들러붙는 불을 저 멀리 던져 버린 망령의 어그로가 내게로 돌아왔다.
난 제자리에 서서 끈질기게 망령의 뻥 뚫린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간절히 빌었다.
제발, 실새삼이 내게서 전 주인의 환상을 본 것처럼 무언가 보여 줘!
망령이 조종하는 뿌리의 날카로운 끝이 날 향했다.
단숨에 날 꿰뚫어 버릴 심상인지, 뿌리가 쏘아진 창처럼 날카롭게 쇄도해 왔다.
방어를 하기 위해 손을 든 순간, 눈이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홧홧해졌고 머릿속이 진창이 된 것처럼 강한 두통이 밀려왔다.
그리고 뿌리의 움직임도 멈췄다.
망령 역시 그 자리에서 움직임이 멈춘 채 사시나무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다.
만물을 보는 눈의 힘이 발동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느새 망령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찬란한 금빛에 감싸여 있었다.
눈의 힘이 영혼을 해방하는 환상을 보여 주고 있는 걸까? 그래서 나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고 있는 걸까? 그렇기에 나를 아군으로 생각하고 공격을 멈춘 것일까?
그런데… 힘이 통했다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망령은 금세 뿌리를 휘둘러 공격을 재개했다.
뭔가 이상했다.
“왜 안 통하지?”
그 미쳐 버렸던 실새삼마저도 그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제 주인이라 철석같이 믿어 움직임을 멈췄다.
설마 망령은 불안정한 존재라 이런 힘이 통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대체 이제 난 뭘 해야….
불안하게 흔들리던 시야에 또 다른 이상 현상이 잡혔다.
금빛은 한 곳에서만 타오르고 있지 않았다.
망령을 휘감던 금빛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곳이 아닌 노파가 있던 곳에서도 선명한 금빛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옆의 건물을 망령이 무너뜨린 이후로 행방이 모호했던 노파가 잔해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노파는 단순히 금빛에 휩싸여 있는 것뿐만 아니라 두 눈 또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맹수의 눈처럼 형형하게 샛노란 빛을 내고 있었다.
왜 노파에게까지 변화가 일어난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오로지 망령에게 집중하여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노파에게 힘의 파장이 끼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자면 망령보다 오히려 노파에게 힘이 제대로 직격했다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자 노파를 향한 의심스러운 점들이 하나둘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왜 노파는 아이의 모습을 하지 않았지?
이곳의 드라이어드들은 반강제적으로 아이의 모습이 덧입혀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드라이어드라고 했던 노파는 홀로 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눈이 텅 비어 버린 망령… 그에 반해 만물을 보는 눈의 힘을 받은 것을 여실히 보여 주듯 형형하게 빛이 나는 노파의 두 눈.
내가 상대하는 자가 정말 망령이 맞나?
난 땅에 떨어진 도끼를 주웠다.
손의 고통은 이제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힘겨워졌다.
어쩌면 이것이 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었고 그 기회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영영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 감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상대해야 할 망령은 이쪽이 아니라고.
도끼 자루를 계속 쥐고 있는 것이 힘들어 품에 안고 노파에게 달렸다.
그 순간, 마치 노파가 보는 광경 속에 진입하는 것처럼 내 발이 닿는 공간 하나하나가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우린 다시 태어날 겁니다. 그리고 이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당신을 다시 만날 거예요. 그건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지만 과거에는 보상받지 못했던 기다림을 이번에는 꼭….”
땅굴 속에서 아이들의 영혼을 안고 하나둘 떠나던 드라이어드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왕께서도 이만 돌아오십시오. 이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저희는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해서 기뻤습니다.”
“짧게 생을 끝낸 아이들이 원통하지 않도록 열심히 놀아 줬다고 생각해요.”
하나 이 기억은 그들의 작별 인사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다.
“당신이 왕이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저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건 당신만의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왕이기에 우리 모두의 생각을 대표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젠 끝내야 할 때입니다.”
“부디 태어날 적의 사명을 기억하소서….”
가까이 다가간 노파의 모습은 슬픔과 회한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는 내가 보여 주는 드라이어드들의 허상들을 향해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역시나 왕은 이쪽이었구나….”
처음엔 인삼 드라이어드의 왕이 저주를 받아 변모한 게 망령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원념이 뭉쳐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했으나 본질이 드라이어드라고 했으니까….
포레스트의 왕은 포레스트를 이루는 드라이어드들의 영혼을 위탁받는 존재다 보니 저주도 더 크고 악랄하게 받았을 거라고 봤다.
그래서 홍동들이 말했던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 찾아야 하는 가장 처음의 실은 망령이라고 판단했다.
망령만 물리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만물을 보는 눈의 힘이 내게 그것은 착각이라고 알려 주었다.
가장 처음의 실은 이 노파였다.
“내가 아무리 도끼를 휘둘러도 소용이 없었던 이유를 알겠어요. 애초에 이 도끼가 찍어 내야 할 과거의 원념은 저 망령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당신 그 자체였기 때문이에요.”
이곳의 시간이 멈추는 데 가장 큰 힘을 기여한 존재.
왕이기 때문에 드라이어드 고유의 위대한 힘을 가장 크게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이자 이 장소를 유지해야 된다는 책임으로 인해 다른 드라이어들보다도 열망이 가장 강했던 존재, 그게 바로 드라이어드들의 왕이었다.
“내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었군…. 이 못난 왕을 만나서 고생만 하고….”
노파는 찌푸린 얼굴을 하고 내가 안고 있는 도끼 자루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처음에 유령처럼 도끼를 통과해 버렸던 손은 아무렇지도 않게 도끼를 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도끼를 집어서 던져 주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랬군, 그래서 내가 이 도끼를 만질 수 없던 것이었어. 내가 망령이었기 때문이었군. 나를 이루는 것이 과거의 원념이란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를 끊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만지지 못했던 것이야.”
마치 그 어떤 조언이나 방안도 결국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온전히 나를 돌아볼 수 있도록 그 아이들이 내 마음의 짐을 덜고 갔군.”
스스슥.
타오르는 불 위로 물을 끼얹은 것과 같은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날 쫓아오던 망령의 모습이 세차게 피어오르는 금빛 수증기와 함께 바뀌고 있었다.
“이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는 자는 다른 이란 생각에 나 자신을 버리게 되었으니 모습이 바뀌고….”
망령의 커다란 풍채가 줄어들고 등이 굽었다.
남자의 모습을 했던 것이 여자로 바뀌고 옷도 노파가 입은 것처럼 하얀 소복으로 변했다.
망령은 어느새 노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현재를 직시하지도 않으니 두 눈이 없고….”
검게 텅 비어 버린 망령의 두 눈 자리에 천천히 붉은 홍채를 가진 두 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책임을 회피하고 잘못된 현재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너를 향한 공격이 되었구나.”
나를 죽어라 공격하던 뿌리의 공격은 어느새 뚝 멈춰 버린 후였다.
더 이상 둘 중 누구를 망령이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할 정도로 거울에 비춘 것처럼 똑같은 모습 둘이 앞뒤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는 굽은 허리를 폈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그녀는 노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어느새 여타 다른 곳에서 봐 왔던 왕의 모습들처럼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우린… 아니 난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목소리에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전생의 저를요?”
다른 인삼 드라이어드가 말했듯이 그녀 역시 내 영혼을 기다리고 있었노라 말했다.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네. 웃음이 끊기고 희망이 사라진… 망가져 버린 우리의 군락지를 보면 당신이 크게 실망할 거라 생각했다네. 그래서 겁이 났지.”
하지만 어느 날 그들의 군락지를 방문한 회양목 드라이어드가 한 행동을 보고 희망을 봤다고 한다.
아이들이 뛰놀기 시작하니 군락지에 다시 생기가 돌았고, 절망에 잠겨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하나둘 군락지를 가꾸고 수선하며 옛날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찾아 갔다.
“가장 아름다웠던 그날의 그 모습 그대로 당신을 맞이하고 싶었다네.”
고향으로 돌아온 고아들의 뒤를 밟아 쫓아왔던 인간들 역시 환대하고 맞이했던 이유였다.
본래대로라면 내가 동굴에 들어오기 위한 시련으로 애먹었던 것처럼 그들을 막아 냈을 것이다.
태초의 군락지는 한 종의 탄생 신화와 더불어 위대한 힘을 지키기 위한 요새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한 드라이어드가 군락지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듯, 그들 역시 군락지를 발전시켜 줄 것이라 믿었다.
또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나 역시 인간의 모습으로 올 것이기에 같은 인간들이 머물고 있는 것이 더 이로울 거라고 봤다.
그들이 달콤한 말로 왕을 속이자 이런 생각들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들은 고아들을 위해 이곳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개발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했지. 그들은 인간들이 사는 마을을 대표하는 자 대신 왔으며 그자에게서 최선의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했다네.”
인간들이 사는 마을을 대표하는 자는 행정 관리원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회양목이 남기고 간 거대한 모체는 건물의 보수와 확장에 쓰일 것이고 우리들의 땅속 깊이 박힌 뿌리는 기둥을 세울 자리를 위해 비켜 주었으면 한다더군.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드라이어드의 입장에서 군락지를 파괴한다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잠시만 눈을 감아 달라고 했지. 어차피 우리의 썩어 버린 뿌리는 오랫동안 새겨놓은 세월의 역사도 모두 사라진 채 자리만 차지할 뿐이니 잠자코 그들의 말을 따랐다네.”
인삼 드라이어드들은 달라질 군락지의 미래를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드라이어드는 잠을 자지 않으나 눈을 감고 애써 세상과 자신들을 차단한 것이다.
그들은 영악하게도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드라이어드들을 안심시키려 거짓말을 해 댔다.
이곳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고아들도 머물 수 있도록 큰 건물을 세우라 이르셨노라.
병들어 죽는 아이들이 없도록 의료원을 지으라 이르셨노라.
그러나 다른 마음을 품었던 인간들은 그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흙으로 덮어 생매장해 버렸다.
그리고 잔인하게 군락지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끊임없는 비명이 흘러나왔으나 시끄러운 기계음과 소음들 속에 파묻혔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흙을 헤쳐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아이들은 모두 죽고 아름다웠던 군락지는 철저하게 망가져 있었다.
끝내 절망에 가득 찬 드라이어드의 왕이 잘못된 힘을 사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