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0화 (310/604)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손을 다친다면 도끼를 들 수도 없고, 더 이상의 몸부림도 불가능했다.

아무도 찾지 못할 이곳에서 쓸쓸히 죽어 갈 수도 있었다.

위로 피가 쏠리는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을까?

분명 무언가 희망이 있으니 내가 이곳에 오게 됐을 거야.

점점 심해져 오는 손의 통증… 멈추지 않는 망령의 공격…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는 무력감… 줄어드는 타이머… 절망….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가는 기억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죽을 위기에 내몰렸을 때가 한 번 더 있었다.

마거리트에 의해 정말로 죽을 뻔했던 목숨을 건졌을 때는, 정작 내가 죽을 거란 사실을 몰랐으니 그만큼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섬의 공중정원 꼭대기에서 미쳐 버린 실새삼을 상대했을 때, 그땐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마 죽음에 대한 날것의 두려움을 느끼게 된 이유가 마거리트의 예언 때문에 현실 감각이 해금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난… 솔직히 게임 속의 유저 캐릭터나 다름없어서 은연중에 죽음과는 많이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거리트가 얼굴에 드러나는 불가사의한 페널티를 받으면서까지 내 목숨을 구해 낸 이후, 확실하게 알았다.

나도 죽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감각이 그때와 똑같았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좋지 않았던, 어쩌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불행일까?

나를 더욱 겁에 질리게 만들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는 기억이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모험 따윈 하지 않았다.

그동안 수없이 위기를 넘겼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때마저도 내게 기적 같은 힘이 발동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실새삼의 목을 시들링의 검이 베기 직전, 실새삼이 나로 하여금 자신의 전 주인의 모습을 오버랩하여 봐 버린 그 순간.

지금과 그때의 다른 점이라면?

단순히 시들링이 있었기에 내가 이전의 그 순간을 벗어날 수 있었나?

아니었다.

눈. 그래, 본래의 내 눈에서 변화한 황금빛 눈. 그때의 내게는 만물을 보는 눈이 있었다.

난 이젠 제 모습을 찾고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 버린 드라이어드들이 내게 청사초롱을 나무에 비춰 보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무런 의심 없이 초롱으로 나무를 밝혔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후 아이들은 오히려 멀쩡한 나를 보고 놀라워했었다.

내가 미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것처럼.

그리고 분명 그때 아이들이 내 눈 색이 달라졌다고 했지.

그건 어쩌면 만물을 보는 눈의 힘이 돌아와 내 정신이 타격을 받지 않도록 도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다.

실새삼이나 내 눈의 정체가 만물을 보는 눈이라고 알아봤지, 솔직히 그 눈이 정확히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드루이드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힘? 내가 대상자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힘?

그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세계수가 관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그 눈은 어쩌면 초월자인 세계수에 비견될 만큼 굉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겪었던 능력 중엔 지금 상황에서 아주 절실한 능력이 있었다.

실새삼이 나로부터 과거 주인의 모습을 봤던 것처럼… 대상자에게 무언가를 보여 줄 수 있는 그 능력 말이다.

그 당시엔 간절히 바라며 멈추라고 외치다 보니 발동해 버려서 정확히 어떻게 발동하는지는 모르나, 일단 지금의 내 눈 색이 금색이라면 가능성이 있을 텐데.

여태 위기일발의 상황이 많이 닥쳤지만 내 눈이 별다른 힘을 보여 주지 않은 걸 보면, 그 만물을 보는 눈이 사라졌을 거라 보는 게 맞겠지.

거울이 없으니 정확히 내 눈 색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뛰었다.

길드원들과 동굴을 탐험하며 수없이 보았던 수정 바위가 떠올랐다.

갑자기 현실과 뒤바뀌어 버린 공간 속에 그 수정 바위가 아직까지 존재하는지 모르겠으나 밑져야 본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제퍼가 조작하던 수정 바위가 이 근처였다.

행여나 망령의 공격이 수정 바위를 망가뜨릴 것이 걱정되어 일부러 건물 사이사이에 몸을 숨기며 이동했다.

망령은 이 공간의 건물들을 전부 박살 내는 것만큼은 원치 않았는지 공격이 소극적으로 변했고 결국 날 놓쳤다.

그리고 운 좋게도 수정 바위 역시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있다!”

마지막 기억 속의 형태에서 다운그레이드된 것처럼 현재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한 면이 거울처럼 매끈하고 반들거리는 것은 똑같았다.

마침 주변엔 요동치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 덕에 은은한 빛이 있었다.

그래서 황급히 수정 바위에 내 얼굴을 비춰 눈 색을 확인했다.

검은색…. 이건 좀 환장하겠는데.

“왜 돌아간 건데!”

다시 만물을 보는 눈을 불러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무를 비춰 볼 청사초롱이 이젠 없는데.

노파가 하나 더 가지고 있을까?

멀리 그녀가 마지막으로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으나 무너진 건물 잔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손은 갈수록 아파 왔다.

미약한 통증이 크게 부딪힌 후 느껴지는 둔통으로 변해 갔다.

“불!”

그러고 보니 청사초롱은 기이하게도 몬스터 불을 사용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이곳에 진짜 드라이어드는 없다.

불의 유일한 천적은 드라이어드이기 때문에 그 불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직 어딘가에 불이 돌아다니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저 근방이었던 것 같은데.”

노파가 내게서 청사초롱을 빼앗아 망령에게 던졌던 부근이 근처였다.

다만 거대한 나무에 더욱 가까이 갔다간 다시 망령에게 발견될 확률이 높아서 조심해야만 했다.

불은 청사초롱 안에 곱게 갇혀 있을 만큼 매우 작았다.

그것이 돌아다니며 뭔가를 흡수했다면 커졌을 텐데, 이 근방에 불이 먹을 만한 생명은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건물들을 이루고 있는 썩은 목재들이려나?

이 넓은 공간을 백 원짜리 동전만 한 불을 찾기 위해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정말 우연찮게도 집 기둥의 아래에서 그을린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풀려난 불은 먹이를 찾기 위해 빨빨 돌아다니며 먹을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태워 먹고 있었다.

하지만 검게 그을린 자국을 보면 겨우 혀로 핥는 수준에 그친 것이 분명했다.

불 몬스터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으로선 다행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옮기지? 이곳에 불의 먹이는 없다고 했지만 난 달랐다.

불은 드루이드를 먹을 수 있었다.

즉 내가 손으로 들고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럼 유인이라도… 이럴 때 다이아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청사초롱 안에 있을 땐 몬스터였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얌전했던 것이 풀려나니까 꽤 난폭했다.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자 날 먹기 위해 열심히 기어 왔다.

하지만 너무 작아서 속도도 느렸고 내가 조금만 거리를 벌리자 금세 날 놓쳐 버렸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저걸 데리고 나무까지 유인할 수 있을까?

다이아 대신 먹이처럼 던져 줄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목재에 겨우 그을린 자국만 낸 것을 보면 그렇게 매력적인 먹이가 아니란 뜻일 텐데.

내 살점을 떼어 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쩌면….”

난 난리를 겪느라 산발이 된 머리를 한 움큼 잡았다.

떼어 낼 수 있는 신체라곤 머리카락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쥐어뜯을 순 없고… 주변을 돌아보다 깨진 기왓장을 발견했다.

그나마 파편이 날카로운 부분을 주워다가 머리카락을 잡고 조금씩 끊어 냈다.

여러 번 칼질을 하니 머리카락이 들쑥날쑥한 길이로 거칠게 끊겼다.

시험 삼아 손에 쥔 머리카락 뭉치를 뿌리니 떡밥을 뿌린 수면 위로 달려드는 물고기처럼 불이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역시 난 먹이로 보는구나.

심지어 불의 크기도 백 원짜리에서 오백 원짜리로 훌쩍 커졌다.

난 착잡한 마음으로 아직 긴 머리를 다시 한 움큼 잡았다.

“내가 머리가 길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

머리카락은 짧아질수록 잘라 내는 것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불은 착실히 조금씩 크기를 키우며 나를 잘 쫓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유인한 불과 함께 어느새 거대한 나무에 도착했다.

동시에 망령도 날 발견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아직 불빛이 나무에 닿으려면 거리가 모자랐다.

망령에게 공격받을 것을 각오하고 바짝 붙자 불도 날 따라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드디어 불빛이 나무에 닿았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혹시 불이 아닌 청사초롱에 답이 있는 거면 어쩌나 했다.

단순히 불빛이 닿는 정도로 그때의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빛을 받은 나무의 한 부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일렁이던 곳은 곧 흐물흐물하게 형태가 녹아내리며 그때의 끔찍한 광경을 재연시켰다.

애써 주시하고 있자니 기분이 급속도로 다운되었다.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네.”

“애새끼들은 어떻게 할까요?”

“다 죽여야지, 별수 있어? 네놈이 다 거둘 거야?”

만물을 보는 눈의 힘을 아주 오래 유지시켜야만 했다.

어쩌면 금방 눈 색이 변한 이유가, 내가 아이들의 부름에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울컥 토할 것 같은 불쾌감이 올라오고 식도가 홧홧해도 눈을 떼지 않았다.

“살려 주세요!”

“아이들을… 아이들을 모두 바깥세상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뿌리 하나 남기지 말고 베어 버려라!”

“대장, 여기 이 녀석들은 죽이기 아까운데 데려가서 노예로 파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차피 출신도 없는 녀석들이니 나서 줄 어른들도 없을 것 아닙니까?”

“뭐? 그랬다가 여기 일을 밖에 발설하면 어쩌려고?”

“본보기를 보여 주면 되지 않습니까?”

누군가 아이의 손가락을 붙잡아 칼을 대었다.

“만약 오늘 일을 발설한다면 네 친구의 손가락이….”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이들이 잔인하게 죽어 가는 광경을 생생하게 본 것만으로도 정신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사실… 난 이 광경을 이미 봤었다.

아이들이 청사초롱으로 비춰 보라고 했을 때, 분명 그때 봤었다.

하지만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광경이 끝나자마자 그것을 본 기억이 전부 사라져 버렸으니까.

만물을 보는 눈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기억이 휘발되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피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니 되살아난 기억이 다시 계속 새겨지고 있었다.

다만 앞부분의 기억이 점차 날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아하니… 어쩌면 지금쯤 내 눈이 금색으로 변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말 안 할게요… 제발 손가락을 자르지 마세요… 제발요….”

“너도! 네 녀석도 말하면 이 녀석의 귀가 잘릴 거야.”

눈가가 뜨거워졌다.

한계였다.

보고 있던 광경에서 황급히 눈을 뗐다.

그러자 아이의 손가락에 칼날이 대어진 순간부터 차츰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불빛을 나무에 비춰 봤던 것은 아주 끔찍하고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괴물 같은 것뿐이라는 기억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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