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9화 (309/604)

다시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드라이어드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국 이제 남은 일들은 나 혼자 알아서 해야 했다.

좁아 보였던 구덩이는 모두가 떠나 버리자 한없이 넓게만 느껴졌다.

의식하고 나니 흙에 깔린 차가운 한기가 얇은 옷감을 뚫고 소름끼치게 피부를 훑었다.

“장비가 전부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애매하게 장갑 한 파트만 돌아오다니.

이곳에서 나만 유일하게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가진 존재라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입고 있던 옷이 바뀌었는지,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은 왜 죄다 사라져 버렸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생겼다.

정말 현재의 난 정상이 맞는 걸까?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망령이 자리를 떠났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만… 내가 이 높이를 어떠한 도움도 없이 혼자 올라갈 수 있을까?

흙구덩이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돌을 잡고 천천히 암벽 타기를 시도해 보았다.

신발이 불편해 초반부터 미끄러지기를 여러 번, 결국 신발도 벗어 던졌다.

치마도 상당히 움직이기 힘들어서 온 힘을 다해 구겨서 묶거나 속바지에 집어넣었다.

믿을 건 장갑뿐이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애를 썼으나 내가 오른 높이는 불과 허리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애초에 별다른 기술도 없는 내가 직각이나 다름없는 통로를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이전의 나였다면 아예 팔 힘이 부족해서 매달리는 것 자체도 못 했을 텐데, 이 정도면 그나마 발전한 거라고 애써 자기 위안을 하며 내려왔다.

바로 보이는 출구가 있는데도 가질 못하니….

“다른 통로가 있다고 했었는데….”

직각만 아니면! 하다못해 적당히 기울어진 통로만 있어도 흙바닥에 발끝을 파묻고 올라갈 수 있을 텐데.

구덩이 벽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드라이어들이 말했던 것처럼 흙이나 고엽들로 가려진 출입구가 여러 곳 존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통로가 삽으로 거칠게 파서 생긴 것으로 보였지만, 어떤 곳은 구멍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지지대를 세워 그럴싸하게 출입구처럼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적당히 내가 이용할 수 있는 크기의 통로를 찾고 나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군락지가 왜 땅속에 있는 건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파생된 의문이었다.

어째서 처음부터 땅속에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파묻혔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나 그나마 경사가 완만한 통로를 기어오르며 생각했다.

천장이 제대로 다듬어져 있지 않았고… 굴도 밖에서부터가 아닌 안에서부터 파낸 것처럼 보였지.

만약 바깥에서부터 흙을 파냈다면 안으로 흘러 들어갈 흙을 치웠을 텐데, 흙더미는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은 정말 의문투성이인 장소였다.

겨우 바깥으로 나왔을 때, 난 뽑기 운이 정말 없는 건가 하는 절망이 들었다.

몸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입구가 좁거나 함몰됐던 통로들을 제외하고도 다른 선택지는 분명 존재했는데….

하필 골라도 꽝을….

어째서 여러 개의 선택지에서 망령이 빌붙어 있던 거대한 나무 바로 아래의 구멍을 선택했을까?

출구는 뿌리 바로 아래인지 위로 길게 그물처럼 뻗은 줄기들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서 다른 곳을 선택할까?

그런데 뒤로 빠지려는 발이 옴짝달싹도 못 했다.

내가 하도 거칠게 움직인 탓인지 지나왔던 경로의 흙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더구나 앞으로 나아가는 건 쉬워도 몸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 채 뒤로 빠지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여기서 죽을 때까지 버틸 것이 아니라면 저 뿌리를 헤치고 나가는 것 외에 길은 없었다.

스스로 불러온 뽑기 운의 재앙 때문에….

망령은 내가 나무에 손을 대자마자 반응을 했었다.

빠져나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뿌리를 건드려야 했으니,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와 대비를 해야만 했다.

속으로 수를 세며 손을 꼭 쥐었다.

노파가 전설의 무기처럼 소개했던 도끼도 난리 통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한 파트뿐이지만 장비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강화까지 했으니 뭔가 도움이 되겠지.

셋… 둘… 하나!

미친 듯이 구멍을 기어 나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달렸다.

하지만 워낙 급하게 행동했던 탓인지 땅 위로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던 뿌리 중 하나에 발이 걸렸다.

퍽!

턱 밑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넘어지며 흙바닥에 턱이 제대로 쓸린 것이 분명했다.

“네 녀석! 감히 다시 오다니!”

그러나 상처를 살피며 아파할 시간 따윈 없었다.

보스 룸에 입장하자마자 바로 시작되는 보스전처럼 망령이 분노하며 곧바로 공격을 날렸다.

성난 공격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살필 겨를도 없었다.

망령은 내가 넘어진 자세에서 일어날 시간을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일단 미친 듯이 땅을 굴러다녔다.

겨우 무릎을 세우려 해도 끈질기게 노려오는 탓에 온몸을 던져야만 했다.

나를 노리고 공격이 날아오니 당장은 내가 있던 자리만 피하면 됐다.

쾅! 쾅! 쾅!

필사적인 움직임 덕에 몇 번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얼핏 시야에 잡힌 광경 안에 내가 있던 자리가 완전히 작살 난 것이 보였다.

겨우 빠져나온 땅속에 다시 묻어 버릴 심산인지 거대한 뿌리가 연이어 땅을 찍어 댔다.

두려움을 비롯한 온갖 감정 속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의 끈을 겨우 붙잡아 몸을 맡겼다.

시야는 핑핑 돌고 입 안에 까칠한 흙이 밀려 들어왔다.

무슨 놈의 공격이 쿨타임도 없어!

쐐액!

벌렁 드러누운 곳 위로 거대한 뿌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몇 번의 공격을 피해 버리니 이젠 내가 피할 방향을 예측해 공격한 것이다.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막았다.

얼굴이 뭉개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건… 즉사니까.

텁!

공격이 막혔다.

그런데….

“어라? 왜 안 아프지?”

지반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었다.

난 손가락이 깨지고 팔이 부러질 것을 각오했다.

차라리 두 다리가 멀쩡하면 도망이라도 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뿌리를 붙들고 있는 손이, 아니 장갑이 금빛의 아우라로 뒤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태양의 가호를 담은 보석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설마… 특수 능력이 발동한 건가? 그렇다면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 특수 능력의 발동 방법도, 응용법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패시브처럼 알아서 튀어 나와 주니 생명 없는 보석이 기특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네 이놈! 감히 어떻게 그 힘을…!”

뻥 뚫린 두 눈이 원망스럽게 날 바라보았다.

망령이 주춤한 틈을 타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 상황도 인삼 드라이어드들의 저주를 풀어 줄 때처럼 망령이 보석을 만지게 하는 것만으로 타파할 수 있는 걸까?

단순히 손을 대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다.

입구를 헤쳐 나오다 뿌리를 만졌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까.

손등으로 터치를 해야 하나?

아주 잠깐 움직임이 멈춘 뿌리에 보석이 박혀 있는 손등을 댔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이 행동이 망령을 자극하기라도 한 것인지 공격은 더욱 난잡해졌다.

난 공처럼 굴러다니던 것을 멈추고 손을 뻗어 적극적으로 방어를 시작했다.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뿌리를 막아도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두 손이 닿자 알 수 없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뿌리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살짝 장갑에 떨림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루비의 힘을 덧입혀 발동한 엘더의 강한 보호막처럼 내게 피해가 오진 않았다.

차라리 한눈에 움직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뿌리가 공격하니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전에 쓰기엔 몸놀림이 아직 둔한 내가 겨우겨우 손을 뻗어서 막을 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만약 이런 사기적인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데이지의 공격을 막아 내라고 하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뿌리의 공격을 족족 막아 낼수록 망령의 분노는 가히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끓기 시작했다.

비록 두 눈이 뻥 뚫린 괴기한 모습이었으나 제법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 것이, 어느새 뒤틀린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의 팔다리가 기이하게 꺾이고 목이 시계추처럼 흔들거렸다.

솔직히 저 모습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내 멘탈에 크나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물리가 안 통하니 정신 공격인가….

“이걸 쓰거라!”

언제까지 방어만으로 이 상황을 버텨야만 하나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노파였다.

그녀는 어디서 찾은 것인지 낡은 도끼를 들고 와 내 발밑으로 던졌다.

분명 허리 굽은 모습인데 제법 먼 거리에서 무거운 도끼를 단숨에 내던지는 것이 신기했다.

드디어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양손으로 들어야 하는 무거운 도끼를 들면 비는 손이 없어서 방어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예 도망칠 곳에 도끼를 던져두고 뿌리를 유인하여 방어 후 도끼를 쓸 타이밍을 노렸다.

“여전히 안 통하는데요!”

이건 좀 억울했다.

가까스로 히트 타임이 나오긴 했으나 이가 빠지고 무딘 도끼가 이전처럼 뿌리에 전혀 상처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낀 것이 아무리 밸런스 파괴급의 장갑이라도 공격력 보정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무기는 없어요?”

차라리 날이라도 좀 다듬어진 무기면 모를까.

“그걸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는 그것밖에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게 시간이 없단 거란다!”

노파는 급박한 목소리로 내게 외쳤다.

시간이 없다니?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으나 망령은 대화를 차단하려는 것처럼 노파가 서 있던 자리의 옆에 있던 건물을 무너뜨려 버렸다.

“내가 도와줄게! 대화로 풀면 안 될까? 난 여기 처음 왔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니 마음이 절로 급해졌다.

대체 어디서 한정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지 모르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망령은 내 말을 무시한 채 공격을 이었다.

도끼가 안 통하니 무리하게 공격을 시도하지 않고 온전히 방어에만 집중하며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여기 있던 드라이어드들의 저주는 내가 모두 풀었어! 너도 저주에 걸린 거지?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이 아니란 건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냐?”

쾅!

“내가 풀 수 있어!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인삼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아이들도 모두 돌아갔다고!”

“아이들을 죽였다고?”

쾅!

방금 건 정말 위험했다.

내 말을 완전히 곡해해서 들은 망령의 공격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이미 죽은 아이들을 어떻게 내가 또 죽여!

“말 좀 제대로 들어! 난 적이 아니라고!”

혹시 도끼에 숨겨진 특성이 있는 거 아닐까?

낮은 확률로 공격이 먹힌다거나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이 낡아 빠진 게 이 상황을 타파할 유일한 정답일 리가 없어.

다시 공격을 시도해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손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전까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불길한 징조였다.

잠깐만… 시간 정지라는 특성… 유지 시간이 언제까지지?

설마 그 말의 뜻이…?

노파의 말처럼 정말 내겐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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